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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롬 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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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재미있는 책 세권을 구입했다. 첫 번째의 책은 정신치료 전문가 쓴 “감사의 힘”이라는 책이다. 감사는 마치 전기와 같다. 전기는 단순히 어둠을 물리치는 데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용도에서 힘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감사한 마음, 감사한 생각이 막강한 에너지가 된다. 힘의 원천이 된다.

두 번째의 책은 하바드의과대학 교수가 쓴 “희망의 힘”이라는 책이다. 이 의사는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얻은 결과를 책으로 썼다. 병이 회복될 거라 스스로 믿는 환자들에게 실제로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희망이라는 감정, 희망의 생각이 갖는 치유력의 진정한 의미와 효능을 알게 된다.

세 번째의 책은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쓴 책인데 미국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교회의 젊은 담임목사이다. 40대 초반의 젊은 목사이다.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다. 긍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관점이 인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이다.

감사의 힘, 희망의 힘, 긍정의 힘. 이 세 권의 공통점이 있다면 책 제목에 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고, 우리의 생각과 연관된 말이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한 생각. 희망을 갖는 마음, 희망의 생각. 긍정하는 마음 긍정적인 생각. 감사하는 마음이 전기와 같이 단순히 불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이것은 희망도 마찬가지이고, 긍정적인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이같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모든 일의 시작은 작은 생각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있을 때에 뱀이 유혹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생각이 결국에는 선악과를 따 먹게 되었고,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부터 쫓겨나는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게 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다.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그 시작이 가룟 유다의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 승리의 삶, 축복된 삶을 살려면 먼저 생각의 축복부터 받아야 한다. 왜냐면 생각은 운명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결국 운명을 낳는다.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작은 생각에서부터 시작된다. 생각은 운명의 씨앗이다. 교만의 씨앗을 심어 놓았기에 선악과를 따 먹고 결국에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 것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내가 쉴 방이 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면 먹을 음식이 있는데 왜 내가 여기에서 주려 죽는가? 생각의 씨앗 때문에 아버지의 곁을 떠날 수도 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수도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생각의 축복을 받기 바란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생각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과 남을 미워하는 생각. 이러한 육신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사랑 희락 회평 오래 참음, 자비와 양선과 충성 온유와 절제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천사와 같은 생각도 있고 악마와 같은 생각도 있다. 살인자로 사형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천사와 같은 생각이 있고, 성자로 인정받은 사람에게도 악마와 같은 생각이 있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 종류의 생각이 있다. 즉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다. 바울은 솔찍하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속에 두 마음이 있음을 바울이 고백한다. 이 마음은 곧 우리 모두의 같은 마음이다.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은 마치 버섯과도 같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울 때에 먹어도 되는 버섯과 독버섯의 차이점을 배웠다. 대체로 독버섯은 보기에 예쁘게 생겼다. 아름답게 생겼다.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그러나 그 독버섯을 먹으면 죽는다. 먹어도 되는 버섯은 화려하지 않다. 아름답게 생기지도 않다. 그냥 그렇게 생겼다. 그것은 먹어도 된다.
대개 육신의 생각은 우리를 유혹하는 마력이 있다. 우리를 끌어 당기는 힘이 있다. 라스베가스에 가보라.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정말로 별난 세상이다. 멋진 조명으로 사람들을 끌어 당긴다. 그러나 투기하는 노름에 인생을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찾는 자가 많다. 문도 크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그 결과 죽음이다. 영의 생각은 문도 좁다. 힘이 든다. 사람들이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생명과 평안이다. 다음 말씀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이같이 육의 생각은 죽음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사람들끼리는 자기의 생각을 감출 수 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을 모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한 농부가 산속에서 거대한 곰을 만났다. 그는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이 곰의 마음을 순하게 변화시켜 주세요” 농부가 한참 기도를 하고 눈을 떴다. 그런데 곰도 마주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농부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된 것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빨리 기도응답을 하시다니….내 기도가 곰의 마음을 감동시켰구나.” 그때 곰이 기도를 마치고 농부를 그윽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기도를 했는지 전혀 모른다. 나는 다만 음식을 앞에 놓고 식사기도를 했을 뿐이다.” 농부는 곰의 속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모두가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이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모르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어떤가? 영의 생각을 할 때보다는 육신의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다. 하나님과 원수되는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는 생각을 할 때가 훨씬 더 많다. 내 자신의 육신의 생각 때문에 후회하고, 후회하고, 이제는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시간은 자꾸 흘러간다.
내가 스스로 결심한다고 육신의 생각에서부터 영의 생각으로 바뀔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가? 내가 결심한다고 육의 생각을 죽이고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천만에 말씀이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야 육의 생각을 제어할 수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 시대에 하나님을 믿고 사는 일이 얼마나 힘이든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때로는 사람을 속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세상이 주는 다양한 유혹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흔들릴 때도 많이 있을 것이다. 나의 의지로 내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어림도 없는 말이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목숨걸고 예수를 전한 사람이다. 순교한 사람이다. 예수에 완전히 미쳐서 살던 바울도 “누가 나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겠는가? 내가 결심한다고 육신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바꿀 수 있겠는가? 잠깐은 될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육신의 생각으로 치우치게 된다.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느니라.” 여기에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옵소서.”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옵소서.” “내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옵소서.”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진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지만, 주의 영이 내 속에 임하셔서 영의 생각을 하면 생명과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 얼마나 감사한가? 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인가?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자기 손자에게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싸움은 또한 나이 어린 손자의 마음속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추장은 궁금해 하는 손자에게 설명했다. “얘야,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이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 동정, 죄의식,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추장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우리 속에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날마다 내 속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우리는 영의 생각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합당한 환경을 만들자.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가? 왜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감사하는 생각을 하고, 희망의 생각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마치 내 속에서 싸우고 있는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속에 임하셔서 영의 생각으로 생명과 평안이 있게 하옵소서. (곽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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