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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보배를 가졌으므로! (고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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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말

바울은 질그릇과 보배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연약성을 설명하였습니다. 인간이란 질그릇과 같아서 깨어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인간의 마음속에 두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간의 육체에 담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명과 직분을 우리에게 수여하셔서 간직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약하지만 각자에게 귀한 보배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은혜와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된 성도는 보배로 말미암아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나 복음의 능력을 믿고 승리를 확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1. 우리의 육체는 질그릇과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렘 18:4)고 말했습니다.  태초에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고(창 2:7), 또한 인간의 육체를 질그릇에 비유한 성경의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욥은“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욥 10:9)라고 말했습니다.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는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욥 33:6)라고 말한 것 등이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직 권위를 강조하던 바울은 이제 자신의 나약한 인간성을 고백합니다. 질그릇은 인간의 육체를 가리키고, 성경에서 육체는 나약한 인간성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질그릇은 모양도 없고, 약하여 깨어지기도 쉬울 뿐 아니라, 별로 가치도 없이 귀히 쓰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즉 가치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면 깨어진 질 그릇과 같이 가치가 없어집니다.

2. 우리의 육체는 귀중한 보배함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질그릇과 같은 자기의 육체에 사도의 직분과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육체가 보잘것없는 질 그릇과 같지만 보배와 같은 그리스도와 그가 주신 직분을 받았기에 보통질그릇이 아니라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생각하면서 이러한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에 보배가 담겼으니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 2:7)라고 말했습니다.

사도의 육체는 연약한 질그릇에 지나지 않지만 그 육체에 담긴 복음은 영광스러운 보배입니다. 사도의 이 질그릇은 환란을 받으나 이 보배로 인하여 그 환란과 고통을 참고 견디며 승리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도 보배이지만 그의 사도직도 보배였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 이처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보배가 자신의 나약한 육체에 주어졌음을 간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적인 관심을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은 하늘의 귀중한 보배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천국 비유 가운데 일꾼이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 것과 같다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이라는 보물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거기에 투자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 이익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 이 귀한 보물을 누가 소유했습니까? 그것은 복음을 받아 간직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보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벧전 1:19) 이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승리합니다.

1).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고후4:8)라고 말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다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 환란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싸이지 아니하며”라는 말은 아무리 막다른 골목, 궁지에 몰린다 해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나약한 질그릇 때문에 환란은 당하지만 거기에 담긴 보배 때문에 승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가 현재에 있는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 사방으로 환란을 당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후7:5)고 말했습니다. 아람의 군대가 밤에 사마리아 성을 에워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왕하6:15)고 말씀했습니다.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오리까”(왕하6:15)라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 대답하되 ❶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❷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❸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6-17)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Mathew Henry는 “우리는 하나님 안에 도움이 있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 우리는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바울 사도는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4:8)라고 말했습니다. “답답한 일”은 길이 없음을 말합니다. “낙심”이란 그 절망상태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가슴 답답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수없이 많습니다. 가슴 답답한 일을 만났을 때에 느끼는 것은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괴롭다는 것입니다. 한심스럽다는 것입니다.  Pascal은 “한 방울의 물, 한 점의 바람이 인간을 죽일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특징은 강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한데 있습니다. 

로마의 장군의 개선식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 있다고 합니다. ❶첫째는 장군이 머리에 관을 쓰고 전차를 타고 행진할 때 군중들은 큰 소리로 칭찬의 말도 보냈지만 때때로 “뒤를 돌아보라. 너도 죽는 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❷둘째로 행렬의 끝부분에서 장군의 부하들이 장군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반면에 더러운 욕설과 농담을 지껄이기도 했습니다. 장군을 칭송하는 반면 장군이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생은 답답함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영광으로 감싸 주시고 있습니다. 때때로 답답한 일을 만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수로 날마다 우리의 영육을 시원케 하여 주십니다. 

3). 우리는 견디기 힘든 핍박을 받습니다.

바울 사도는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고후4:9)라고 말했습니다. “핍박은 뒤쫓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쫓기는 생할을 하고 있습니다. 핍박이란 특별히 신앙적인 문제 때문에 쫓기는 것을 말합니다.

아벨은 형 가인에게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바울은 동족에게 쫓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Plummer는 “사람에게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에게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라고 번역했습니다. 핍박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핍박받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순교자들에게 가장 주목할 것은 그들이 가장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짠 다아크(Jeanne Darc:1412~1431)는 동지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홀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좋은 일이다. 하나님의 우정, 하나님의 도우심,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배반치 않았다. 그의 힘안에서 나는 죽기까지 용감하고, 용감하고, 용감하리라”고 말했습니다.

4). 우리는 바닥에 거꾸러뜨림을 받습니다.

바울 사도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9)라고 말했습니다.

Barclay는 “ We are knocked down but not knocked out.”라고 말했습니다. 이말은 그리스도인들은 “넉다운은 되지만 넉아웃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운은 되지만 KO 는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은 “넘어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한번도 매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아도 결코 패배하지 않는 것이다. 전투에는 질는지 모르나 전쟁에서는 지지 않는 것”이라고 바클레이는 말했습니다.

실제로 바울 사도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다시 깨어났습니다(행4:19-20). 바울 사도는 “❶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❷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❸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❹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❺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고 말했습니다.

보배는 언제나 소중히 간직하여야 할 물건입니다. 그것을 탐하고 넘보는 도둑이 많기 때문이요, 복음을 전도하는 사도가 환란을 당하는 것도 그가 가진 이 보물을 빼앗기 위해 농간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질그릇인 육체는 깨어질 위험에 처하고 절망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나약한 질그릇이기 때문에 받는 환란입니다. 그러나 결코 “낙심하지 아니하며, 망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그 안에 “복음의 능력”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질그릇인 사람에게는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에게는 붙드심을 받아 “버린바 되지 아니” 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이유”는 거기에 담긴 보배 때문입니다.  사도가 당한 모든 환란은 예수의 죽으심에 연합하는 것이요, 거기에서의 승리는 예수의 부활과 생명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연약한 질그릇에 담긴 귀중한 보배를 위해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으로 체득하며 살아야 합니다.

끝맺는 말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❶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❷겉사람은 후패하나 ❸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❹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❺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❻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6-18)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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