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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나태함을 극복하자 (삼하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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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전만 해도 오늘과 내일 중부지역에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호우주의보가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호우주의보가 해제되고 날씨 속에 예배를 드리게 해서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토요일날 가족식사를 하면서 자녀들에게 그랬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비가 오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 교인들 어디 멀리 안 가서 주일날 다 올텐데...’ 7월부터 전국적으로 주5일제가 확산되고 공무원들도 주5일제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야말로 일주일의 이틀은 쉴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뼈빠지게 죽을 힘 다해서 일 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적어도 7일 주에 이틀은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제도적 시대가 다가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합니다. 주5일 시대에 금요일 오후면 자동차 가지고 산으로, 들로 다 빠지지 않겠는가? 그러면 교회는 텅텅 비지 않겠는가? 발빠른 사람들은 해수욕장에, 저 유명한 산에, 거기다가 교회를 세우고 찾아오는 교인들을 거기서 예배를 드리게 하면 어떨까? 그런 이야기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토요일마다 비가 오면 ‘아휴, 이번 주는 못 나가겠네.’ 그리고 주일날 할 수 없이 교회는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생각해 보면 웃기는 생각이지요. 언제까지 1년 52주를 그렇게 환경적인 이유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아무리 여건이 좋아도 예배자는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주5일제가 되어도 우리의 예배는 부활 후 첫아침에 드려지는 예배가 우리에게서 떠나지 이제 영화관도 금요일날 저녁에 하는 시대가 되었고, 모든 계획들을 금요일 오후에 잡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가능하면 모든 교회에 일반적인 행사들은 토요일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 성도들은 토요일 행사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주일날 어떤 행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가정에 중요한 대사라고 할 수 있는 결혼예배도, 또 칠순이나 팔순의 잔치도 어린이 돌예배도 토요일 오전이나 오후 혹은 평일을 택해서 하는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5일제가 된다고 해도 사실 그런 생활에 주일을 중심으로 해서 훈련되어진 성도들에게는 사실 그렇게 염려스러운 일은 아닙니다만은,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주5일제가 주는 그런 신앙적 유혹도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평안의공동체가 주 5일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신앙은 변함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7월이 되면서 이제 날씨도 더워지고 긴장도 많이 풀어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교회 나오실 때 복장도 많이 밝아졌어요. 양복은 검정색, 청색 계통인데, 와이셔츠 계통을 입으시니까 많이 밝아진 것 같습니다. 반팔을 입으시면 그 자체가 정장이니까 별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더워지고, 우리의 마음도 풀어지고 긴장도 이완이 됩니다. 그러다보면 실수도 많이 하게 마련이지요. 군대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유격훈련을 받게 되면 저희 때에는 유격훈련을 가기 전 날 전부 집합을 시켜서 매를 맞았습니다. 군기 빠지지 말라고 미리 매를 맞습니다.

매를 맞는다는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아주 도끼자루 있지 않습니까? 곡괭이 자루로 곡괭이를 밑으로 빼고서 그걸로 맞으니까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렇게 쭈욱 맞으니까 왜 맞습니까? 우리가 뭘 잘 못했습니까? 내가 이등병 갔을 때 곧바로 유격훈련을 갔는데 그 전 날 밤에 모여서 매를 맞는 거예요. 물어봤어요. 우리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훈련 가기 전에 군기가 빠질까봐 걱정해서 매를 맞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산에 가서는 유격훈련을 하면서 그 밤 중에 텐트생활 하면서 또 매를 맞습니다. 야외 나왔기 때문에 긴장이 풀어질 까봐 또 매를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훈련을 끝나고 부대 들어오면 밖에서 해이해진 그 정신상태, 군기를 다시 잡기 위해서 또한번 매를 맞습니다. 어떤 행사가 있으면 3차례는 매를 맞아야 합니다. 요즘 자녀들이 매를 맞는다고 그러면 부모들은 펄펄 뛰겠지만 사실 견딜만 합니다.

그리고 유격 할 때 계곡과 계곡 사이에 밧줄을 매어놓고, 처음에는 3줄타기, 밑에 한 줄, 뒤에 두줄해서 발로 한 줄을 딛고, 양 손에 한 줄을 잡고, 수백미터 계곡, 밑에서는 막 쪼그려 뛰기 훈련을 하고 있는데, 개미새끼만큼 작게 보이는 세 줄을 타고 휘청거리면서 한 2- 300미터를 건너갑니다. 아찔한 일이지요?

세줄이니까 그래도 의지가 됩니다만 그거 통과하면 그 다음에는 발 하고 위에 손하나 잡고, 그리고 철모와 모든 총을 다 메고서 완전군장한 상태로 건너갑니다. 그게 끝나고 나면 외줄타기입니다. 그 줄 하나에 엎드려서 가는데 여러분 상상을 해 보십시오. 철모를 쓰고 완전
군장을 하고 그 줄 하나에 수백미터 계곡을 그 배 안에 줄을 메고 가고서 가능하겠습니까?

저같이 둔한 사람도 성공을 했어요. 밑에서 보면 불가능 할 것 같은데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일을 하기 전에 꼭 하는 일이 하나 있어요. 그 PT체조라고 하는 체조가 있어요. 피가 튀도록 하는 체조라고 해서 PT체조입니다.

그냥 체조하는 건데 얼마나 체조를 수십번 수백번 시키는지 팔다리가 저릴 정도로 시킵니다. 그 앞 쪽에서는 지금 세줄타기, 두줄타기,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지금 이거 끝날 때까지 쉬고 기다리는게 아니라 PT체조를 피가나게 시킵니다.

저기 계시는 김효구 권사님은 조교출신이기 때문에 지금 쓱 하고 웃고 계시는데 그리고 그 자리에 가면 놀랍게도 그 일이 잘 이루어지고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피가 나게 PT체조를 시킵니까? 항의성으로 물어보면 사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결국은 너희들을 위해서 그러는거야.

정신을 집중하고, 딴 생각하지 않고, 오직 훈련에만 몰두하기 위해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훈련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체조를 하면서 전심전력하면 그 부대는 훈련을 해도, 한 사람도 사고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좋게, 좀 편하게 해 주느라고 사회 있을 때 얘기 해주고, 이런저런 웃기는 얘기 해 주고, 장난치고, 아 우리 순서 왔네? 하면서 훈련을 하면 반드시 몇 명이 떨어져요. 사고가 생기는 거예요.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생각을 조금 해 봤습니다. 우리가 나태함이라고 하는 것, 우리가 더워지기 때문에 나태함이 생깁니다. 복장을 해도 그 티셔츠 같은 거 입을 때보다는 남방을 입었을 때가 조금더 내 몸가짐이 다듬어지고, 남방을 입었을 때보다는 와이셔츠하고 타이를 맬 때가 훨씬 더 몸이 다듬어지고, 더 내 자신이 절제가 되는 것이 느껴집니다. 슬리퍼를 신을 때와 운동화를 신을 때와 구두를 신을 때 더 내 자신이 달라질 때가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편한 복장, 여유로운 복장을 하는 이 여름은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 나태해지고, 느슨해지기 쉽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동안 사무엘하 1장에서 10장을 통해서 다윗의 전성기에 멋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1장에서 5장은 다윗의 정치적인 전성기를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유다에서의 승리,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가 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까지 다윗을 왕으로 추대해서 결국 다윗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남북의 통일된 왕국의 왕으로써의 영광을 얻습니다. 정치적으로 이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성공한 왕이었습니다.

6장에서 7장은 다윗의 영적 전성기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잘 못된 사람들에 의해서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에 빼앗겼던 그 치욕적인 상황을 다시금 여호와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마음을 가졌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준비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되느냐 하는 데에서 잘못된 그들은 큰 실수를 경험했고, 다시금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여호와의 궤를 운반하는 일에 대해서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모든 사람들이 뒤를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듯이 여호와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영적인 전성기가 여호와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그의 신앙이 절정이 되었습니다. 8장에서 10장은 다윗의 군사적 전성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편에 있는 모압과 암몬과 에돔, 좌편에 있는 블레셋, 북쪽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을 차라리 정복해 가면서 어느 나라도 다윗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8장 14절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 이기게 하시니라. 다윗이 이겼던 비결에는 여호와가 계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정치적으로 승리하든, 그가 영적으로 승리하든, 군사적으로 승리하든, 그의 승리의 배경에는 여호와가 계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다윗의 전성기에 그것을 설명해 주는 결론적인 말이 바로 8장 14절입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오늘 11장 1절에 보니까 해가 돌아와서 쉽게 말하면 다음 해가 와서 그런 말입니다. 히브리 달력으로는 1월입니다. 새로운 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태양력을 보면 히브리의 1월은 3- 4월 봄에 해당합니다.

해가 돌아와서 왕들에 출전할 때가 되었다는 말은 지금 10장에서 암몬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도전했는데 이스라엘의 선의로 베푼 사신들을 악의적으로 해석해서 그 사신들에게 모욕을 해서 보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서 다윗이 분노할 것을 알고서 군대를 모집하는데, 자기 군대로 부족하니까 아람 사람들도 동원하고, 돕사람까지 동원해서 용병을 3만 3천명이나 모집했다고 그랬습니다.

1차적인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목숨을 걸고, 내가 이긴다면 네가, 네가 부족하다면 내가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 담대하라.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우리가 행동하자. 그리고 나서 전쟁에 나갔지만 이 전쟁이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임을 그들은 서로 다짐을 했습니다.

장군끼리 그런 다짐을 볼 때에 지도자가 그런 신앙의 고백을 한 것을 볼 때에 이제는 이미 이긴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우기가 다녀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을과 겨울이라고 하는 것은 우기입니다. 이른비와 늦은비가 오는 때입니다. 그 때는 모든 나라들이 전쟁을 쉬고, 자기의 생업에 돌아갈 때 그리고 3,4월 건기가 시작되면서 다시 전쟁을 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휴전을 했던, 전쟁이 소강상태였던, 그 이스라엘과 암몬의 전쟁이 다시 봄이 되면서 전쟁이 재개되는 상황이 왔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 해가 되었습니다. 전쟁에 나갈 때가 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은 우리가 그렇게 이해를 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니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다윗임금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군대를 전쟁에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1절 마지막에 보니까 다윗왕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지금 왕들의 전쟁입니다. 과거의 전쟁은 우리 중국이나 한반도의 전쟁도 그랬지만, 전쟁은 수만, 수십만의 군대가 진을 칠 지라도 사실상 전쟁은 왕이나 장수에 의해서 전쟁은 결판이 났습니다. 엘라골짜기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가 진을 쳤을 때에도 수만의 군사가 진을 쳤지만 사실상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이스라엘을 대표했던 다윗과의 한 번의 싸움에서 결판이 났어요.

골리앗이 쓰러지자 블레셋 군사는 그냥 다 도망쳐 버리고 나왔어요. 그것이 중동지역이나 이 중국, 아시아 지역의 전투의 하나의 유형이었습니다. 왕들이 출전한다고 하는 것은 왕이 중심이 되어서 한 나라의 운명이 걸린 그 전쟁의 왕이 중심이 되어서 전심전력을 다해서 전쟁에 임한다고 하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할 전쟁에 이상하게도 왕은 빠졌습니다. 왕은 예루살렘에 그래도 있습니다. 저는 1절을 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야 할 때 최선을 다하지 않는 지도자의 모습, 여러분 가끔씩 어린이 유치원 수련회, 어린이집 수련회, 중고등부 수련회 나가다가 죽거나 다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리고 신문방송에서 그 방송이 나고 사건사고를 수사하면서 꼭 나중에 나오는 문제가 뭡니까?

학생들과 같이 있어야 할 교사들이 딴 곳에 가서 술 먹다가 아이들이 불장난 하다가 불이 났다. 교사들이 따로 술먹고 자기네들끼리 있다가 애들끼리 수영하다가 죽었다. 언제나 결론은 지도자가 자기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여름철 우리 어린이, 중고등부, 청년부, 바다로 산으로 가지만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긴장하는 시간입니다. 지금은 각 교회마다 어린이교회, 꿈지기교회, 젊은이교회, 교역자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동행을 하지 않지만 사실 저는 솔직한 마음으로 가시방석이예요.

저는 8월 한달은 죽은 목숨입니다. 행사가 다 끝날 때까지 교회 홈페이지 팝업창에다가 8우러 한달 내내 행사를 올리면서 저는 기도했습니다. 8월 2일부터 시작되는 수련회, 8월 마지막까지 끝나야 할 교회 선교여행, 그것이 끝날 때에 저는 손들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행사 하나하나가 학생들에게는 영적인 재충전이요, 학생들에게는 산으로, 들로, 바다로,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었지만 더없이 기도해야 할 긴장의 시간이고, 두려움의 시간입니다. 교회차가 나가면 아버님은 밤 12시가 넘어도 주무시지 않고, 교회 앞을 서성거립니다. 주무시지요. 아직 차가 안 들어왔어.

차를 가지고 나간 사람은 벌써 3- 4시면 돌아올 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벌써 그 때는 해가 중천에 훤하니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이것저것 한 가지 두 가지 더 하다가 떠날 만한 시간이 되서 떠나면 사실 여기 오면 12시가 넘지요.

지도자들은 도착할 시간을 예상하고, 출발을 재촉하지만 지도자가 아닌 사람은 출발의 시간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관점의 차이가 큰 것입니다. 차가 돌아왔을 때 감사하면서 잠자리에 들 수 있습니다. 출발할 때 전화합니다. 몇 명이 출발합니다. 기도해 주세요. 중간 쯤 가서 휴게소에서 지금 어느 휴게소에서 우리가 휴식하고 있습니다. 몇 명이 잘 도착했습니다.

출발하면서 이제 몇 명이 몇 시에 출발합니다. 중간에 지금 어느 휴게소에 가서 쉬고 있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줘도 지도자는 얼마나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되는지 모릅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목회하면서 가장 힘든 기간이 여름입니다. 많은 행사를 치루어야 하지만 그것이 꼭 필요하고, 그것이 반드시 교회의 각 부서에 재충전과 부흥의 기회지만 한 편으로 갑절이나 기도해야 할 깨어있어야 할 시기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1절에 보니까 국가의 운명을 걸고 싸워야 할, 더구나 왕들이 출전을 해야 할 그 시기에 그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왕궁에 그대로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2절부터 문제가 터지기 시작을 했어요.

저녁때입니다. 다윗이 침상에 일어나 왕궁지방에서 거닐다가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20대 여인이 목욕 하는데 아름답지 않으면 이상한게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20대 여인이 그걸 보면 이상한 게 아니예요?

어떤 사람은 그래요. 이 여자가 이 야밤에 목욕을 하고 난리야. 좀 심한 욕도 합디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시간 여자가 목욕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또 다윗왕이 그 백성들의 삶을 바라다보는 것 그 날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조금 그 당시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야 할 필요가 있어요. 자, 머리 속에 한 번 그려보세요. 이스라엘 다윗성, 예루살렘성은 암반으로 되어진 그런 성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성은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습니다.

자, 이 쪽 앞에는 감람산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나무들도 자라는 산이지만 이 건너편 기드온 골짜기를 건너오는 시온산은 돌산이기 때문에 나무가 없습니다. 이 다윗성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성은 길이가 한 4㎞정도 되는 그리 크지 않은 성입니다.

하지만 암반으로 되어 있는 주변의 성을 쌓았기 때문에 그 성을 넘어오리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난공불략의 천연적인 요새입니다. 그 계곡 기드온 계곡에서 나오는 물을 길어서 먹고, 히스기야임금은 그 터널에서 지하로 깊이 터널을 뚫어서 저쪽 샘물을 성안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니까 성 안의 물을 받아야 할 지역이 낮게끔 깊이 터널을 뚫어서 성 안으로 흘러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것이 소위 히스기야 터널이라고 말합니다.

실로암이라고 하는 성 안의 못은 그 물이 흘러 들어오는 곳이 실로암 연못입니다. 그 성에서 감람산에서 바라보면 예루살렘성 왼 쪽에 다윗궁이 있습니다. 왕궁은 그 자리에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었고, 그 왕궁 밑에 신하들과 백성들이 사는 집들이 계곡 밑으로 쭈욱 펼쳐져 있습니다. 평지에 도시가 건설되어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왕궁에서 내려다보면 그 밑에 신하들 집부터 시작을 해서 백성들의 집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요즘 같으면 아파트를 선호합니다. 아파트가 서로 마주보는 아파트가 맞아서 낮에는 괜찮은데 밤에 불을 키면 방안에서 돌아 보이는 게 다 보이지요. 더우니까 그냥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니지요. 그런 것이 다 보입니다.

부부끼리, 가족끼리 있으면 뭐, 반바지만 입어도 별 문제가 없을 거예요. 문제는 다른 집에서 보인다는 문제가 있어요. 어떤 집에서는 망원경이 들여다 보입니다. 망원경으로 보일게 뭐가 있어요?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거예요.

저희 부친댁이 13층인데, 13층에서 이쪽 아파트를 보면 그냥 저녁에는 볼 만 해요. 아예 안 쳐다 보는 거지, 그냥 쳐다보면 구경거리가 많지요. 그렇다고 해서 커튼을 쳐놓고 사는 것도 그것도 답답한 일이니까 커텐 다 열어놓고 사는 거예요.

다윗이 다윗임금께서 그 높은 왕궁에서 그 아래를 쳐다 보는 것이 그 날만 본 게 아니예요. 늘 보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임금은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고, 거기에 수도를 건설하고 나서 자기 백성들이 평안히 복을 누리면서 사는 그 모습을 그 위에서 보면 얼마나 행복해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4층 옥상에서 올라가면 역곡 전체가 다 보이지요. 가끔씩 어떤 비전을 어떤 꿈을 꾸는 일에 4층에 올라가서 그냥 저 서재에서 꽉 막힌 곳에서 생각한 것보다는 옥상에 올라가서 역곡시내를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에 잠기면 훨씬 좋은지 모릅니다. 저기는 한참 건축중이구나. 저기는 지금 아파트가 완공이 되었고, 저기도 우리가 전도할 것이고, 저기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고, 다 보이는 것이 목회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고, 전도의 대상입니다. 그러면서 꿈을 키우는 것입니다. 역곡이 참 컸구나. 예전엔 참 빈약했는데, 이번엔 역곡이 참 도시다운 면모를 갖췄구나.

왕의 입장에서 높은 왕궁에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바라볼 때 왕은 참으로 행복하고, 좋았을 것입니다. 지난 1장부터 10장까지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군사적으로 다윗의 전성기에 있을 때에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영적으로 이기게 하셨고, 정치적으로 이기게 하셨을 것입니다.

다윗의 마인드는 헤세드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하는 것은 은혜, 축복, 은총, 그런 의미입니다. 다윗은 모든 안목이 하나님이 주시는 안목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헤세드라는 안목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보았을 때 그저 사랑스러웠고, 그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2절 이후에 다윗의 안목은 헤세드의 안목이 아니라 에로스의 안목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에로스가 무언가요? 이성간의 사랑이잖아요. 흔히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 멋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랑이 부부간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죽기를 작정하고 서로 사랑하지만 40년- 50년을 한 집에서 살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단서가 있지요. 당신이 나만 사랑할 경우에 나도 사랑한다. 그것이 깨지면 철천지 원수가 되지요. 조건이 있습니다. 나만 사랑할 경우 그래서 끊임없이 확인을 하잖아요. 당신 나 사랑하고 있는거야? 당신 한 눈 팔고 있지 않지?

그 고백이 유효한 한 부부가 사는 것입니다. 그 때의 부부의 사랑은 아름답지만 그 단서가 깨지면 정말 피튀기는 거지요. 에로스는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기본이 되어있는 사랑입니다.

헤세드라는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헤세드라는 안목으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다윗이었을 때에는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에로스의 안목을 가지고 왕궁에서 바라다 보니까 안목이 달라요.

3절에 보니까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다. 알아볼게 뭐가 있어요? 자신의 백성들 목욕하고, 2-30대 여인들이 아름다운 것은 당연한 거지 그걸 왜 알아봐요? 이미 그는 출발에서 빗나가고 있었어요. 예루살렘에 남아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저는 무언가 개연치 않다고 했는데 그가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나가 싸워야 할 사명의 자리에 있지 않고 혼자 왕궁에 남아있다고 하는 것이 뭔가 수상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의 마인드는 바뀌어 있었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니까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조금 대답이 삐딱합니다. 당신이 알아서 뭐 할려고 그래요?

그런데 다윗은 한 걸음 다 나아갑니다. 가서 사람을 보내어 데려와라. 왕의 명령이니까 거역은 못하고 데려왔어요. 4절에 보니까 저가 저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부분이 해석이 잘 안 되지요? 굉장히 해석이 어려운 부분인데, NIV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해 놓고 있습니다. 저가 월경후 몸을 깨끗하게 하였다. 구약성경은 여성이 월경을 할 때에는 성생활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절대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월경후 목욕하고 몸이 깨끗게 되었으면 이제 그렇게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개인적인 생활에서 한 삶의 주기에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지금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윗과 아무 생각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가 우리아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불구하고 사람을 보내서 자기의 권력의 힘으로 그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시간이 지난 후에 여인이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많은 시간이 흐릅니다. 사실 다윗은 한번의 헤프닝으로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잉태하였나이다. 하는 전갈을 들으면서 다윗은 조금 복잡해 졌어요.

생각해 낸 것이 자연스럽게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자기의 충성스런 장수인 우리아를 데려오게 했습니다. 갑자기 전쟁에서 자기를 데려오니까 왕이 나에게 급한 용무가 있나보다 하고 전쟁 중에 있던 우리아는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야. 뭐 그냥 전쟁에서 수고하니까 그냥 하룻밤 쉬고 가라고’

다음 날 왕이 물어보니까 우리아는 자기의 심복들과 왕의 문에서 잠을 잤다고 그랬습니다. 왕의 문에서 잤다고 하는 얘기는 그냥 문에서 잤다는 것이 아니라 왕궁의 한 모퉁이에서 편하지 않은 잠자리를 왕의 신하들, 군사들과 함께 잤다는 이야기입니다.

집이 멀어서 그런게 아니예요. 집이 저 부산쯤 되니까 거기까지 다녀오려면 귀찮고 그러니까 여기서 그냥 눈이나 붙이지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아의 집은 다윗왕궁의 바로 밑에 있어요. 아주 가깝습니다. 하지만 내가 내 부하들이 목숨 걸고 전쟁터에서 전쟁 중인데 지도자인 내가 어떻게 편하게 집에 가서 자겠습니까? 여기서 그냥 왕이 부르셨으니 잠깐 눈 좀 붙이고 새벽에 떠나겠습니다.

얼마나 충성스럽고 성실한 모습입니까? 왕이 전갈을 들으니까 왕궁에서 눈을 붙였다는 얘기를 듣고 두 번째 불렀습니다. 술을 잔뜩 먹였어요. 야, 하룻밤 더 자고 가. 술에 취했으면 집에 가서 잘 줄 알았는데, 그 다음날도 소식을 들어보니까 여전히 자기의 부하들과 왕궁의 한 모퉁이에서 눈을 붙였다는 거예요.

다윗이 생각했던 평범한 방법은 이제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밀서를 써서 그 우리아의 손에 들려서 사령관 요압장군에게 보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아주 무지막지한 밀서였습니다. 맹렬한 싸움에 선봉에 세웠다가 우리야만 남기고 후퇴하여 저로 맞아 죽게 하라. 대단하지요? 여러분 다윗이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아주 큰 도전을 드리기로 원해요. 한 번 따라해 보기를 원해요. 나도 변할 수 있다. 세상 그렇게 틀림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하루 아침에 딴 사람이 됩디다. 저는 목회하면서 많이 겪었어요. 목사의 오른팔처럼 행동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딴 사람이 됩니다.

다윗은 지금 우리가 1장에서 10장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다윗의 모습을 당신의 충성스런 부하, 왕궁에 와서 왕의 명령을 받고, 집에서 자라고 하는 배려, 지금 자기는 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하지만 자기는 부하들을 생각해서 어떻게 내가 집에서 잘 수 있습니까? 그냥 새우잠을 자고 가겠다는 그 충성스런 부하, 그 손에 밀서를 들려서 이 사람 전방에 앞세웠다가 군대를 빼서 적군들에게 맞아죽게 해라. 요압사령관이 그 소식을 들었어요. 요압장군도 왕의 명령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결국 우리아는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전쟁에서 죽고 나서 아내인 밧세바에게 연락이 왔겠지요? 당신의 남편이 전쟁 중에 전사했습니다. 당신의 남편은 훌륭한 군인이였고, 남편의 충성심은 모든 군인들의 귀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 남편의 충성심과 당신 남편의 헌신은 이 나라에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아마 훈장도 주고, 상금도 주고, 연금도 주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프리카 북부 사하라지역에 용맹을 떨치던 놈멜이라고 하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받을 만큼 사막전쟁에서 아주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나치정권의 영토를 아프리카까지 확장을 시켰습니다. 온 독일국민들이 놈멜을 최고로 여기었습니다. 전세계가 경악을 했습니다. 놈멜을 대항한 사람이 없구나.

어느 날 히틀러가 공군사령관 괴링장군을 불렀습니다. 놈멜을 귀국시키도록 해라. 놈멜이 돌아오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라. 스스로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던지, 아니면 비참하게 죽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라. 괴링 장군이 놈멜 장군을 만났습니다. 당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조용히 약을 먹고 죽으면 당신 아내와 자녀들에게는 연금이 주어질 것이고, 당신은 나라에서 귀감이 되는 장군으로 그렇게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비참하게 죽을 것입니다.

놈멜 장군은 고민했습니다. 히틀러가 죽은 독약을 먹고 15분 만에 몸이 뒤틀려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 아내에게, 그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남편 독일을 위해서 아프리카까지도 맹위를 떨쳤던 세계전사에 다시 한 번 나올 수 없는 용맹한 장군이였고, 이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모든 군인들의 귀감이었고, 당신 남편보다 뛰어난 군인은 이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남편의 헌신에 존경과 경의를 보냅니다. 당신의 남편이 몸이 불편해서 질병으로 죽었지만 당신의 가족들에게는 연금과 국가가 내리는 최고의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히틀러와 괴링 장군에게만 속삭였던 비밀을 제가 지금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이 요압장군에게만 내렸던 비밀을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에 비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둘이서 우리끼리만 알자고 해도 결국은 그 말까지도 보태가지고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비밀을 가진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가능한 여러분 생애에서 비밀을 가지기 마세요.

비밀을 많이 가지는 생활일수록 건강한 생활이 되지 않습니다. 시편 11편 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어떤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느끼셨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다윗은 주인공이지만 다윗과 관계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밧세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그리고 밧세바의 남편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 그리고 왕의 친서를 받아서 자기의 충성스러운 부하이며 동료였던 우리아장군을 최전방에 보냈다가 죽게 하도록 명령을 받은 사령관 요압장군, 지금 밧세바를 데려오라고 그 심부름을 받았던 그 신하들, 그 수많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밧세바조차도 딱 한마디 아이를 가지고 나서 전갈을 보내기를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그 한마디 외에는 가타부타 어떤 얘기도 없고, 지금 왕이 사랑하는 부하를 죽이라는 치명적인 밀서를 받은 요압장군도 이 명령이 옳은건지, 그른건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어쩌면 눈치를 채고 지금 왕이 전쟁 중에 나를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 혹시 하고 우리야가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 이야기를 비약해 보면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는지, 다윗왕이 밧세바를 불러들였을 때 밧세바가 왕과의 관계를 영광으로 여겼는지, 남편 우리야가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왕의 궁에서 칼잠을 잔 것이 왕에 대한 무언의 반발이었는지 어떤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11장은 사무엘하를 기록한 이 저자에게 있어서 극도로 말을 아끼는 있는 고도의 성경을 기록하고 있는 테크닉입니다. 등장인물의 감정을 극도로 아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여러 가지 방법들, 이 방법으로, 더 큰 방법으로 그렇지요? 더 큰 거짓말 하고, 그 거짓말을 덮으려면 두 번 거짓말 해야 하고, 그거 덮으려면 네 번 해야지요? 그래서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는거 아닙니까?

여러분 살다가도 신앙생활이나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죠? 잘못된 거 그냥 제가 잘 못됐습니다. 한 마디 하면 책망 한 마디 듣고 넘어갈 일인데 그걸 갖은 변명을 붙여서 다음번에 그 문제가 드러나면 더 큰 거짓말을 해야지요. 자기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렵다는 버거움을 느끼지만 어떻게 해요? 이미 엎어진 물인데, 계속 가야지요.

그러면 신앙도 떠나게 되고, 사회생활도 멀어지게 되고, 회개는 용기가 필요한 줄 믿습니다. 가장 신앙에 있어서 첫 번째 요구 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첫 번째 결단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베드로가 그랬고, 이사야가 그랬고, 사도요한이 그랬고, 사도바울이 그랬고,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첫 번째 고백은 주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그거 한 마디 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자기가 잘 못했다고 한 마디 하면 그냥 모든 게 눈 녹듯 해결되는데, 그거 안 하려고 넘어가려고 하다 보니까 복잡하지요. 힘든 것입니다. 다윗 온갖 머리를 다 동원해 보았지만 사랑하는 부하까지 죽여가면서 그 한 사람만 죽였겠습니까?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의 측근에 있는 그 사랑스러운 부하들도 수십명은 죽였어야 보이기가 좋은 거지요. 모양새를 갖춘 거니까 얼마나 끔찍한 일이예요.

다윗이 저질러 버렸어요. 헤세드라고 하는 은총의 분위기 속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에는 모든 것이 보기가 좋았는데 육신의 정욕의 눈을 가지고 보니까 그에게는 백성들도 신하의 아내도 정욕의 대상으로 보인 거예요.

그 날 따라 다윗이 이상해 진 게 아니라 문제는 다윗의 영적인 나태함, 그가 승리하고 그가 모든 것에서 형통한 것을 얻으면서 그의 모든 것의 나태함, 그로 하여금 은혜의 자리에서 정욕의 자리로 바꾸어 가게 만든 것입니다.

27절에 성경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무엘하 저자는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다윗의 행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아무리 인간이 재주를 피워도 인간이 그것을 감추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는데 우리가 한 가지 잘 못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면 넘어갈 것 같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의 충고 뿐만 아니라 11장 마지막 27절에 가기 전에는 우리 하나님조차도 한 마디도 안 하고 있어요.

하나님조차 침묵을 지키고 있어요. 이 때가 그 때라. 마음껏 죄짓고, 마음껏 제멋대로 하지만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고 계신 그 때가 가장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가 작정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그 때가 최고라는 사실을 기도생활을 많이 하신 분은 알고 있습니다. 아, 지금 하나님이 예의 주시하시고 계시구나. 11장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행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주시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신이 났습니다. 자기의 측근들도, 자기의 주변 사람들도, 심지어는 우리아도 우리아의 아내조차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잘못하느냐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결론을 내셨습니다. 너의 행위가 악하였더라.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정욕은 보내다, 데려오다, 동침하다, 그런 동사들도 가득차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다윗이 지금 어쩌다가 잠깐 한 눈을 판 것이 아니라 다윗의 상태가 아주 영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짓되 적극적으로 지으라는 거예요. 어쩌다가 실수 해서 짓는 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짓는 거예요.

영등포 앞을 지나가다 보면 제가 고등학교 때만 해도 그 역전 주변은 다니기가 어려웠어요. 그냥 오라고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어요. 고등학생이어서 ‘고등학생이예요.’ 그러면 ‘고등학생도 괜찮아.’그러고 막 떠밀어요. 골목에 한 두세사람이 떠미는데 거기에 밀려 가기만 하면 골목만 들어가면 그걸로 끝이예요.

그래서 거기에 꼭 가야 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리 친구가 문래동에 살았는데 거기까지 갈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야지, 조금만 1%라도 혹시 한 번 경험한 번 해 볼까하는 생각이 1%만 있어도 밀 때 ‘아유, 왜 이래요?’ 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고등학생 친구들 중에도 본의 아닌지, 본인지 다녀온 사람들이 퍽 있었어요.

여러분, 우리의 영적 나태함 이 여름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적절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담임목사인 저를 비롯해서 평안의 모든 성도들 더욱더 영적으로 깨어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다윗이었지만 때로는 그렇게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사람으로 변질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그리고 아까 고백한 것처럼 나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기억하고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이 여름에 이 모든 우리의 삶에 영적 나태함에 이끌려 하는 사탄의 유혹에서 말씀으로 기도로 깨어 주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때때로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해 지며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일들을 우리가 형통한 일이라며 우리가 행하는 어리석음을 우리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때때로 다윗조차도 그러한 실수와 범죄를 행하면서 그는 형통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침묵하시고, 침묵하시면서도 주님은 예의주시하여 그의 삶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너의 행위가 악하구나. 고마우신 하나님, 이 여름에 우리를 강건하게 하옵소서. 이 여름에 영적으로 더욱 무장하게 하시고 더욱 우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한 사람도 영적 나태함으로 인하여 사탄의 유혹에 넘어지는 자가 없도록 주님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 요 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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