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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기뻐하는 금식 (마 6: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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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기도문 강해를 마쳤습니다. 오늘 본문은 용서에 대한 말씀과 금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용서의 말씀은 주기도문의 보충으로 덧붙인 것입니다. 이 용서는 두 번째 우리 청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죄 용서 청원은 이웃의 죄를 먼저 용서한 자라야 하나님께 죄 용서를 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상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상해있으면 병이 됩니다. 마음의 병은 치료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술을 할 수도 없고, 약도 없습니다. 약이라고 해야 신경을 무디게 해주는 정도입니다. 일시적인 진정 효과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정신적인 병은 자기가 당한 일에 대해서 분한 마음을 풀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과 상황에 대해서 이해하고 용서해야 치료됩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치료제입니다.
용서는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좁으면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종교는 마음을 수양해서 마음을 넓히도록 도와줍니다. 종교생활의 장점은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주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마음 수양에 도움을 주는 그 이상입니다. 명상이나 호흡법 등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 용서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죄 용서가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이 죄의 사슬에서 해방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제사를 통해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 값으로 죄 값을 치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제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로 내 죄 값을 치렀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위대한 하나님의 죄 용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았다는 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내 죄가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남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 용서는 하나님만의 권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 용서를 선포하셨을 때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죄 용서의 권한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21-23>

성령님은 우리 마음의 옹졸함을 넓혀주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모시면 뉘 죄든지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가 이루어지면 꼬이고 얽힌 관계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평강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파송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서 뉘 죄든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평강과 성령과 용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죄 용서를 위해 파송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역에 평강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직 내 마음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남아 있습니까?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받고 그 죄를 놔두지 말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말씀은 금식입니다. 이 금식에 대한 교훈은 6 장의 커다란 세 가지 주제와 연결됩니다. 은밀하게 할 세 가지 영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금식도 구제와 기도와 마찬가지로 은밀하게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금식할 때 표를 내면서 했습니다. 일부러 얼굴을 흉하게 하고 힘든 척을 합니다.
금식은 종교생활에서 금욕이나 고행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금식 하는 것이 무슨 수도 생활하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사람들에게 깊은 신앙심을 나타내는 좋은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권장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할 때 금식하셨습니다. 그러나 금식에는 주의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금식 가운데 하나가 영웅주의입니다.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금식을 투쟁의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가끔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삭발을 하고 단식투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협상에 실패하면 파업을 강행합니다. 그리고 간부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결연하게 단식투쟁에 들어갑니다.

금식은 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을 수단으로 투쟁을 하는 것은 정말 극단적인 방법입니다. 상대에게 나 죽으니 불쌍히 여겨 져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약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의 방법입니다.
금식 기도도 그런 심정으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기도 제목을 내놓고 들어주실 때까지 금식을 합니다. 이것은 금식을 무기로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것입니다. 나 죽어가니 하나님이 빨리 응답하셔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오직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이처럼 조르는 것입니다. 금식을 자기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 기도 제목을 놓고 금식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에스더가 민족의 위기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왕께 나아갑니다. 그 때 금식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서 온 민족이 엎드려 기도할 때 금식했습니다. 이런 진지한 기도의 자세는 하나님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금식하는 것은 정말 삼가야 합니다.

또 하나의 잘못된 금식은 미용을 위한 것입니다. 일종의 다이어트 효과를 보고 밥을 굶는 것입니다. 이것은 금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굶식입니다.

또 금식할 때 주의할 점은 금식 기간을 미리 정해 놓고 하는 경우입니다. 금식을 시작할 때는 일정한 기간을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먹고 싶은 유혹도 이길 수 있고, 성취감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정한 기간이 올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중에는 기력이 떨어져서 기도할 여력도 없어졌는데, 오직 기간을 채우기 위해서 굶은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면 이 금식은 오로지 신기록 도전일 뿐입니다.

고집을 부리면서 이것을 하나님과의 약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기간을 채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어 가는데 약속한 것을 지키라고 하시겠습니까?

40 일 금식을 하다가 그만 목숨을 잃는 분들이 있습니다. 금식하다가 그렇게 죽으면 순교라고 위안을 삼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무지에서 온 안타까운 죽음일 뿐입니다.

시작할 때는 40일을 하리라 마음먹었어도 한계가 오면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금식은 체력이 받쳐주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도가 있습니다. 어느 기간이 지나면 배고프지도 않고 힘이 들지도 않습니다. 3-4 일에 고비가 한 번 오고, 10 일을 넘기면 또 한 번의 고비가 옵니다. 그리고 20 일을 넘기면서 또 고비가 옵니다.

어떤 경우 하루에 한 끼씩 금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약한 금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출근을 서두르면서 아침을 거릅니다. 기도를 위해서 하루에 한 끼 굶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금식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는 부족합니다.

어느 권사님이 친구를 전도하기 위해서 아침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삼십 년이 지났지만 그 친구는 아직도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 권사님은 여전히 아침을 금식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되면 그 금식은 하나님과 줄다리기를 하는 고집입니다. 또 아침을 건너뛰기 때문에 점심은 폭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건강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아침 금식을 중단하는 게 좋겠다고 충고해 드렸습니다. 친구를 위한 기도는 여전히 하되 아침 금식과 연관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금식은 세상의 번잡함을 줄이고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먹고 치우는 것은 세상살이 가운데 가장 번잡한 일입니다. 그것을 생략하면 삶이 단순해집니다.

육의 양식을 줄이면서 영의 양식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기운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 힘과 능력을 내려놓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교만함을 다 내려놓고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려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래서 금식할 때는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가능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그 분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금식하는 기간은 하나님 앞에 나의 영적인 상태를 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처방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에게 나의 증세를 다 이야기해야 하듯이, 하나님께 나의 영적인 상태와 문제를 쏟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죄악을 토로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금식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죽은 자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죽은 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사야 58 장 말씀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6-7>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밥을 굶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형식에 매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금식하는 기간에 이웃의 멍에를 벗겨주는 일에 앞장서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금식하면 그 만큼 내가 먹을 양식이 남습니다. 그 남은 양식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배고파봐야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금식한 후에는 절약한 양식만큼, 혹은 그 이상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먹을 것 걱정을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한 끼도 굶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금식하라고 하면 큰 걱정거리로 여깁니다. 오늘 같은 설교를 들으면 목사님 우리보고 금식하라고 그러신다 하면서 걱정하며 듣습니다.

금식기도 체험이 없는 분들은 한번 결심하고 금식해보시기 바랍니다. 굶어보는 것 막상 해보면 좋습니다. 소화계통의 장기들이 쉬기 때문에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아직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나라가 많습니다. 금식하지 않고도 구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금식하면서 모은 양식을 가지고 구제하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데 못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금식할 때는 물을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물까지 끊는 것을 단식이라고 합니다. 이 단식은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금식 후에 후유증이 남습니다. 양치질을 자주해야 냄새를 예방합니다. 갑자기 금식을 시작하기 보다는 예비 금식을 해서 몸이 적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금식하는 기간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밥까지 굶어가면서 기도했는데 은혜가 없으면 굶은 것이 억울하지 않습니까? 금식 기도는 우리가 영적으로 강건해지는데 큰 힘이 됩니다.

금식기도를 통해서 영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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