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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시는 예수님 (요 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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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 호오돈이라는 작가가 쓴 주홍글씨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의 여주인공의 이름은 미모의 여인 헤스터 프린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강요로 돈이 많고 나이도 많은 의사 칠링워드와 결혼하여 남편의 권유로 먼저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와 보스턴의 한 작은 마을에 정착합니다.곧 뒤따라오겠다던 남편이 세월이 꽤 흘러도 오지 않자 헤스터는 남편이 죽은 줄로 생각하고 마을의 목사인 아서 딤스데일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맙니다.

그리고 딸 펄을 낳습니다.남편이 없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이 조그만 마을에 금새 퍼지고,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라고 판단한 동네 주민들이 헤스터를 감금하고 엄격한 재판을 합니다.하지만 헤스터는 끝내 불륜의 상대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습니다.그러자 그 재판은 헤스터에게 딸을 안고 3시간 동안 교수대 위에서 만인의 구경거리가 된 뒤 주홍색의 'A'자를 가슴에 달고 다니라고 판결을 내립니다. 'A'는 '간통'을 의미하는 영어'Adultery'의 머리글자로, 나는 간통한 여자라는 것을 온 동네방네에 알리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간음죄로 몰린 헤스터는 판결대로 'A'자를 달고 당당히 그 마을에서 살아갑니다.그로부터 7년 뒤, 헤스터가 교수대에 섰던 바로 그 자리에 선 딤스데일 목사는 마을 축제를 시작하는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마친 딤스데일 목사는 갑자기 헤스터와 그녀의 딸을 부르며 바로 자신이 그 상대라고 외치곤 양심의 가책 속에 살아온 자신의 죄를 고백한 뒤 숨을 거둡니다.이 소설은 청교도적인 신앙이 가치를 이루는 당시 미국 사회의 허상을 꼬집는 소설이었습니다. 실상은 간음하는 여인보다 더 위선적인 죄악의 삶을 살면서도 남의 죄를 쉽게 정죄하는 당시의 사람들의 이중성을 꼬집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남의 죄를 바라보고 정죄하기는 정말 쉽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을 보면 정죄는 잘 하고 파해치는 잘 합니다. 그러나 정말 문제는 우리 자신의 위선과 죄악들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오늘 본문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오면서 시작이 됩니다. 여기 소개되는 유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을 의롭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 간음한 여인을 이용하여 질문하였습니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해서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또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율법도 완성하고 죄인들도 사랑하는 상반되는 문제를 과연 어떻게 풀 것인가를 겨냥하여 교묘한 상황을 만들어서 예수님을 질문한 것입니다.

여기서의 쟁점은 '이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죄인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이 문제야말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장 증명해 내고 싶어하는 주제입니다.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여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간음한 이 여인을 우리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용서를 실천하셨습니까?

1. 용서는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6절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합니다.
8절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합니다.
여기 주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의 문제를 대하시면서 두 번씩이나 땅에 글씨를 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글을 쓰신 사건이 이것까지 세번 나옵니다.
먼저, 단5:25절에 "메네메네 데겔 우르바신"이라고 하나님이 직접 벽에 쓰셨던 글자는 '왕이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부족함이 증명되었다"는 뜻으로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것보다 더 유명한 사건운 '십계명'입니다. 돌판 두개에 쓴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써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땅에다 그 글을 쓰고 계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땅에 글을 쓰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 주님의  행동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2번 땅에 글을 쓰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요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 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풀어 가르치는 선생들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데 앞장 선 당시의 성경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땅에 엎드리어 글씨를 쓰셨습니다.
이 행동은 유대인들이 잘 아는 과거 율법과 관련한 사건을 염두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6절에 한번 땅에 글을 쓰시고 7절에서 말씀을 하시고 다시 8절에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과거 율법을 만드실 때 거기에 참여하셨습니다.과거에 율법인 십계명 돌판을 만드실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 일에 참여하셨다는 뜻이 됩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아시고 그 율법의 의미를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땅에 글씨를 쓰시면서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율법의 특징이 바로 공의입니다. 예수님 땅에 쓰심으로 지금 공의를 묻고 계십니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여기 '죄 없는 자가 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해 심판은 너희들의 소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단서가 주님께서는 죄값을 치르는 문제를 풀지 않고  그냥 덮어 두어야 된다는 뜻이 아니라, 반드시 그 값이 치루어 져야 되겠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문제이지 너희들의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2번째 손가락으로 다시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주님께서 2번 땅에 글씨를 쓰시고 그 중간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율법을 만드신 우리 주님께서 지금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간음하지 말라는 이 율법을 받으시던 그 상황을 한번 우리가 생각하여보시기를 바랍니다.

출32장을 보시면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올라간 지가  40일인데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으로 섬기며 날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판을 들고 내려온 모세는 이 광경을 보고 첫 번째 돌판을 어떻게 했습니까? 출32:15-19;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 저 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여호수아가 백성의 떠듦을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모세가 가로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범법이란? 하나만 범해도 다 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 중에 하나만 범해도 다 범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돌판은, 제시하기도 전에 깨버렸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34:1절에 가서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깍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 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그래서 두번째 돌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돌판이 법궤 속에  보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 십계명을 기록한 돌판이 깨어졌어야 하는 것만큼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우리의 상태를 잘 설명하는 것도 없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첫 번째 돌판을 깨뜨릴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무었 때문에  두 번째 돌판을만들어 주어야 했습니까? 첫 번째 돌판은 그들에게 알려 주기도 전에 이미  범법 했으므로 깨뜨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상태의 사람들에게  두 번째 돌
판을 다시 써주신 이유가 무었이겠습니까?  비록 인간은 죄로 인해서 율법을 어길지라도 하나님은 공의를 양보하거나 꺽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어떤 공의입니까?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공의대로 심판하신다면 십계명을 받는 순간 다 심판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라엘이 율법을 범하고 범죄했지만 두 번째 십계명을 주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비판하지 않고 용서받은 그 유대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지금 지금 예수님 앞에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유대인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2번씩 땅에 글을 쓰시면서 지금 유대인들엑 그 점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심판을 피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바로 중보자 모세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 사이에서 중보의 역활을 하였던 모세처럼 우리 주님처럼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여기 모세처럼 중보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자기들의 죄를 모르고 오히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먼저 내가 누군인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간음한 여인 앞에서 유대인들이 율법 앞에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돌아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을 향해 정죄를 멈추고하지 말고 비판을 멈추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율법대로면 내가 바로 범죄자요 내가 먼저 심판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판단하시면 우리는 아무도 심판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여기 형제 속에 작은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잇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여기 들보가 바로 원어에 보면 석가래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큰 허물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다 우리는 허물과 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바라볼때 먼저 정죄하지 말고 먼저 비판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싶은 일이 있을때 먼저 멈추어서 나를 다시한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용서받은 나 먼저 은혜받은 나를 바라보시면서 이제 내가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2.예수님은 양심이 가책되게 용서하셨습니다.

9절에 보면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도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여기 간음한 여인을 공격하던 유대인들이 양심을 가책을 받았습니다. 어른들도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젊은 청년들도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정죄하던 모든 사람들이 양심의가책을 받아 모두 물러갔습니다.그리고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만 그 자리에 남게 되었습니다.여러분 그 자리에서 가장 양심의 가책을 가장 받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저는 간음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양심이 회복될 수 있습니까? 간음한 양심,남을 정죄하는 양심,죽은 양심이 살아날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간음한 여인의 양심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정죄하는 사람들의 양심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왜 복음입니까?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고 병든 마음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양심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양심은 다시 회복될 수있습니다. 양심은 다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양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하나님 앞에 나올때 우리의 양심이 살 수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원어를 분석하여 보면 재미있습니다.
한자어로는 어질양자에 마음심자를 씁니다. 그러나 희랍어로는 두단어가 합성햇는데 하나는 “무엇무엇과 함께”라는 단어이고 다음은 “안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과 더불어 안다”라는 의미입니다. 본래 우리 양심은 하나님을 알도록 느끼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양심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은 그 양심이 화인맞아 죽어 있습니다. 그런에 그 양심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언제 내 양심이 살아날까요?
그것은 정죄받을 때가 아닙니다. 그것은 비난받을때가 아닙니다.그 때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때입니다. 양심이 살아날때에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때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정죄하던 유대사람들이 주님 앞에서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간음하는 여인을 우리 주님께서 사랑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그녀의 마음에 양심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을 볼때 그 죄만 보지 말고 그 죄을 돌이키고 새롭게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 사람에게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주어질때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먼저 가져야 할 것은 은혜요 사랑입니다.은혜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사랑이 머무는 곳에 양심이 회복됩니다.먼저 잘못된 우리의 이웃들에게 미워하는 어떤 사람들에게 먼저 은혜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사랑으로 다가서시기를 바랍니다.

예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화 중에 이런 내용의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나이가 아주 두툼한 외투를 입고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심굴궂은 바람이 태양에게 내기를 제의했습니다. “누가 저 사나이의 옷을 벗길 수 있을까? ”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과 태양이 내기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셀 수록 그 사나이는 옷을 움켜잡고 끝까지 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태양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려고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태양이 쨍쨍 빛을 발사하자 얼마있지 않아 사나이는 스스로 옷을 벗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닫힌 마음을 열게합니다. 은혜만이 굳은 마음을 열게 합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깨닫고 돌이키는 사람이 될 수록 우리가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다시는 죄를 범치 말고 새삶을 사는 기회를 위해 용서해주셨습니다.

11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정죄로부터 용서하여 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었습니니다. 그 기회는 다시 간음죄를 짓지 않고 말씀대로 삶을 사는 기회입니다. 이 여인의 나중에 삶이 어떻게 되엇을까?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았던 많은 여인들 중 어쩌면 이 여인도 끼여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주님은 다시 삶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난 주님의 사람으로서 이제는 육체를 따라 살지 말고 새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말세에 일어날 수 있는 대표적인 일이 바로 육체를 따라 쾌락을 좇고 간음하는 범죄를 행할 것입니다. 그러데 문제는 이것이 불신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미 성경에도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간음의 죄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뿐 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고린도교회가 대표적으로 간음과 같은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교회 속에서도 교회지도자 중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교단 총회의 총회장이고 서울의 대형교회의 담임목사이며 유명한 부흥사이던 50대초반의 목사님이 졸지에 모텔에서 추락사당하는 비극이 있었습니다. 이유을 알고 보았더니 교회 여집사님과 불륜의 시간을 갖던중에 현장을 남편과 경찰이 급습하자 모텔 베란다 창틀을 붙들고 있다가 지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알려진 예이고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 않는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교인들 간에도 이런 음행의 문제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순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몸을 순결하게 간직하여서 하나님께 구별된 몸으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원하십니다.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여자가 서로 성적으로 결합할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간음의 죄를 엄격하게 다룹니다. 신약에서도 간음의 죄를 엄격하게 다룹니다.10계명에서도 간음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간음한 여인이 다시 범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과거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오늘 나의 과거 나의 어두운 과거의 죄를 예수님이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내가 지은 어떤 죄일지라도 우리 주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다시 삶이 기회를 주십니다.
어떻게 용서하여 주십니까?십자가 앞에 나올때 보혈의 공로를 의지할 때 값없이 용서하여 주셧습니다. 여러분 내 과거가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안에서 주님의 보혈로 용서받으셧음을 믿으시기 축원합니다.
종종 주님이 나를 용서하여 주셔도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의 감정 때문에 나의 완전주의 성격 때문에 쉽게 용서가 마음에 허락되지 않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나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다시는 죄의 기회를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의 죄성과 욕심이 우리로 범죄하도록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죄의 자리에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간음하지 않고 우리의 성적인 범죄를 짓지 않고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합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성의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은 자손을 생육하고 번성시키려는 생식을 목적으로 하나님이 주셨습니다.이것은 결혼의 언약을 전제로 부부의 결합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전제가 없이 만약에 성을 즐기려고 하는 목적으로만 이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을 통하여 아담으로 하여금 그 배필인 하와를 보고 ‘이는 내뼈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이라“고 노래하기 위한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성의 두 번째 목적은 바로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성을 통해서 부부간에 기쁨을 얻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아닌 성의 기쁨을 죄악입니다.
그리고 성은 남성과 여성이 신체적으로 한몸을 이루는 교제를 위한 것입니다. 둘이 한몸을 이루게 하는 데 성이 이용됩니다. 물론 여기서 하나는 신체적인 결합이요 인격적인 결합이요 영적인 결합을 의미합니다.신체의 결합이 있어도 만약에 인격의 결합 영적인 결합이 없으면 하나되는 교제를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체로 만드시고 성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런 육체를 부정하지 않고 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인은 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으로서 성은 인격적으로 사용되어야합니다. 돈에 의해서 매매되거나 부정한 관계에 의해서 되어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부부 안에서 아름다운 인격적인 관계를 기초하여 갖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볼때  철저하게 일부일처제입니다. 성경에서 연합은 한 남자와 한여자와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이지 한 남자와 두여자 혹은 그 이상의 어떤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아닙니다. 여러분 이런 죄에 빠지면 그 죄의 맛 때문에 알게 모르게 자꾸 중독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보면 어거스틴이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저를 이 정욕에서 건져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하면서 동시에 자기 마음 속에더 또 다른 자신이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건져주지 마소서”
여러분 이제 지금 끊어야 합니다. 뒤로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몸을 지키고 하나님이 주신 아내와 남편를 사랑하고 가정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죄는 모양이라고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주님의 거룩한 성전을 성별되게 지키면서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나가는 말))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당신은 용서받은 그리스도이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정죄보다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양심의 죄를 깨닫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백성으로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받게 거룩한 삶으로 우리모두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박 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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