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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빠질 때, 부족할 때, 낮을 때 (약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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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가 바뀌어서 복이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조차도 불행이 오히려 행복으로 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자세를 가질 줄 안다면 기독신자들은 더욱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세상에서 화라고 불리는 것들까지 자유롭게 사용하시고 오묘하게 역사하셔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결국 복이 되도록 만드신다는 사실은 성경이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요 신앙의 선조들이 누누이 체험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펼치고 있는 야고보서의 서두가 바로 그와 같은 교훈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야고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네 명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였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면서 이 편지를 보내었다고 했습니다.
  ‘열두 지파’란 물론 이스라엘 백성 즉 유대 민족을 지칭하는 표현이지만 좀 확대 해석하면 영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된 모든 기독신자를 통틀어서 한 말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발신인인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출신 기독신자들 중에서 스데반 순교 이후 이방 지역으로 ‘흩어졌던 자’(디아스포라)들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자연히 이들은 이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이전처럼 더 이상 자주 접촉하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거기에다 그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많은 시련들이 그들에게 닥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그처럼 어려운 형편에 처하고 있던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부어 주고자 씌어졌던 서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히 야고보서의 서문을 통하여, 신자가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오히려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함께 배우고자 합니다.

  1. 시험에 빠질 때에는 오히려 인내를 쌓아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인 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절부터 4절까지의 본문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란 ‘유혹(temptation)’이 아니라 ‘테스트(test)’에 해당되는 시험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이라고 본문에 말하고 있듯이, 그처럼 이방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이방인의 경멸이나 로마 정부의 탄압을 위시한 여러 가지 형태의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비단 디아스포라 성도들에게만 아니라 사람 사는 곳에는 항상 갖가지 형태의 환난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모든 시험들을 다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아무 ‘문제없는(trouble-free)’ 완벽한 평화만을 누리며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누구나 다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시험이라면 중요한 것은 그 대처 방법을 체득하고 발휘할 줄 아는 것이 될 터인데, 바로 그 요령을 두고 성경 말씀은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순수한 기쁨(pure joy)’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일견 너무나도 이론적이고 비현실적인 말로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사도 바울이나(롬 5:3) 사도 베드로(벧전 1:6)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마 5:11-12) 꼭 같이 하셨던 말씀으로서, 기독신자에게는 아주 구체적이고도 실전적인 ‘시험 대처 요령’인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는 지금 환난과 핍박을 현실적으로 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기만 무사안일하게 살면서 그냥 설교를 위한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예루살렘교회를 이끌어 가면서 성도들이 당하는 어려움들을 가까이에서 보았고, 스데반의 순교도 목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계속되는 큰 박해를 피하여 예루살렘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곳곳으로 흩어지게 되는 일까지 직접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야고보는 목자로서 성도들을 위로해 주어야 할 사명을 잊지 않고, 이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교훈을 가지고서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성도는 ‘시험’을 오히려 ‘순수한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까?
  왜냐하면 그 시험은 바로 “믿음의 시련”(trial of faith)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시련’으로 나타나고 사단의 시험은 ‘유혹’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시련’이란 말은 원래 금은을 불속에서 제련하여 순수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의 연단은 무엇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됩니까?
  바로 “인내(perseverance)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덕목들 중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시련’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는 산물인 것입니다.

  그처럼 인내를 온전히 이루고 나면 “너희가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신앙인으로 완성될 수 있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온전하다’란 ‘성숙하다’란 뜻이며, ‘구비하다’란 ‘완성되다’라는 뜻이며, ‘부족함이 없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완벽하다’는 뜻으로서 다 동의어들입니다.
  즉 신자가 성화의 성장에서 100점을 맞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필수과정이 바로 ‘시련’이요 ‘인내’인 것입니다.

  제가 군대 제대하고 난 후에 아주 소중한 재산이 하나 남았는데, 그것은 앞으로의 제 인생에서 육체적인 시련만큼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이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고된 훈련과 근무가 저의 육신을 그처럼 연단시켜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은 인생 시련에 대한 맷집을 좀 키울 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 슬픈 일,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면 그것을 가리켜 ‘재수 없는 일’ 혹은 ‘불행’이라고만 부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아니하고 그냥 ‘시험’이라고 합니다.
  즉 그런 일들을 두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내게 주신 테스트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런 것들을 두고 무슨 ‘운수’가 나빠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일부러 주시는 기회로 받아들이게 될 때 성도는 그 시련을 오히려 기쁘게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신자로서의 인내력을 단련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아니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대학교에서는 입학년도로 학번을 따지지만 미국 대학교에서는 졸업년도로 학번을 따집니다.
  입학만 했다고 다 된 것이 결코 아니라, 공부 열심히 하고 시험 성적을 잘 받고 졸업을 해야 진짜 그 학교 학생이라 불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한번 신앙고백하고 세례 받고 교회의 입교인으로 등록했다고 자동적으로 다 끝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온전하게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이 신앙생활의 성화 과정을 끝까지 성공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도록 만들어 주는 호기인 줄을 깨닫고, 그 시련을 기쁘게 여기고 인내로써 넉넉히 통과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지혜가 부족할 때에는 오히려 기도를 통해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5절 이하 8절까지의 말씀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앞에서 언급된 여러 가지 시험들을 당할 때 영적으로 바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흩어진 열두 지파”의 성도들은 이전에 미처 겪지 못한 여러 가지 시험을 많이 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상 앞에서 분향할 것을 강요받음으로 당하는 시험, 신자가 제사상에서 물려 나온 음식을 대할 때 받는 시험,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핍박하는 동족의 시험 등 이런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마다 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미처 판단이 서지 못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예루살렘에 있을 때 같으면 사도들에게 직접 물어 보기라도 했겠지만, 이방에 흩어져 사는 형편에서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와 같은 경우에 하나님께 직접 지혜를 내려달라고 간구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구하라”는 말은 ‘요청하라’는 뜻입니다.
  잠언 2장 6절에서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라고 증거했듯이,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지혜의 근원이시며 모든 지혜의 무한한 제공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란 차별 없이 기도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후히”란 그 사람에게 넉넉하도록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꾸짖지 아니하시며” 즉 ‘잘못을 지적하지 아니하시고’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도와주더라도 그 전에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했느냐?’라든지 최소한 ‘봐라, 내가 뭐라고 그랬느냐?’라는 한 마디는 꼭 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조금도 당신 얼굴에 불쾌한 표정을 짓지도 않으시고 받는 우리에게 부담감도 생기지 않도록 마음까지 써 주시면서 전적으로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마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드릴 때 꼭 빠뜨리지 말아야 할 자세가 있는데 그것이 곧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가 응답될까 되지 않을까?’라고, 바다 물결이 바람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것같이 기도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했습니다.
  즉 기도하면서도 ‘될지도 모르고 안 될지도 모른다,’ ‘응답 받으면 좋고 못 받아도 본전 밑지는 일은 없으니 괜찮다.’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교인은 기도뿐 아니라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사람” 즉 신앙생활뿐 아니라 매사에 안정감이 없고 늘 불안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that man)이란 언젠가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this man'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상대방을 경멸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호칭으로서, 그런 사람은 자기 기도가 응답 받을 것이라고 아예 꿈도 꾸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서 그런 ‘두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전능에 대하여 불신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그 자녀의 소원을 매정하게 거부할지도 모르는 아버지로, 자녀의 소원을 들어도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능한 아버지로 여기면서 기도를 한다면, 그런 마음으로 하는 기도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불쾌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자를 경멸하시고 그 기도 응답해 주지 않으실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실제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은 믿지 않으면서도 기도라는 형식만 취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에 기도의 의미를 두지 아니하고, 그저 막연히 기도라는 행위 자체만 가지고서도 뭔가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 기도라는 종교적 형식을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를 속이는 일이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가 없어서 실수한 것은 꾸짖지 않으시지만, 기도하면서까지 그렇게 당신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용납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신에게 지혜가 부족함을 먼저 시인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매사에 자기가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기도드릴 줄 모른다면 그 얼마나 큰 교만이겠습니까?
  사실상 기도해도 되고 기도 안 해도 되는 상황을 스스로 구별하기 시작하기만 해도 이미 그 사람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자만심이 싹트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지혜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로 영위함에 있어서 그 외에도 얼마나 부족한 점이 많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부족함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드려 도움을 요청하도록 만들고 계십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니 채워 달라고 기도하게 되고, 그렇게 기도하게 됨으로써 의심 없이 기도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의심 없이 기도할 줄 알게 되니 그 신앙 자체 역시 의심 없이 더욱 확고히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만 가지고 어떻게 해 보겠다는 사람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조언과 지도를 받는 사람이 어떻게 상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어린애처럼 유치한 판단, 죄인이 근본적으로 공유하는 욕심에 따른 길을 가게 될 수밖에 없지만, 기도하는 성도는 주님처럼 생각하게 되고 주님의 능력이 그 손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 인생의 대사가 걸린 어려운 판단의 기로에 서게 될 때, 오히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크게 체험하는 기회로 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세상에서 낮아질 때에는 오히려 자기가 누리고 있는 영적 은혜를 더욱 자랑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 9절로부터 11절에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 중에 “부한 형제”도 있었는데 그런 자를 향하여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분다” 함은 팔레스타인의 기후에서 흔히 생기는 열풍 현상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이 한번 불기만 하면 꽃이고 풀이고 다 순식간에 떨어지고 말라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부라는 것도 무슨 경기 침체나 유가 파동 등 무슨 ‘바람’ 한번만 불면 금세 다 날아가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부자 신자가 “그 행하는 일” 즉 돈 버는 일에만 모든 정성을 다 쏟아 붓고 산다면 참으로 허망한 신앙생활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부한 형제’들은 그 대신에 오히려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성공하고 윗자리에 있고 남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을 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낮아짐’이라는 것이 있겠으며, 또 있다고 해도 어떻게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바로 영접하게 된 부자는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 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될 때, 그런 ‘부자 성도’는 자신의 ‘영적 낮음’을 오히려 세상 앞에서 자랑하며 증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부자의 겸손은 참으로 고귀한 일입니다.
  없는 사람이 없는 표를 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되지만, 있는 사람이 있는 표를 내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낮출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인 동시에 그만큼 고상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낮은 형제”는 오히려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낮은”이란 말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가난함을 뜻합니다.
  실제적으로 초대교회에서 ‘부한 형제’는 극소수였고 절대다수의 신자가 이 ‘낮은 형제’ 즉 사회에서 종이나 노예의 신분으로 살던 자들에 해당되었습니다.

  그처럼 사회적으로 비천한 신분에 있던 자들이 그 어떤 ‘높음’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 “자기의 높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높은 지위와 영원한 기업을 누리게 된 부요함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는 하층계급에 속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이었습니다.
  ‘왕 중 왕’의 왕자들이요 공주들이었으니 마땅히 이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공산주의 사회는 아예 제도적, 정치적으로 계급이 결정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그와 반면에 민주주의 사회는 자유경쟁과 개인의 노력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그런 기회가 부여되어 있는 사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국인 교회는 이런 최고 상류사회 인사, 아니 최고 로열패밀리(royal family)의 왕족이 되는 특권이 그냥 공짜로 주어진 사회인 것입니다.

  그런 영적 특권층이 된 것을 “자랑하라”고 했는데, 이 말은 ‘교만’이 아니라 ‘긍지(pride)’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 그런 부한 위치를 그냥 자각하고 있기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밖으로 자랑스럽게 증거하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양자가 된 권세를 받고 저 천국 영생의 유업을 받았다는 신자라면, 당연히 이런 사실을 두고 세상 앞에서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자랑할 수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가난하다든지 지위가 낮다든지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좋을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예수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만큼은 이것이 오히려 큰 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낮고 가난하면 할수록 자신이 누리고 있는 영적 높음이 더욱 감사스럽게 여겨지고 그런 내세의 부요함이 더욱 복스럽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사람이 있는 표를 내는 것은 교만한 자랑이 되지만, 없는 사람이 없는 것을 불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가 받은 많은 축복을 자랑할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고고한 모습이 됩니다.
  세상 사람이 볼 때에는 아무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성도가 “내 맘 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도 앗아갈 수 없네 / 주님은 내 맘에 구주 되시었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라고 뜨겁게 찬송할 때,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부하고 높은 생을 살아가는 성도의 자랑스러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될 때에도 주님께서 “네게 있는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적 은혜들, 하나님의 양자된 지위와 영생 유업의 상속자된 축복을 자랑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야고보서의 전체 주제는 ‘신행일치’입니다.
  즉 신앙은 생활과 완전히 일치될 때에만 그 의미와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배우고 믿게 된 신앙은 이제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써먹혀져야만 아름답게 영글게 됩니다.
  놀랍게도 그런 기회란, 우리에게 무슨 좋은 일이 생길 때보다는 오히려 궂은 일, 나쁜 일처럼 보이는 일이 생길 때에 있는 것이라고 성령님께서는 야고보서의 벽두에서부터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시험에 빠질 때, 지혜가 부족할 때, 돈도 지위도 없는 낮은 인생을 살 때, 그 때가 오히려 진짜 신앙의 축복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우리에게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영적 ‘전화위복’의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 많은 세상을 살면서 시험을 받지 않는 인생은 신자라고 해서 한 명도 예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인생고에 시달리고 이리저리 세파에 부딪힐 때야말로 저와 여러분이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하고 더욱 신앙생활에 정진할 수 있는 호기입니다.
  또 우리 중에 누가 하나님께 물어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똑똑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에서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들이 연이어질 때야말로 오히려 꿇어 엎드려 기도함으로써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또한 우리 경향교회는 서울에서는 그리 부자 동네라고는 할 수 없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가난한다는 이 사실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이처럼 부요하고 높은 자가 된 은혜를 인하여 감격의 예배와 뜨거운 전도를 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우리 모두는 다 이 ‘화(禍)’처럼 보이는 것들을 ‘복(福)’으로 바꾸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영혼이 먼저 잘되어야 범사가 형통하게’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나오고 나서도 내 인생에 나쁜 일만 생겨서 신앙생활 못하겠다고 짜증내는 못나고 무례한 자녀가 되지 말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을 확실히 믿고서, 전화위복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아예 ‘화즉복’(禍卽福: 재화도 곧 복이다)의 체험까지 누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 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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