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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는 복종의 삶을 사는 것이다. (엡 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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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으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어느 의과대학교의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의대생들은 자신이 최고라고 으시대는 두 명의 의대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학생이 병원의 복도를 걷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매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고 엉거주춤하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저 환자의 병은 분명히 류마티스 관절염일꺼다" 그러자 다른 학생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습니다. "천만에, 저 환자의 병은 허리를 만지며 걷는 것으로 보아서 허리디스크가 분명하다." 두 의과 대학생은 병원의 복도를 힘들게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보고 그 사람의 병명이 무엇일까를 놓고 서로 자신의 판단이 맞을 것이라고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드디어 그 남자분이 가까이 오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두 의과 대학생은 서로 먼저 혹시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류마티스 관절염이시지요? 아니, 허리 디스크시지요? 서로 자기의 판단이 맞지 않냐? 고 묻자! 이 환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이렇게 반문을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힘겹게 말입니다. "저..화..화장실이 급한데... 화장실이 어딥니까?"이 분은 화장실이 급해서 화장실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가르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대생하면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환자들의 병에 대해서 연구하고 고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틀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험이나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날 이렇게 의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사람의 병도 고칠 수 있는 것보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더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을 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신중해야 되고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의 틀에, 경험에, 지식에 하나님을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아이의 행동을 보고 웃듯이 하나님이 나를 보고 웃으실 때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감사의 부분에 있어서 우리들이 착각이나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요.
여러분 감사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우리가 맥추감사절을 보냈는데 국어사전에 보면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설명이 다 되는 겁니까?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와 일반인들의 감사가 다른 것이 있습니까? 만약에 다르다면 그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그 감사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의 표현 역시 단순한 물질이 아닌 삶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중에 20절을 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범사"라는 말은 "모든 일에"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우리는 모든 일에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워야 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항상"이라는 말은 언제든지, 밤이나 낮이나 어떤 시간에도 가리지 말고 무엇을 하라구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고 하셨는데.... 하나님께 감사를 하는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 각종 수식어가 붙지만... 그보다도 우리가 항상 불러야 될 하나님의 이름은 "아버지" 그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의 감사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의 감사입니다.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 될 만한 자격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은 첫째는 죽음에서 생명을 얻었다. 두 번째는 생명만이 아니라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신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지요. 키워주시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주님도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상에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도록 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높은 절벽위에 둥지를 틀고 사는 독수리 가족이 있었습니다. 아빠 독수리가 둥지에서 놀고 있는 아기독수리를 불렀습니다. 둥지 밖으로 나오게 하고 절벽 끝으로 더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아기 독수리를 절벽 밑으로 떨어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기 독수리가 얼마나 놀랬을까요? 아빠 독수리가 아기독수리를 절벽 밑으로 밀어 내리는 순간 그것은 고난이었습니다. 어쩌면 불안이고 절망이었을지 모릅니다. 아기 독수리는 죽었다고 생각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기독수리가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필사적으로 살기위해서 처음으로 날개 짓을 하는 순간 이 아기독수리는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니 내가 날 수 있다니!’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날개를 펄럭였지만 그때까지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기 독수리는 그 순간부터.... 언제부터요? 아빠독수리가 언덕위에서 밑으로 밀치는 순간부터... 고난의 시간부터... 그에게는 무한한 하늘의 공간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희망이 있는 비전의 공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아빠 독수리가 어느 날 그 사랑하는 아기 독수리를 언덕에서 밀쳤을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새들의 왕을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계획 된 훈련입니다. 그리고 이 아기 독수리가 훈련 중에 아주 땅에 떨어지려고 하면 지체 없이 아빠독수리는 내려와 그 날개를 펴고 아기 독수리를 안았을 것 입니다. 왜요? 죽을 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해서 새 중의 왕인 독수리가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을 하기 까지는 이러한 고난이라고 하는 훈련을 통해서 새들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광야생활을 하다가 시내산 밑에 왔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들을 업어서 여기까지 왔다. "
만물의 왕인 사람.. 그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일군이 된 그리스도인도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 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다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승리자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러한 고난도 주시고 어려움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범사에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라고 하는 이 말씀 속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네델란드의 유명한 부흥사인 코리 텐 붐 여사의 간증입니다. 독일 나치에 의해 나라가 정복되자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온 가족이 포로수용소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금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 한 그리스도인 간호원이 코리에게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말씀하세요.”라고 속삭이더라는 것입니다, 코리는 어김없이 성경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고 그 간호원을 통해 작은 성경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그 때 코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하면서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코리는 들키지 않게 갖은 애를 써가며 성경 말씀을 삼키듯이 읽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코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18말씀을 읽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그 말씀은 코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방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겨진 감방으로 오자 코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비참한 곳에 있었지만 이곳은 더욱 비참했는데 그 이유는 벼룩이 너무 들끓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계속 마음을 두드립니다. 코리는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벳시는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리는 마지못해 언니의 기도에 ‘아멘!’하며 순종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코리는 벼룩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독일 군인과 간수들이 이렇게 들끓는 벼룩 들이 혹시라도 자기들에게 옮을까봐 코리의 감방 주위에는 절대로 얼씬도 하지 않아서 마음 놓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결국 그 귀찮은 벼룩 덕분에 코리와 벳시 자매는 매일 성경 말씀을 그 감방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하루종일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린 여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게 되자 그 감옥은 천국의 교제권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귀찮은 벼룩 때문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좋은 것으로만 좋게 만드시지는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으로도 좋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 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 삶을 책임져요? 그 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중곡동 어린이 대공원에 가면 〔코끼리가 다녀간 식당〕이 있습니다. 어린이 고원에 서커스하려고 온 코끼리가 탈출을 해서 한 식당을 부순 것이지요. 신문과 방송에 소개가 되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가 됐어요. 이로 인해 식당은 큰 피해를 본 것은 물론이지요. 하지만 이 식단 주인은 피해 보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식당 수리를 하면서 식당의 이름을 다시 지었습니다. 「코끼리가 다녀간 집!」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다 보면 '코끼리가 탈출해서 부순 식당이 있다는데' 하다가 이 집이구나! 하면서 들어온다고 해요! 그리고 이 집에 오면 메뉴가 하나 생겼다고 하네요. 코끼리 정식이 있다는 거예요! 이 불경기에 이 식당만은 오히려 장사가 잘 된답니다. 화가 복이 된거지요.「고난은 변장한 축복이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다 고통이 있습니다. 힘도 들 때가 있어요. 가룟유다와 같이 배신자도 있어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사용하심으로 복이 되게 하시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의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아버지께,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범사에 우리 주의 이름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을 따라가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을 지켜주시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윌리엄 로우는 그의 저서 <엄숙한 부르심>에서 말합니다. ‘세계 최대의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든가, 금식을 많이 했다든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든가 한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한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느냐, 누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간 사람이냐 할 때에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어떤 일에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인데 하나님을 항상 아버지로 부르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믿음의 성도가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피차에 복종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21절을 같이 보게 되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라고 했습니다. 감사를 하는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감사 그러면 감사라는 것은 그냥 인사를 하면 된다고 하지만 이 초대교회에는 무슨 돈이 어디 있습니까? 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삶으로 보여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회심시킨 것은 리빙스턴의 설교가 아닌 삶이었습니다.”
1871년 초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신문기자 헨리 스텐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선교사인 리빙스턴을 만난 후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리빙스턴선교사가 아프리카밀림의 개척자요 탐험가로 수년간 본국과의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본국에서는 그의 소식이 궁금합니다. 헨리 스탠리는 특종을 할 목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허가되지 않은 밀림으로 리빙스턴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스텐리는 수소문 끝에 찾고 찾아 리빙스턴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리빙스턴으로부터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밀림에서 10달 동안 같이 시간을 보내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은 단순한 탐험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간 선교사니까 당시 만해도 피부가 검은 분들은 노예이상의 취급을 하지 않는 때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에게 에수 생명을 전하는 리빙스턴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무신론자 스탠리기자는 그 때 일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 당시 나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무신론자에 버금가는 편견을 갖고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리빙스턴 선교사와 10달을 지내면서 상당 기간 나 자신을 향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이 고독한 노인을 만나게 된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분은 여기에 와서 저 고생을 하고 계신가? 정신이 나간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인가? 무엇이 그를 저렇게 감동시키고 있는가?’ 우리가 서로 만난 지 몇 달이 지났을 무렵 나는 그 노인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생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점차로 타인에 대한 그의 동정의 마음이 나에게도 조금씩 전이되었고, 내 안에도 같은 동정의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세와 온유함, 열정과 성실, 그리고 그가 자기 일을 얼마나 열심히 감당하는지 지켜보던 나는 결국 그 때문에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스텐리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회심시킨 것은 리빙스턴의 설교가 아닌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피차 복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인간관계의 대 전제가 성령 충만을 받아서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피차 존경하여 복종할 때 감사를 통한 바른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는 세 가지의 관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노예가 제시되고 있는데...시대적으로 봤을 때, 지금봐도 그렇지만 신분의 차이가 철저하게 나뉘어 있는 시대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부관계는 그렇다고 해도 부모와 자식간의 자식이 부모를 복종할 수 있어도, 부모가 자식에게 복종할 수 있습니까? 주인과 종과의 관계도 종이 주인에게 복종은 할 수 있지만 주인이 종에게 복종할 수 있어요? 당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종에게도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데 감사가 그 안에 있으면 복종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 자유와 자신의 권리를 자기의 권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포기하고 더 나아가 그 권리를 감사한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복종이라는 것으로 감사를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니까 복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종들도 주인에게 복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은 경외하는 마음으로...경외하는 것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차 복종을 하는 마음을 가지고 관계를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높여주라는 것입니다. 복종은 그대로 따라서 쫒는 것입니다. 엎드리는 것입니다.

김진사와 이진사는 한 마을에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장가를 들었습니다. 전답도 살림 형편도 거의 같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윗말 김진사 집은 부유해져 가는데 아랫말 이진사 집은 자꾸 살림이 줄어 가난해져 갔습니다. "자네에게 무슨 비결이 있는가? 해마다 전답이 늘고 살림형편이 기름져 가니 무슨 방법이 있는지 가르쳐 주게" "허허, 뭐 나라고 별다를 게 있겠는가? "그럴 리가 없어! 친구지간에 그러면 못쓰지! 말을 해 주게" 김진사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가 말일쎄, 이 길로 집에 돌아가는 대로 아들에게 소를 끌고 지붕 위로 올라가 보라고 해 보게, 그리고 며느리에게는 소금 한 가마니를 이고 웅덩이에 들어가라고 일러 보게" 이진사는 어이가 없었으나 자기가 졸라댄 일이었으므로 집에 가자마자 김진사가 가르쳐 준대로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 내외는 길길이 뛰며 "아니 아버지가 나이를 잡숫더니 망령이 드셨습니다" 소란을 떨었습니다. 그 길로 이진사는 화가 나서 김진사 집으로 가서 자초지종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김진사가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를 불렀습니다. "얘들아 이제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아범아 널랑은 소를 끌고 지붕위로 올라가고 어멈아 너는 소금 한 가마를 이고 웅덩이로 들어가거라" 그렇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들과 며느리는 지체하지 않고, 각각 소를 끌고 나왔고 소금 가마니를 이고 웅덩이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알겠는가? 비록 가당찮은 명령일지라도 어른의 말을 믿고 복종할 뿐만 아니라 가족이 서로 화합해서 힘을 합치는데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아버지는 아들 내외가 지붕으로 올라가고 웅덩이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불러 들였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부부의 관계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나, 직장에서 상사와 직원과의 관계도, 주인과 종과의 관계도 교회에서 주의 종이나 교인과의 관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누구와 관계를 갖던 간에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경외하고 피차 복종의 자세를 갖게 되면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에게 복 주실 주로 믿습니다.
주님도 복종을 배워 하나님 앞에 영광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기적 자유와 자신의 권리를 자기의 권익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포기하고 더 나아가서 그 권리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위해 복종이라는 것으로 감사를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관계의 대 전제가 성령 충만을 받아서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피차 존경하여 복종할 때 감사를 통한 바른 인간관계가 형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을 만나든지 그 분이 예수그리스도시라는 생각을 갖고 경외하고 복종할 수 있는 마음을 갖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녀된 우리에게 아버지의 축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나라에 보면 오래 전부터 유명하고 세계적인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나라에도 보면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손자병법이나 군주론 또는 한비자 같은 책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보면 거의 남을 죽이고 내가 살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렇게 된다면 과연 이기는 것이냐?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조가 망한 것도 사색당파 때문이에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도 보면 또 싸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계산을 잘못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교육을 받은 정치인들이 싸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큰 손해인 것을 모르고 계속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도 싸우면 이긴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행동은 세상 사람들처럼 싸우면 이길 것처럼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들도 똑 같해! 아니 믿는 것들이 더해!.. 하면서 좀처럼 인정을 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를 합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싸우면 아주 큰 손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경은 싸우는 자가 이긴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인들끼리도 왜 그리 싸우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 경쟁한다지만 믿는 사람들은 왜 싸우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셉이나 다니엘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사람들과는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이지만 믿음의 선진들 특히 위대한 사람일수록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본으로 삼고 살아야 할 우리들이 그렇게 싸움 싸우듯 살아서야 세상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로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녀 된 자로써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을 경외함으로써 피차에 복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우리들이 취해야 할 모습입니다. 이기려고 하지 마십시오.
남편한테 아내한테 지세요. 자식들한테 상처주시지 마시고 지세요. 부모들 더 잘 섬기시고 윗 상사나 아래 직원들에게 더 잘해주세요. 교회에서도 복종 잘 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다 많이 받고 훌륭한 하나님의 좋은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창 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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