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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 산 자의 하나님 (눅 20:2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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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한 번 났다가 죽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건강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나 이 세상에 와서 반드시 때가 되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마련입니다. 단지 예외가 있다면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었던 에녹과 엘리야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는 할 말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입니다. 누구는 죽은 영혼은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고도 하고 누구는 죽은 다음에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나 계속해서 살아간다고 하는 윤회설을 말하기도 합니다. 아니 이도 저도 다 부인하고 사람은 이 세상에 나서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이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기에는 너무 허무합니다. 그래서 윤회설을 말하기도 하지만 윤회설의 끝에도 극락과 아수라라고 하여 우리네 식으로 말하면 천국과 지옥을 두어 설명을 합니다. 그러니까 돌고 돌다가 어느 순간 마지막 심판이 있어 그때 누구는 극락으로 누구는 아수라 즉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바로 선업과 악업이라고 해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살았느냐 즉 우리의 행실을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선업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다 없어진 무의 상태가 되어질 때 비로소 극락의 문이 열린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나를 버리기 위한 수행의 길을 그들이 걷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한번 나서 죽는 것은 같지만 죽고 난 다음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심판의 결과 사람들은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불못 곧 둘째 사망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두 번의 죽음이 있습니다. 한번은 육신의 죽음이요 또 한번은 심판 뒤에 오는 영원한 멸망으로서의 지옥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영원한 형벌이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으로 표현되는 하늘나라냐가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영원한 형벌로서의 지옥입니까? 아니면 하늘나라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살아나는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남겨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형수를 맞아들여서 뒤를 이을 아들을 자기 형에게 세워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얻어서 살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고, 그 다음에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일곱 형제가 다 그렇게 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러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사두개파 사람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직 모세의 율법만을 믿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믿음도 살아있을 때뿐이지 죽고 나면 다 끝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소위 형수 취수제라고 하는 제도를 들고 나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형수 취수제라고 하는 것은 본문에 나온 대로 가문을 이어가기 위한 전통입니다. 제일 맏형이 결혼을 합니다. 당연히 자식을 낳아서 가문을 이어야 하는데 그만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렇게 되면 자칫 가문이 끊길 수 있습니다. 물론 양자를 들일 수도 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혈통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핏줄로 가문을 이어가야 하는데 가문의 대들보인 장남이 아들이 없이 죽었으니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바로 형수 취수제입니다. 즉 형이 아들이 없이 죽게 되면 둘째가 형수와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도록 하고 아들을 낳게 되면 형의 족보에 올려서 가문을 이어가는 겁니다.
문제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가문을 이어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일곱 형제가 다 형수와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이 죽고 나중에 형수까지 죽고 난 다음 사후의 세계에서 과연 그 형수는 누구의 아내라고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 참 곤란한 질문입니다. 아주 고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답변하십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여기서 먼저 예수님은 살아나는 부활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죽는 부활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시 살기는 하되 지옥에 떨어질 사람에 대해서는 여기서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살기 위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믿는 것이요 이 믿음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필요합니다. 즉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요한복음 1장 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부활의 자녀들입니다. 그것도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이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다면 우리는 이미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이요 부활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요한복음 3장 16절은 말씀하고 있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었느니라”고 요한복음 5장 24절은 말씀합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 31절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 분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미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었기에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다 천사와 같아서, 더 이상 죽지도 않습니다. 우리들은 부활의 자녀들이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기에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것이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결혼제도는 인류를 보존하고 번성시키기 위한 창조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때는 이미 창조의 법칙이 완성된 때요 죽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인류 보존 목적에서 제정된 결혼 제도가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결혼을 통한 쾌락이나 만족은 더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특히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모두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천사와 똑같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사망과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며 결혼과 출생이 필요한 제한된 존재의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천사들처럼 하나님 앞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도들과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만으로도 행복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모두가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시간 다시 한번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분명히 믿고 있는가 확인하시고 이 믿음을 지켜 하나님 앞에까지 다 함께 동행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보여 주었는데, 거기서 그는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그래도 모세 오경은 믿습니다. 그렇기에 모세 오경에 나와 있는 모세의 고백을 통해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셨다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마치 그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죽은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과거에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지만 죽은 다음에는 믿음으로 바라보던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래서 산 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산 자입니까? 아무리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해도 예수를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죽어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서 죽은 자요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아직 한번도 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어 다시 심판을 받고 둘째 사망으로서의 불못에 던져지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한번 죽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한번 죽은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떠나게 될 때 주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우리 눈에는 죽어서 땅에 묻힌 것으로 보일 지라도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다 아브라함의 품으로 이야기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잠시 후면 하나님 나라에서 먼저 가 있는 성도들과 가족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헤어지기에 슬플 수밖에 없으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픔에 잠겨 있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과 비록 같은 장소에서는 아니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떠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그리고 우리는 잠시 후를 생각하며 이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산 자가 되지 않고서는 영원히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은 언제든지 내일의 믿음이 아닌 오늘의 믿음이요 바로 지금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고린도 후서 6장 2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하신 에베소서 5장 8절의 말씀처럼 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하려고 합니까?”하신 갈라디아서 4장 9절의 말씀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아니라고 부인하겠습니까? 나는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이미 알아주셨습니다. 앞으로 내가 잘 하면 알아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알아주십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돌아가 거기에 매여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지금 은혜를 받아야 하고 지금 구원을 받아야 하고 지금 은사를 받아야 하고 지금 복을 누려야 합니다. 앞으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로 서로를 축복하는 것이요 제사장의 축복으로 서로를 축복하는 것이요 주는 자의 축복으로 축복하며 선언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하지 못합니다. 지금 은혜 받지 못하면 앞으로도 아닙니다. 언제든지 은혜의 때는 지금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 지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알아주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내가 부족하다고요? 그래요? 우리는 여전히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지고 있어도 여전히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따사로운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그 손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누가 뭐래도, 여전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다고 고백하십시오. 주님이 지금 내게 능력 주신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렇기에 내게 지금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십시오. 지금 그렇게 고백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못합니다. 왜요? 여전히 나는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나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과 부족함을 지금 느낀다면 그래서 힘들고 어렵다면 지금 도와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용서해달라고 고백하십시오. 지금 복 주시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야베스가 그러했듯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가 존귀한 자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와 고백을 들으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산 자의 하나님 그 하나님께 지금 아뢰십시오.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을 향해서도 지금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지금 미안하다고 고백하십시오. 지금 용서해 달라고 고백하십시오. 지금 해야 됩니다. 지금이 아니면 내일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산 자, 지금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산 자의 하나님, 지금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여전히 복 주시며 힘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기쁨으로 동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항상 지금은 못해도 앞으로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해야지 내일부터는 해야지 하고 다짐합니다.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우리가 해야 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은혜 받아야 할 때도 바로 지금입니다. 무언가 부족함이 있다면 지금 구하십시오. 지금 아뢰십시오.
힘들고 지쳐 있습니까? 무언가 꽉 막혀 있습니까? 지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누구 눈치 보지 말고 엎드리십시오. 탄식이 나옵니까? 그렇다면 실컷 우십시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숨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것까지라도 다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온전히 엎드리십시오. 그래서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지금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십시오. 결코 뒤로 미루지 마십시오. 그래서 오늘 아니 지금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을 받고 모든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깨우침을 받으십시오. 예수를 시험하러 왔다가 감히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못했던 사람들처럼 어떤 악한 마귀도 더 이상 우리를 시험치 못하고 어떤 시험도 더 이상 우리를 흔들지 못하게 만드십시오.
우리는 이미 부활의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미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자녀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고 모든 복을 주고 계시며 모든 은혜와 능력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를 믿으시고 지금 은혜의 자리에 나아와 주님의 능력을 힘입고 주님의 사랑을 힘입고 주님의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부활의 생명을 지닌 자로서 승리의 찬가를 높이 부르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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