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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듭남의 삶 (수 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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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요단은 모맥 거두는 시기 곧 봄이 되면 헤르몬 산의 눈이 녹아내리므로 항상 그 물이 언덕에 넘쳤습니다. 그 요단강은 건넌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거나 아무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가끔 남강을 멈추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 가운데 진행됩니다. 요단을 건너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이 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약속이며, 설교는 그 약속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 시대에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 약속이 있기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이 있게 됩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에 들어섰습니다. 여호수아 3:15,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절,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는 물이 그쳐서……. 그렇게 그들이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놀랬습니다.(5:1)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기양양했습니다.
사실, 광야 40년 동안 인도하던 그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었습니다. 누가 모세만한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지적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보기에도 여호수아는 모세에 비하면 그야말로 세발의 피 정도입니다. “과연 여호수아가 모세만큼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사람을 봅니다. 그래서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 등을 따집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여잡고 있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렇기에 당시도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연 여호수아가 모세만큼 해낼 수 있느냐?” 하는 의심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 여호수아 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호수아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신명기 31:23에,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거니 바울을 강하게 하고 담대케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그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아야 합니까? 당연히 여호수아를 잡고 있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도 그래요. 목사를 보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여러분과 저가 다를 거 뭐 있어요? 있다면 전 신학교 나왔고 감리교에서 목사로 안수 받았다는 것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누구든지 신학교 나오고 어느 교단에서든 안수 받으면 목사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이 교회 담임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마다 예배를 집례하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은 저가 아니라 저를 잡고 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요단 건너는 것은 누구의 능력입니까? 여호수아의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게 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요단을 건넌 겁니다.
이제 백성들이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도 일 하시는구나.” “그러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얼마든지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다.”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습니다.

“그때에”
오늘 읽은 2절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1.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례는 여러 민족이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할례는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도 할례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언약의 표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는 그 언약의 표가 할례였습니다. 아무개가 하나님의 백성에 소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가 할례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할례를 행하라 하심은 새로운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땅의 사람들과 다른 거룩함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곳입니다. 그렇기에 그 땅에 첫발을 내딛는 백성들에게 할례를 하라 하심은 그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임을 새롭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너희는 내 백성이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라는 언약이 분명해 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신분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할례를 마친 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애굽에서의 수치가 굴러가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이 길갈이 되었습니다. 길갈은 ‘굴리다’를 뜻하는 히브리 낱말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진을 친 곳이 길갈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할례를 행하게 하셨고, 그럼으로 해서 애굽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셨습니다.
애굽의 수치, 그것은 종살이를 의미합니다. 종으로서의 치욕과 종의 근성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일하는 것 아닌,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 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이런 종살이에 몸이 배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조금만 힘들어도 “돌아가자”고 한 겁니다.
수치의 또 하나는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은 이방신과 권력입니다. 바로의 권력, 그래서 이런 권력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였습니다.
그것들을 굴러가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종이 아닙니다. 이제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길갈에서의 할례가 있어야 합니다. 할례는 일반인이 약속의 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는데, 천국을 맞이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회개입니다.
길갈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로 해서 가나안 곧 약속의 땅으로 들어감에 있어, 그 약속의 땅에서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이 길갈이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하고, 이젠 오로지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유월절을 지냈습니다.
“그달 14일 저녁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으며 유월절을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때가 유월절 때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찬이 유월절 만찬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다음날 그러니까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 안식일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안식 후 첫날, 지금 주일입니다. 부활절은 춘분이 지나고 만월이 된 다음 첫 번째 주일입니다.
출애굽기 12:48,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 딱 한번 시내 산에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민수기 9:1-14, 거기 5절, “그들이 정월 14일 해 질 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다 쫓아 행하였더라.”
그리곤 그동안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유월절 무슨 날인가?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날입니다.
출애굽기 12-14장에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를 치시던 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각 가족대로 어린양을 취하여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라 하고, 한 사람도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를 치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그 피를 보거든 그 문을 넘어서 그 집을 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유월절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월절은 죽음이 넘어간 날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때, 그 집안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죽었습니다. 그들이 직접 죽지는 않았지만 양들이 대신 죽었습니다. 양들이 죽으므로 이스라엘들도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양들의 생명을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이들이 새삼 가나안 땅에 들어서서 이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날짜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의 주인이심을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또 한번 양을 잡고 쓴 나물을 먹으므로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살리신 것을 다시 확신하고 비록 양을 드리지만 곧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년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매년 자신들의 생명 대신 양을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오셔서 당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새로운 땅,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월절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새 땅이 들어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인 된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즉 죽어야 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그 다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후회하고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죽고 나니까 회개 할 기회, 다시 말해 거듭난 삶의 기회가 없어지고 만 겁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의 생명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생명을 빼앗아 가시면 회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과 같이 생명을 대신하는 어린양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누가 그 어린양 역할을 대신 할 것인가? 옆을 둘러보세요. 누구를 대신 하겠어요?
또 누가 대신하겠다고 나서겠어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 대신 죽으시는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살기 위해서 어린양이 있듯이 지금 우리를 살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고는 우리에게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고는 우리에게 구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러분!
그분을 경배하십시오. 그분을 찬양 하십시오. 그분께 예배 하십시오.
유월절 지킴은 곧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가 없다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일 수 없습니다.

12절, 드디어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들이 그 땅,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날 만나가 그쳤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만나가 계속 내렸으면 좋겠지요? 그러면 농사짓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런데 그 만나가 그쳤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에 알맞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주셨습니다. 광야는 농사지을 수 없는 땅입니다. 계속 이동하기에 농사지을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머무르는 땅,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있습니다. 더 이상 만나가 필요하지 없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때에 따라, 가장 알맞고 좋은 방법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만나는 그냥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 하나님의 은혜 하면 그냥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농사짓는 것은 내 노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나가 그친 것은 하나님의 은혜도 그친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젓과 꿀이 흐르는 땅까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그 땅에서의 삶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젠 이들은 새 땅에서 농사지어다 먹고 살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광야의 만나가 하나님의 은혜이듯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어 스스로의 먹거리를 마련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광야의 만나가 하나님의 은혜이듯 가나안 땅에서 나는 소산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애쓰고 수고해서 얻은 것 그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까?
내가 스스로 먹거리를 마련했다고 내 능력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먹거리를 마련했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됩니다.
광야에서 주신 것은 육신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새 땅에서의 양식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육신의 양식은 땅에서 해결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도 땅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비록 땅의 양식을 먹고 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의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양식을 먹고 살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길갈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습니다.”고 고백합니다. 회개와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살리시려고 대신 죽으신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드린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성령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푸른 초장 잔잔한 물가 뿐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시 23편)
무엇을 하든 내 능력이라 여기지 마시고, 늘 주님과 은혜인 것을 믿어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이 더 가졌다는 주님의 말씀을 늘 염두에 두십시오.
복의 복을 더 하시는 하나님,
은혜에 은혜를 더 하시는 하나님,
그 은혜와 복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이 영 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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