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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밤이 깊을수록 아침은 빨리 옵니다.(고후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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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박진식씨가 쓴 책입니다. 그분은 2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다들 우량아라고 부러워할 만큼 건강한 유년 시절을 보내었답니다. 그런데 일곱 살 무렵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답니다. 아홉 살이 되자 주변의 사물을 붙잡지 않으면 일어나거나 앉거나 눕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답니다. 병명은 '부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라는 희귀병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도는 칼슘이 석회로 변해, 몸에 차곡차곡 쌓여 엉겨붙는 병이었습니다. 의사들은 20대를 넘기지 못한다고 했답니다. 몸은 점점 굳어져 갔고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죽어가는 육신을 보듬고 그 이해할 수 없는 절망에 울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흔적도 없이 죽어가기에는 너무 억울했다고 합니다. 마침내 자신의 이런 기막힌 인생을 기록하여,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기로 결심하였답니다. 그래서 손에 볼펜을 끼고 컴퓨터 키보드를 한 자씩 두드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절망과 불행 속에서 독학으로 영어와 한문을 공부하고 다방면의 독서와 시 습작에도 정성을 쏟았다고 합니다. 몸이 점점 돌로 변해가는 처절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30대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그의 저서를 통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이 얼마나 유해한지를 지적하며 제2편에서는 '절망은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진 독일의 위르겐 몰트만 박사는 "오늘날 인류를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은 그들이 절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이해에 있어서 절망은 가장 나쁜 죄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은 재앙을 부르는 가장 나쁜 죄"라고 지적합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웃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테는 그의 책「신곡」에서 지옥 입구에“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소망을 포기하라!”라고 붙여 놓았습니다. 절망하는 자는 이 땅에 살지만 지옥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지옥이란 절망이 영원화된 곳이며 꺼지지 않는 풀무불 속에 죽지못하는 버러지 같은 삶이 연속되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마음의 전염병은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말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소망을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힘(divine force)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살인자로 몰려 도망자 신세가 된 모세도 모든 권력과 부, 명예를 다 잃어 버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도망자 신세로 살았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욥도 자녀 모두를 사고로 잃어 버리고 가지고 있는 재산 하루 아침에 없어지고 아내까지 자신을 버리는 고통을 당하며 질병가운데 처절히 쓰러져 갔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도 애가 3장에 보면 엄청난 곤경에 처했지만 절망하지 않았고 다니엘도 다니엘 10장에 보면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은 환난을 당하였지만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한 분입니다. 한 때 바울은 살 소망이 끊어 질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환난이었습니다.

1)교회 내적 환난이 있었습니다. "환난"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매우 극심한 중압감' 눌리고 짓밟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고 바울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부의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일관성이 없다고 했습니다.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글은 잘 쓰는데 말이 서툴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가 서툴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바울은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참 마음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2)교회 외적 환난이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아시아에서 많은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만 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로 인한 고난을 경험해야 만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환난을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환난으로 인해
(1)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 힘에 지나도록이라는 말은 환난이 극심해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2)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나아가는 길을 완전히 잃은 상태를 말합니다.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3)마음에 사형선고를 당하였다고 했습니다(9). (4)큰 사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
한 마디로 절망가운데 처했다는 말입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환난 가운데 바울은 절망하며 인생을 포기했을까요? 우리가 절망적인 환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히려 소망 가운데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바울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통해 위로를 받으며 찬양하였습니다.
이 절망스러운 환경, 심각한 고통 가운데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여호와께 찬양을 합니다.(3)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2)왜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까?(3)
①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3) 십자가에서 그 험한 고난을 당하셨지만 부활함으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②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환난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③ 위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낙담한 상태에 있거나 환난 중에 있는 자를 격려하고 용기를 복돋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실제적으로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하나님의 위로는 어떤 위로입니까?(4-6)
①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위로입니다(4).
②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해 주시는 위로입니다(4).
③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으로 고난이 따르는 것처럼 필수적으로 따르는 위로입니다(5).
④ 고난을 견디게 하는 위로입니다(6).
⑤ 소망을 견고하게 하는 위로입니다(7)

2)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통해 위로를 받기 때문에 결코 절망하지 말고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10회나 사용하며 강조하고 있는 위로는 단순한 동정(sympathy)이 아닙니다. 어려움 당한 사람을 향해 마음 아파하는 것이 동정이라면 위로(comfort, “com 함께”“fort 힘”의 합성어)는 힘을 가진 사람이 돕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계셔서 걱정을 덜어 주고 후원을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사야 41장 10절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 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오늘도 말씀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위로자가 없다고 한탄하였습니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시 69:20)"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 4:1)"

왕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위로자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을 녹여 주고 어루만져 주고 같이 마음 아파해주고 번민을 풀어줄 진정한 위로자가 없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 딸 다 죽고, 재산 다 잃어 버리니까 아내까지도 욥을 버려 버립니다. 친구들이 고난당한 욥에게 왔지만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이러한즉 너희의 위로가 헛되지 아니하냐 너희의 대답은 거짓뿐이니라 (욥 21:34)"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진정한 위로자가 되십니다. 절망가운데 처한 실패한 모세를 위로합니다. 소망 없는 아브라함을 위로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두 번이라고 속이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와 위로해 주시고 용기를 주어 새롭게 세워주십니다.

절망 가운데 처한 사기꾼 야곱을 위로하여 세웁니다. 사기치고 도망가는 자 찾아 형벌을 내려도 시원치 않을 텐데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위로해 주시고 세워주십니다. 엘리야가 낙심하였을 때 위로하여 다시 사명을 줍니다. 모든 소망을 던져 버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며 도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다시 사명을 주어 시대를 변화시키는 주인공으로 사용하기 위해 위로해 주십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이사야 51장 12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자입니다(12) 황폐한 곳을 위로하십니다(사 51 : 3).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위로하십니다(사 66:11,13). 위로의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1) 광야가 에덴 같고, 사막이 여호와의 동산 같이 되고(사 51 ; 3), (2)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고(사 51 : 3, 52 : 9),(3) 두려워 안 하게 됩니다(사 51 : 12).

2. 하나님만이 참된 위로자임을 안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환난 가운데 하나님만 의지하며 소망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1) 바울은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1)하나님 만이 참된 위로자임을 안 바울은 왜 하나님께서 왜 이런 환난을 허락했다고 말씀합니까? 9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를 의뢰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의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절망 가운데 처하면 자꾸 사람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절망적 상황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훈련에 합격하려면 빨리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의지하고 의지하세 주 의지하세 ..." 아브라함, 한나, 모세, 다니엘 등 신앙의 위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2)이 사실을 안 바울은 어떤 고백을 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건지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과거와 현재의 죽음의 위험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미래의 구원에 대해 확고한 소망을 가집니다. 더욱 확신이 있게 합니다.

2) 우리도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환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때때로 황무지 같은 광야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건강으로 인하여, 경제적 궁핍으로 인하여, 풀수 없는 복잡한 인간관계로 인하여 황무지 같은 가정과 직장, 정치 현실 등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황무지라고 해서 항상 절망하고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황무지에도 오아시스는 있고 꽃들을 피울 수 있습니다.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요한 세바스챤 바하' 일 것입니다. 그는 황무지 같은 가정 환경 속에서 장미꽃같은 아름다운 음악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음악은 황무지에 핀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어릴 때 돌아가셨습니다. 형은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아내 마리아는 일곱 자녀를 남겨 놓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혼하여 11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두었지만 그 중 10명의 자녀가 어려서 죽었습니다. 그의 자녀 가운데는 정신 박약아가 있었습니다. 노년에 자신도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고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둘째 부인 안나 마크달레나가 1760년 2월 27일에 죽었을 때 장례 치를 형편이 못되어 장례식은 빈민구제를 위한 조치로 치러졌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황무지 같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처절한 환경 속에서 작곡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가지고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모든 음악의 유익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보내고 사람에게 즐거운 감정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고 음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정직하게 그리스도는 자신의 구주인 것을 고백하며 황무지 같은 자신의 인생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힘을 힘입어 장엄하고 경건한 음악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D.G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르간 연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N.J 즉 "예수 이름으로"라고 적어 놓았다고 합니다.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바하의 가문에는 약 200년 동안에 걸쳐 저명한 음악가 50여명이 나왔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모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와 같이 의지할 곳이라곤 아무데도 없었기에 어린 나이에 가구 공장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을 끝마치고 나서도 그를 따뜻하게 반겨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런던 거리를 이리저리 쏘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트는 한 교회에 무심코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모트의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그 일 후, 에드워드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그는 일하면서도 찬송을 불렀으며, 일하는 보람이 생기자 일의 능률도 오르고 신용도 얻어 수입이 좋아져 가구 공장의 직공에서 사장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거듭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그가 소유한 재산을 교회를 짓는 데 아낌없이 드렸고, 그 자신도 목사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에 뜨거운 감격이 솟구쳐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연필을 들고 적어 내려갔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길이 막히면 길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신호입니다. 하나님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라고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생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3.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환난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우리는 서로에게 은사를 통해 소망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바울은 자신이 왜 절망 가운데 처할 수 밖에 없는 환난을 당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환난 가운데 처한 자에게 소망을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1)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환난을 경험하게 하고 바울을 위로해 주었습니까?
① 바울은 환난 중에 자신을 위로한 이유가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기를 위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4, 6). 하나님이 환난 중에 위로하는 것은 자신만 위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자, 고민하는 자 위로하게 합니다.
② 바울은 자신이 받은 환난이 위로 뿐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 소망을 갖는 것을 보면 믿음없는 자가 구원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감동을 체험하게 됩니다.
③ 바울은 자신이 받은 환난 가운데 위로를 받는 것은 자신과 같이 고난을 받는 사람들이 고난을 견디게 하는 위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
위로의 사명자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질문한 수 있습니다. "왜 고난을 당하십니까? 왜 나만 이런 병에 걸립니까? 왜 우리 가정은 이런 어려움이 오고, 왜 이렇게 고생을 하여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환난받는 이유(6)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①너희의 위로를 위해서입니다(6). ②너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6). ③고난을 견디게 하기 위해서입니다(6) 위로의 효과는 모두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만한 자리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위로를 받습니까? 고난 속에 위로의 체험을 받은 자의 위로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약함, 나의 실패가, 나의 약점이 다른 사람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의 가난함이 고통이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2)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무엇을 부탁합니까?(11) 기도를 부탁합니다. 간구함으로 도와 달라고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환난을 이길 수 있는 은사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간구함으로 절망 가운데 소망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절망적인 환난에 처한 자신들에게 복을 내릴 것이며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서로를 위해 주신 은사를 통해 환난을 극복하고 소망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병들어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 이사야가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태에 있을 때 초대 교회 성도들이 기도합니다.

2)우리도 서로에게 소망을 주는 위로의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겪은 고유한 신앙 체험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위로의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어려운 사람에게 은사를 받게 하는 소망의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절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각자 주어진 고유한 경험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웃음을 통해, 격려의 말을 통해, 작은 물질을 통해 서로 위로하고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김순권 교수의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친구인 레이턴 친(Leiton Chinn)이 있었답니다. 미국 컬럼비아에 유학하고 있던 영어가 제대로 되지 않아 크게 낙심하고 있었답니다. 레이턴은 기숙사 룸메이트였는데 영어가 힘들어 공부를 그만둘 생각을 한다고 했더니 “미국 사람인 자신도 철학이나 신학을 공부하는 게 어려운데 외국인이야 오죽하겠느냐”면서 격려를 해주곤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에 들어오니 얼마전 치른 중간시험 답안지가 그의 침대 위에 던져져 있었답니다. 그의 점수는 40점으로 낙제 점수였다고 합니다. 그는 미국의 유명한 조지아대 교육학과 출신 미국인도 저렇게 고생하는데 나에게 이 정도 힘든 것이야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용기를 얻고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답니다. 알고 보니 레이턴이 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낙제점수가 보이도록 답안지를 올려놨다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40장 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가서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소망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독한 사람, 죽어 가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소망이 있는 곳에 사막이 오아시스로 변합니다. 미움과 질투, 원망과 불평이 있는 곳이 희락과 평강으로 변합니다. 소망의 샘물이 흘러 들어가면 증오가 있는 곳에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는 있는 교회가 부흥하고 소망이 있는 가정이 평안하고 소망이 있는 직장이 활기가 넘칩니다. 소망이 있는 기업 노사가 화합니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소망의 도움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나누는 순간, 우리가 우리의 위로를 나누는 순간, 우리의 주변은 절망이 변하여 새로운 소망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게 하려함이라"(롬5:5)고 말씀합니다.

밤이 깊을수록 아침은 빨리 옵니다.
어둠이 몰려 오고 있습니까? 칠흑같은 어둠이 인생의 앞길을 가로 막고 있습니까? 끝없는 사막이 펼쳐 지고 있습니까? 인생을 좌절하게 하는 것은 크나큰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작은 마음의 절망입니다. 세상은 황량한 광야와 같고 거친 파도가 끝없이 일어나는 바다와 같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라가면서 환란과 역경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절망은 이미 십자가에 다 묻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절망을 지고 십자가에 지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밀라노에 있는 대성당의 세 개의 문에 있는 데 한쪽 문 위에는 장미꽃의 아름다운 화환이 놓여 있고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기뻐하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또 다른 문 위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그 십자가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고통받는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중앙 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이다." 환난이 있습니까? 잠깐이면 지나가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난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히려 소망가운데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하나님만이 참된 위로자임을 안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환난 가운데 하나님만 의지하며 소망을 가지고 일어나야 합니다.
3.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환난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우리는 서로에게 은사를 통해 소망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밤이 깊을수록 아침은 빨리 옵니다./김필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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