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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이기는 방법(시 119:8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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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 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그들이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

무신론자 볼테에르는 “행복은 꿈에 지나지 않고, 고통은 현실이다.” 고 하였고, 유명한 인도의 무저항주의자 '간디'는 말했습니다. “고난이란 인류의 표지(標識)이다. 이는 영원의 법칙이다. 어머니는 그녀의 아이가 잘 살 수 있게 끔 하기 위하여 고난을 겪는다. 밀이 자란다는 것은 씨앗이 죽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고난의 불길을 거쳐서 정회됨이 없이 일어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존재에 대해서 불가결한 근원인 고난의 법칙을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인류 역사는 고난의 과정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피하고 싶어 하는 고난이지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생 문제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주제 중의 하나가 각 자의 삶 속에 내재해 있는 고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만나는 고난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고, 역경을 돌파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리고 비슷한 종류의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능력이나 인격이나 성품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에 다루기가 힘이 들고, 해결 방법의 제시가 있다고 할지라도 같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저 유명한 G. 오웰도 “고난 앞에는 영웅도 없다.”고 는 말을 남겼습니다.

고난의 원인은 자연적은 재해로, 죄로 인한 죄 값으로, 하나님의 징계의 한 방편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훈련하시고, 연단하셔서 더 귀하게 쓰시려고, 허락하셔서 찾아오는 고난이기에 인생은 숨쉬는 동안은 강약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고난을 벗어던질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어떤 사람인들 고난을 기뻐하고, 좋아하겠으며, 이러한 고난들이 형태가 다르게 시시각각으로 찾아오는데 누구라서 피할 수 있겠으며, 인생이라면 어떻게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 고난을  당하지 않고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고, 감당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인생이 달라집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모양과 형편은 제각기 달라도 아픈 고난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난의 문제를 나의 삶과 내 생활에서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을 통해 자신이 당한 고난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데 먼저 그는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자신의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 라고 까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기록한 시편 기자만 고난을 당하겠습니까? 아니지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여러분 모두가 다 고난의 주인공들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의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를 살피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는 귀한 시간이 되어 고난을 극복하고 이기며, 역경을 돌파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지혜를 얻어 가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 인생에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합니다.(81절)

시편 기자는 “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라고 낭에서 구원받기를 바랐습니다.

욥은 욥기서 5: 7절에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고백합니다.

인류의 역사란 눈물의 역사요. 피로 얼룩진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창조 본연의 법칙은 아니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 하신 에덴의 세계와 무죄 세계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고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지음 받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지음 받은 창조 세계의 절정인 아담과 하와는 영생하는 피조물로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선지자요,  하나님께 영광을 바치는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고 만물에게 고통이 시작된 것은 아담의 범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의 범죄와 함께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두려움의 고통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범죄 한 이후에 하나님의 공의(公義) 는 남자 아담에게 땀 흘리는 수고의 고통이 주어졌고, 여자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땅은 인류가 범한 죄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인생은 필경 죽음의 고통을 만나게 되고, 흙으로 돌아가는 고통을 알게 되었습니다(창3:14-19).

그 이후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그의 자손들은 해골을 축석(築石)으로 성벽을 삼았습니다. 피로 물젖어 버린 왕관과 보좌들을 주고받았습니다. 탄식 없이는 예술을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비가 자식의 무덤을 파지 않은 사람이나, 자식이 부모의 무덤을 파지 않은 인생이 없었습니다. 서로 찌르고, 서로 죽이는 피의 언덕 위에서 상아궁을 짓고, 서로가 흘린 피의 호숫가에서 노래를 부르고, 서로가 파고 묻은 무덤 앞에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조차 모르고, 또 누구를 위하여 자신이 생존하며, 역사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그 의미와 목적조차 모르고,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미래를 향하여 절망의 용맹을 발하면서, 소리들을 치고, 뛰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길고 긴 고난의 여정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때로는 원치 않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말입니다. 그럴 때에 많은 사람들이 고민에 빠지기도 하고 또는 아예 신앙생활을 접고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도 혹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어려움과 역경은 물러간다. 질병은 고침 받는다. 교회 나오면 행복해 진다. 시련과 고난이 싹 물러가고 또 풀기 어려운 문제도 당장 해결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회에 등록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의 출발을 하였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오히려 이런 저런 어려움이 찾아오는 그야말로 고통과 역경은 더욱 커가는 것 같고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시련과 고난이 물러가고 또 풀기 어려운 문제도 당장 해결되는 때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날마다 우리에게 나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가정이나 사업에도 환난과 시련 그리고 역경이 따른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있어야지 합니다. 만일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면 에이, 예수 믿어도 별 수 없네 하면서 실족의 길로 갑니다.

이 때 우리는 고난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은 예수 믿기 전에 내가 뿌린 것을 신앙 생활하는 지금 거두는 것도 있고, 예수님을 믿지만 아직까지 거듭나지 못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시거나 미래에 나를 더욱 귀하게 쓰시려고 훈련하는 기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자든 불신자든 막론하고 죄 값으로 찾아오는 고난은 우리 곁에 항상 머물고 있는 친구임을 늘 기억하고 사십시오. 왜냐면 욥기를 통한 고난의 설명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난은 우리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는 필연적인 친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즉 이 세상을 고난이나 고통 없이 살아간 인생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고난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고난은 늘 우리의 인생 길목을 가로막고 서서 힘들게 합니다. 이 땅에 태어난 어떤 사람이라도 고난에서만은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성도의 올바른 고난에 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욥기 5: 7절처럼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면 그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목적도 반드시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당하는 고난을 놓고 누구누구 때문에 찾아온 것으로 핑계를 대거나 그 까닭을 남에게 돌리면서 그 사람을 원망하거나, 혹은 운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하여 운수 타령을 하는데 이러한 발상들은 참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을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그 목적도 바로 알아서 고난을 주신 그분의 목적대로 우리의 신앙 인격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사야 45: 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모든 희로애락과 또한 환경을 조성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해되지 않는 고난은 있어도 이유 없는 고난은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분의 목적에 부합되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고난 속에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따라합시다.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선한 계획이 있는 줄 믿습니다. 이 고난이 나에게 유익이 될 줄 믿습니다.” 이런 자세로 살아갈 수 있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2.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방법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고난으로 좌절하거나 원망하거나 인생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고난의 돌파구를 말씀으로 찾아야 합니다.


본문 83절에 “내가 연기 중의 가죽 병 같이 되었으나 오히려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 하나이다. 87절에 “저희가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라고 시편기자는 말씀합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항상 그 시대의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여기 연기 중의 가죽 병 같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하기엔 대단히 난해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83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 3천 년 전의 이스라엘의 문화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유리병이나 도자기 같은 용기들이 없었던 때입니다.

대부분이 사막이다 보니 도자기를 만들 찰흙도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 물을 담는 그릇은 주로 짐승을 잡아 벗겨낸 그 가죽으로 만들어서 사용했었습니다. 가령 짐승의 다리 부분을 벗겨내어 말려서 그 다리 부분을 꼭 묶고 목 부분에 주둥이를 만들어 물을 부으면 병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가죽 물병을 쓰지 않고 부엌에 계속 매달아 놓으면 부엌에서 매일 불을 떼니 연기가 가득하고 그을음이 끼게 됩니다. 그래서 이 가죽병 안에도 연기가 가득 차는데 그 상태로 1~2년 정도 방치하면 가죽 병은 연기에 완전히 절여져서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게 되겠지요.

물을 넣었다가 마시려고 해도 그 연기 냄새가 심해서 물을 도무지 마실 수가 없을 것이고요. 본서의 저자가 자기의 몸을 연기에 절인 가죽병과 같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당면한 육체의 극심한 고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즉 자신의 몸이 너무도 지쳐 있어서 자신이 보기에도 마치 쭈그러든 가죽 주머니처럼 볼품없는 처지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82,84절에서 이렇게 절규를 합니다.

본문 82절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 하니이다.”

본문 84절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국문하시리이까?”라고 한 것입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중에도 예기치 않는 고난과 시련이 다가오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업적으로, 직장 때문에, 가정의 문제로 인하여 남편이나 아내로부터의 고난, 집안사람들로 부터의 고난, 주위의 면식 있는 사람들로부터의 고난, 경제 문제로부터의 고난,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고난, 요사이는 진학이나 진로로 인하여 찾아오는 고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난이 찾아옵니다.

때로는 이러한 고난들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때 우리가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고난의 시간들은 계속됨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 우리는 고민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당하는 고난 중에 육체의 고난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육체의 고난 뒤에는 거의 영적인 고난도 따른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기서 저자의 고난을 한번 짐작해 보아야 합니다. 그의 고난은 육체적 고난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고난까지 당함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82, 84, 85절은 육신의 고난과 영적인 고난을 함께 당하고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본문 85절에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라고 말씀한

“웅덩이를 팠나이다.”의 귀절은 성경은 흔히 의인의 대적을 무고한 희생물을 잡기 위하여 덫을 놓는 사냥꾼에 비유하는데(35:07; 57:06; 렘 18:22) 아마도 저자의 대적은 그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고도로 은밀한 그리고 외관상 합법적인 것으로 보이는 음모를 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영육간의 고난에 처하다 보니 일시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다고 솔직히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제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저는 선을 행하고 저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데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왜 저들을 심판하지 않는 겁니까? 이러한 절규가 비단 본문의 저자만이 하는 질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알고 보면 우리도 수없이 이렇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겠습니까?

시편 118편 83절 본문에서 그 해답을 제시합니다. “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 하나이다.” 그리고 87절에서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합니다.

저자는 원수들로부터의 극심함 핍박의 목적이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말씀으로 인해 자신이 소생한다고 믿음으로 확신하며, 입으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본문 78절에 “나는 주의 법도를 묵상하리이다.” 86절에서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97절에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 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백들을 보면 저자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얼마나 바로 세워져 있었으며, 또 말씀을 붙잡고 생활했던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은 신앙이 언제 견고해졌던 때가 있었습니까? 꾸준하게 변함없는 믿음으로 살았던 때가 언제 입니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진 사람들이며, 비록 경험이 좀 부족하고 열심이 좀 약해도 말씀 위에 뿌리가 내려져 있는 사람은 전혀 흔들리지를 않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시편 119:169~170 절에도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위대한 신앙과 기도가 있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3. 고난을 만날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만인 누구나가 다 공감하는 고난의 인물이라면 아무래도 구약시대의 요셉이나 욥 정도를 떠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욥이라는 인물, 그가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처신을 하였는지 한번 욥의 경험을 물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누가 답할 수 있겠는지 말해 봅시다.

욥기 1:21~22절을 보면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였습니다.

욥의 고난이라면 그는 하루아침에 10명의 자녀를 잃었고, 많은 재산을 다 잃었으며, 건강도 잃고(욥 01~02장) 마지막 보루인 부인도 위로하기는커녕 악담만을 남기고 떠나갔습니다.

욥기 2: 9~10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 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 하니라.”

고난의 인생 하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도 이제는 나름대로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자기에게는 큰 고난의 순간이겠지만 남이 볼 때는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난 자신이 당하면 그 때서야 고백합니다. 진짜 몰랐다고 말입니다.

육사교회에 군목 박기영목사님께 시무합니다. 그 분이 갑자기 입과 눈이 돌아갔습니다. 풍이 아니라 귀를 통해 감영된 세균에 의해 그런일이 생긴 것입니다. 자신은 병원에 가서 신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 었지만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답니다. 그래서 오히려 병원에 입원한 후에야 환자들의 고통을 직법 체험하니 이제는 신자들이 병원에 있다면 저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반드시 가슴으로 심방해야 겠다고 다집하며, 자신을 살피는 기회가 되어 졌답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제일 먼저 원망부터 합니다. 욥은 원망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주로 어떤 사람들이 원망을 잘 합니까?

민수기 11: 4절에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출 12:38)라고 한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섞여 사는 무리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여인과 애굽 남자가 통혼하여 살았던 사람들과 각색 국적을 가진 자들이 당시 애굽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강압적 건축 노역에 얽매여 있다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함께 따라 나온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잡다한 족속들은 선민의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원방과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조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주관을 버리고 남의 불평에 잘 감염되는 사람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전혀 않던 사람이 남의 불평과 원망을 들으면서 어느새 그것을 내 것으로 삼고 맙니다. 원래 불평과 원망은 전염성이 강해서 듣다보면 웬만한 사람은 다 감염되게 됨을 잘 아시지요?

불평과 원망은 내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을뿐더러 항상 마귀가 가져다주는 신앙생활의 독소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원망은 마귀의 징검다리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사람을 미혹할 때 터무니없는 말로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다 가감을 하여 비슷한 말로 미혹 하는 줄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악 영향을 끼치는 말들은 되도록이면 듣지 않도록 힘씀이 내게 복이 됩니다.

베드로의 위한다는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라고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어느새 그 불평, 원망의 말이 내 마음에 와 자리를 잡게 되며, 그 말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동조를 하게 되는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는 서서히 상실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누구와 대화를 합니까? 어떤 대화를 하더라도 말을 들을 때는 상대가 이 말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믿음으로 하는 말인가?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상대의 인격이나 신앙을 깨뜨리려고 하는 말인가? 혹 공동체를 해치려고 하는 말인가? 그 사람이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가? 악한 의도로 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선한 의도로 하는 것은 아닌지를 진단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총명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총명이 흐려지지 않도록 신령한 지혜를 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미스바교회 성도 여러분! 이미 만난 고난이라면 받아들이시고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의미한 고난을 허락하시지를 않으며 오히려 고난을 통하여서 우리의 불신을 깨뜨리기 위한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 가운데 뿌려서 신앙생활에 풍성하게 열매 맺고 더욱 하나님 앞에 일꾼으로 세움 받기 위하여 마음 밭을 정리하시는 작업이 고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선민 이스라엘도 고난의 역사였습니다만 이 땅을 살아가는 한 민족과 교회도 고난의 역사를 엮어 가고 있습니다. 해방된 지 5년을 맞은 이 땅에는 6.25 사변(1950. 6.25)이 일어났습니다. 유물론적 공산주의로 무장한 북한의 김일성 집단이 자유민주주의를 국시(國是)로 삼은 남한을 침략하였습니다.

그 결과 3만 명 이상??이 땅의 청춘들이 죽음을 만났습니다. 1만 명 이상의 병사들은 실종이 되었습니다. 12만이 넘는 상이군인이 생겨났습니다. 민간인 23만이 전쟁 때문에 희생 제물이 되었습니다. 22만이 넘는 민간인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29만 명이 지금도 행방을 찾을 길 없는 소위 실종자의 명부에 올랐습니다. 59만 4천여 동의 가옥이 소실 내지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장로교 계통에만도 180여명의 교역자가 순교 내지 실종되었습니다. 300여동의 예배당이 불에 타 버렸고, 800여동의 예배당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한 문화유산의 손실, 이산가족의 비극, 경제의 도탄, 사회와 정치적 혼란, 교육의 불안 그리고 이 땅에 수많은 고아, 전쟁미망인 등의 눈물이 강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정말 형용할 길이 없는, 그야말로 비극과 절망을 우리는 당했습니다. 우리는 그 아프고 또 쓰라린 고난의 정글 지대를 지난 온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더러는 고난당하는 문제를 놓고 믿음과 결부시켜 이야기를 합니다. 믿음이 좋으면 고난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 고난당하는 것 보니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나 봐 라고 한다든지, 교통사고 난 것 같다고 한다든지, 병에 걸린 것 봐 라고 한다든지, 사업이 망하잖아, 하나님이 치시는 거야 등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정말 잘못 된 생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합니까? 오늘 본문은 믿음이 좋은 사람도 고난을 얼마든지 당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생활은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가는 안락한 생활이 아니라 힘들게 올라가는 등산과도 같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닥쳐온 고난을 믿음으로 능히 감당해 내시기 바랍니다.

약 1: 2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벧전 1: 7 절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을 통해 원망보다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심으로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시고, 고난보다 더욱 능력이 크신 그 하나님으로 인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귀한 복을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복 빌어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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