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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계 2:10,고전 15:31,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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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몇 주 동안 항상 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생각과 이중표 목사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저에게 깊은 감동과 눈물을 자아내게 한 것도 손양원 목사님에 대한 생각과 이중표 목사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나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항상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정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 한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생각과 맞는 대답을 한 사람에게 작은 상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 바로 살고 바로 죽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아침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중표 목사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아주 간단 간단하게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너무 사모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강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2003년 3월9일 주일날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 설교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합니다.
  첫째, 손양원 목사님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믿음의 유산을 아버지 손종일씨로부터 물려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따라 새벽 기도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힘썼습니다. 동방요배 거부는 물론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날 학교에 가는 것을 거부하므로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 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산 기도와 노방전도에 열심이었습니다.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하면서 주기철 목사님을 만나 그에게서 순교신앙을 배웠습니다. 1939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손양원 전도사는 경상도 사람으로서 전라도 여수에 있는 나병원 교회인 애양원 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로 1940년 일경에 체포되어 여수 광주 경성 청주 구치소 등에서 8. 15 해방까지 5년 간의 옥고를 치루며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주님을 향한 일편 단심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해방 후 석방되어 애양원 교회로 돌아왔으나 5년 후인 1950년 9월 28일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군들에게 끌려가며 갖은 고초를 당하다가 총살을 당하므로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죽도록 충성하며 믿음을 지킨, 믿음의 사람으로 살다가 믿음의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둘째,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나환자 사랑과 원수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손양원 전도사는 1945년 8월 해방 후 다시 애양원 교회로 돌아와 그의 남은 생애를 애양원 나환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부었습니다. 한 번은 박옥선이란 여 환자가 발 밑에 난 종기 때문에 다리를 절단해야 할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1946년 안수) 입으로 악취 나는 피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나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아버지는 분명 우리 남매의 아버지인데 내가 볼 땐 나환자들의 아버지인 것만 같아 보였다." 그의 사랑의 극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 나타나 보였습니다. 사랑하던 믿음의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을(강철민은 가명) 용서하고 그를 사랑으로 품은 것이었습니다. 안재선을 취조하던 군인은 용서를 호소하는 손 목사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울음으로 전하는 딸 동희양으로부터 전해 듣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닦으며 ‘위대하시다’ 라고 감탄의 소리를 토해냈다고 합니다.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진 장면이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선교사들이 1950년 7월 경 손 목사님과 가족이 피난을 갈 수 있도록 배 한 척을 마련했습니다. 손 목사님의 짐을 다 실었습니다. 부흥 집회에서 돌아온 손 목사님은 그 사실을 알고 자기는 피난을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는 마지막까지 애양원의 나환자들과 함께 남아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배에 올라 피난을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자기들도 다 손 목사님과 함께 애양원에 남아 있겠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짐을 다시 내려 놓았습니다. 손 목사님은 마지막까지 나환자들을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죽은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셋째, 손양원 목사님은 소망으로 살다가 소망으로 죽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천국과 종말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천국과 내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고난을 선생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손 목사님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와 고초를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그리고 사모하던 천국으로 갔습니다. 나는 최근 손양원 목사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나도 손양원 목사님처럼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살다가 죽을 수는 없을까?” 하는 절박한 영혼의 소원과 갈망을 품게 됩니다.

  그 다음, 이중표 목사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지난 주일 저녁 분당에 있는 한신교회에 가서 추모예배의 설교를 하면서 이중표 목사님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설교를 했는데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악합니다.

  첫째, 이중표 목사님은 착한 사람으로 살다가 착한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착한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이중표 목사님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의 원형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목사라고 다 착한 사람은 아닙니다. 함께 있으면 불편한 목사님들도 있고 함께 있으면 재미가 없는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중표 목사님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편안하고 재미있고 좋고 행복했습니다.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 살고 나서 깨달은 것인데, 제일 좋은 사람은 미남 미녀도 아니고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이나 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 착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작년 10월 18일 이 목사님에게 이런 편지를 쓴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전화로 인사를 나누며 목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아이들처럼 반가워 하며 좋아했습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빵 한 조각을 서로 나누면서도 정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 목사님과 단 둘이서 울창한 산속 길을 걸으며 쓰레기를 줍고 마음과 말을 주고 받았을 때 우리는 연인 같은 느낌마저 가졌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욕심이 없는 착한 사람으로 살다가 착한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둘째, 이중표 목사님은 약한 사람으로 살다가 약한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약한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이중표 목사님은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약한 사람의 원형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셨고 머리 둘 곳이 없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라고 다 약한 사람은 아닙니다. 너무 강해서 함께 있기가 불편한 목사님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중표 목사님과 함께 있으면 부담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약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모든 것을 버리고 약해졌던 것처럼 이중표 목사님도 모든 것을 버리고 약해졌습니다. 소유는 물론 건강도 권위도 명예심도 영광도 다 버리고 약해지셨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병상에서 쓴 글 중의 한 구절을 다시 인용합니다. “밤이 지나고 드디어 하늘로부터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빛이 내리고 ‘축제를 못 박아라. 영광을 못 박아라’는 음성이 우레처럼 들렸다. 그리고 사탄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그날 밤 다시 살아났다.” 이중표 목사님은 우리 범인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깊은 경지의 버림과 약함에 도달했습니다. 강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 이중표 목사님은 주님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약한 사람으로 살다가 약한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셋째, 이중표 목사님은 눈물의 사람으로 살다가 눈물의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눈물의 사람들이었던 것처럼 이중표 목사님은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눈물의 사람의 원형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눈물을 많이 흘린 눈물의 사람이었고 눈물을 많이 흘리게 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의 버림과 무욕과 착함과 약함의 삶은 눈물을 자아내게 만드는 감동 자체였습니다. 저는 이중표 목사님을 바라볼 때 마냥 즐겁고 마냥 좋으면서도 가슴속에는 감동의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느끼곤 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 병상에 누워있는 이 목사님과 눈에 눈을 맞추고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라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고는 더 이상 기도의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가슴과 목에 가득 찾기 때문이었습니다. 목사라고 다 눈물을 흘리는 눈물의 사람은 아닙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그의 가슴과 마음과 생각과 말과 글에 눈물을 가득하게 담고 사신 눈물의 그릇이요 눈물의 화신이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이 쓴 「눈물을 먹은 마음」의 책 머리말의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내 가슴 속에 담아 주신 눈물이다. 내가 다시 또 받고 싶은 은혜가 있다면 주님이 울려주는 감동이요, 내가 주님께 드리고 싶은 보화가 있다면 내 마음의 눈물이다. 눈물은 진실을 담은 고백이다. 눈물은 양심의 이슬이다. 눈물은 사랑의 샘물이다. 이 눈물을 고스란히 주의 병에 담아 주님께 드리고 싶어 주님 만날 그 날을 사모하며 눈물을 흘리며 오늘도 산다." 이중표 목사님은 눈물이 메마른 삭막한 이 시대에 눈물의 사람으로 살다가 눈물의 사람으로 죽었습니다. “나도 이중표 목사님처럼 착함과 약함과 눈물을 지니고 살다가 죽을 수는 없을까?” 하는 간절한 영혼의 소원을 품게 됩니다. 저는 최근 손양원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을 가슴 속에 깊이 생각하면서 “나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수는 없을까?” 라는 절박한 영혼의 소원과 갈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강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두 강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두 강도는 참으로 세상을 잘못 살다가 잘못 죽었습니다. 강도 짓 하면서 세상을 살다가 강도 짓 한 죄 값으로 십자가 형틀에 달려서 죽게 되었으니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다가 얼마나 잘못된 죽음을 죽었습니까? 그런데 한 강도는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졌고 한 강도는 죽어서 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 손양원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설교를 하다가 왜 갑자기 한 강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까? 여러분들이 다 손양원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을 바라보고 사모하고 닮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소원하지만, 그래서 모두 천국에 가서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기를 소원하지만, 혹 그렇게 되지는 못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최소한 지옥에는 떨어지지 않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한 강도는 마지막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바로 살다가 바로 죽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한 사람일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라도 바로 살고 바로 죽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제가 영안교회를 담임할 때였습니다. 교회에 처음으로 나오던 김선희씨의 시아버님인 김호영씨가 병에 걸려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김호영씨는 예수님을 모르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몇 번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며 그 분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 후 임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고 강도처럼 예수님만 바라보라고 다그쳤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 분은 제 말을 따라서 그대로 했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고백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 분의 아들 김선희씨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나중에는 소망교회 남전도회의 임원까지 되었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죽기 전에 강도가 한 고백은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꼭 같은 형편에 처했던 한 강도는 그런 고백도 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강도가 어떻게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한 강도는 마지막에 가서 자기를 바로 바라보았습니다. 자기의 악한 행위와 자기의 악한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말 속에는 자기는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죄인 의식과 죄 고백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죄인 의식과 죄 고백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의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죄인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둘째, 한 강도는 마지막 가서 예수님을 바로 바라보았습니다. “가로되 예수여.” “예수여” 라고 부르짖은 한 마디 말 속에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려는 가냘프지만 처절한 믿음이 엿보였습니다. 지금까지 바라보고 의지하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려는 단순한 믿음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천국은 세상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굳게 닫힙니다. 천국은 “예수여” 라고 부르짖으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사람에게만 열립니다. 

  셋째,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가서 천국을 바로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당신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을 가리켰습니다. 어떻게 한 강도가 평생 세상을 바라보면서 돈과 재물에 붙잡혀서 살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을 바라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천국을 바라보았고 이중표 목사님도 천국을 바라보았고 한 강도도 마지막에 가서 였지만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한 강도는 비록 부끄러운 구원을 얻기는 했지만 그래도 구원을 얻기는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저는 손양원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을 생각하고 사모하면서 “나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을 수는 없을까?” 하는 간절한 소원을 품게 되었습니다. 우리 강변교회 성도들도 모두 그런 소원을 품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두 천국에 가서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을 받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나 혹시, 혹시 지금 여러분들이 잘못 살지라도, 신앙생활을 잘못 할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라도 최소한 한 강도처럼, 자신을 바로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로 바라보고, 천국을 바로 바라보면서, “예수여!” 라고 부르짖으므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저와 여러분들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 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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