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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름 받은 자와 보냄을 받는 자 (행 22: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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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울린 뇌사 엄마

급성뇌종양으로 뇌사판정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뇌사상태에서 딸을 낳았던 미국의 한 여성이 아기가 태어난 다음날 아침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의료진이 산모의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낸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남편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태어난 아기의 몸무게가 1㎏이 안 되는 미숙아이지만 건강한 상태라고 합니다. USA 투데이는 코네티컷 의료센터의 연구 자료를 인용, “미국에서는 뇌사상태의 산모가 아기를 낳은 경우가 9번 있었지만 암세포가 뇌에 전이된 산모가 낳은 아기가 살아남은 적은 없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뿐 아니라 영국, 캐나다 등 의학이 최고로 발달한 선진 각국에서도 이 경우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산모가 의식을 잃자 의료진은 산모와 태아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충고했지만 남편은 의사의 충고를 거부한 다음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의 병실에서 3개월을 보냈고, 의식이 없는 아내에게 2 살 된 아들의 생활을 말해주고 곧 태어날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내의 생명유지 장치를 떼어내야 한다는 사실은 커다란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아기가 태어나는 날은 바로 우리에게 기쁨과 고통이 교차하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내는 새로 태어나는 생명의 가치를 확신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고 또 다른 생명이 숨지는 교차점에 놓여있던 이이야기는 생명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렵게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부름 받은 생명이 이제 하나님의 귀한 섭리와 계획 속에 보냄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귀한 죽음으로 인해 시작된 생명체입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여기 믿음의 사람으로 존재하기 까지는 누군가의 희생과 섬김과 기도가 있으므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자가 산에서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 사흘을 굶으면서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토끼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숲 속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가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했습니다. "나 좀 살려다오. 내가 죽는다." 그러니까 토끼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나뭇가지 하나를 굴려서 그 곳에 던져주었습니다. 이것을 의지하고 사자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와서는 토끼보고 하는 말이 "내가 몹시 배가 고픈데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그러니 토끼가 깜짝 놀라서 "세상에 이런 의리 없는 짓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당신이 죽을 것을 살려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시비가 벌어졌는데 마침 여우가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보고 자초지종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여우가 지혜를 내었습니다. 사자보고 "사자 왕이여, 이 토끼가 임금님을 구원해주기 전에 어떤 모습으로 있었습니까?" 사자가 함정으로 풍덩 들어가더니 "이렇게 하고 있었지" 그랬습니다. 여우가 "그럼 그냥 그렇게 계십시오" 라고 한 후에 "토끼야 가자"하고 그냥 갔다고 합니다. 자, 어떻습니까?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신의 본래성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도대체 내가 본래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삶의 자유로움은 마음의 선택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가운데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자유로움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내 재물이 많아질수록, 내 지위가 높아질수록, 내 삶의 경륜이 커질수록, 더 큰 자유나 더 높은 자유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가 줄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삶의 자유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환경이나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단순한 마음의 태도이며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어떤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은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들, 현실에 대한 속상한 일들, 사람에 대한 섭섭함들, 병마에 대한 섭섭함들 다 접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아주 힘들게 살거나 아주 복잡하게 사는 사람, 인생에 여러 사람을 흔들어 놓고 있는 사람을 보면“모든 인생은 이래야 된다, 모든 사람이 저래야 된다”는 어리석은 자기 판단이나 어리석은 자기편견의 결과일 뿐입니다. 선택이란 지불할 고통과 극기할 용기가 동시에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는 그것이 항상 나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결과임을 인식하게 된다면 조금은 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내 선택의 결과를 항상 겸손하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안토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 수도사가 인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은 자동차와 같아서 어디로나 갈 수 있다. 높은 곳에도 갈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인생이란 자동차 앞에 누워있어서 때로는 인생이란 자동차에 깔려서 다치기도 하며 자동차에 다친 후 사고 때문이었다고 불평한다."

이 말을 가만히 생각하면 깊은 진리를 깨닫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주어진 자동차를 타고 멀리도 가보고 높은 데도 올라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할 때 참 인생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좁은 공간 속에 함께 머물러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생이란 차 앞에 도리어 누워있습니다. 그저 모두가 편안한데 안주하려고만 하고 좁은 삶의 공간 안에 머무르려 합니다. 그 결과는 서로 치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상대방 과실이라고 책잡기 바쁜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인생이 아닐까요?

이에 반해 참으로 축복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인생이란 자동차를 타고 멀리 떠나가곤 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높은 곳에도 가보고 추운 지방에도 다녀오고 무더운 곳에도 가봅니다. 사막지대에도 가봅니다. 그리고 높은 곳이나, 추운 곳이나, 무더운 곳이나 사막지대, 그 어디서나 하나님의 축복된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참으로 인생을 바르게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인 바울을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기도 중 비몽사몽간에 주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당신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은 좋지만 예루살렘 밖에서도 다들 자기를 아는데 자기의 증언을 들을 리가 없다고 주님께 하소연합니다.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아나이다."

이때 주님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다짜고짜로 명령하십니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이 주님의 명령이 사도바울을 뒤집어 놓았고 온 세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주님의 이 명령을 듣고서 그냥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 어떠했겠습니까? 온 세계를 뒤집기는커녕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에게 붙잡히던지 유대인에게 붙잡혀서 큰 곤혹을 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살해한 살인자라고 비방할 것을 알면서도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납니다. 그는 높은 산, 넓은 들, 사막지대, 깊은 물 어디든지 찾아갑니다. 그리고 곳곳마다 임하시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사도바울이 놀라운 경험을 하고 새 세계를 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떠나간 사람입니다.

인생이란 자동차를 타고 멀리 높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사막으로, 정글 속으로 떠나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고 장엄한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자동차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와 혹은 보낼 때를 동시적으로 아니하시고 기간의 차이를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나서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자기가 핍박하던 그 예수는 핍박받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결심을 주님 앞에서 밝히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서 이방으로 속히 떠나가라고 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바울을 부르시기는 다메섹으로 가는 노중에서 부르신 것은 사실이지만 부르시자 마자 즉시로 이방인의 사도로 보낼 수 없었던 것이 주님의 입장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에는 이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소개한 것처럼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을 떠난 적이 없고 그 성 안에 있는 유명한 율법 학교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열심으로 공부를 해서 성적이든지 또 그 율법대로 사는 모든 행동이 누구에게 빠지지 않을 사람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 자신만만했던 이 사람으로서는 예수님이 볼 때에는 사도의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바울은 저 이방에 사는 사람들을 개 취급 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만 자랐고 엄한 율법의 교육을 받은 것 외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데 사도로 세운다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기 앞서서 먼저 이방의 실상을 알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는 이 순간까지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예수에 관하여 인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마땅히 죽을 자로 알았으니 복음을 전혀 모르는 자였습니다. 그냥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복음의 사람, 복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 한다고 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는 스데반을 비롯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죽일 때 피 묻을까봐 벗어둔 옷을 보관해주는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다메섹으로 가는 길도 복음을 전하러 갔던 길이 아니고 복음의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갔던 사람이니 어떻게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공부를 많이 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 엘리트라고 되는 것도 아니며 복음은 학점만 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름을 받았다고 바로 사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바로 큰 능력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베드로를 비롯한 그들은 대체적으로 율법에 열심이었습니다. 잘 따져보면 베드로도 처음 예수님이 등장할 때에 세례 요한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는데 세례 요한은 율법에 대하여 엄하게 가르쳐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베드로가 율법을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주님께서 그를 어부이던 중에 불러 가지고 바로 종으로 보낸 것이 아닙니다. 삼년 동안 나가지 못하게 하고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바울도 율법에 대하여서는 굉장한 사람이었고, 그 율법대로 살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그가 큰 빛을 보고 한 번 못 보게 되었다가 다시 눈을 떴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유명한 그런 바울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열둘 제자와 못지않은 기간을 가지고 많은 훈련을 받은 후에 오늘날 우리가 위대하다고 하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가 부름을 받았지만 부름 받은 즉시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더 배우고 현지를 파악하고 봉사의 일을 다 마쳤고, 충분한 기간이 흘렀던 것입니다. 남을 섬기는 일을 충분히 한 후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 만났고 또 부름을 받았다고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부름 받은 후에 상당한 기간 동안 본방만 알고 있던 이 바울이 이방을 경험하였고 이방을 다 경험한 후에 성령이 그에게 임하셔서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이 유명한 바울이 되도록 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내륙 선교회 캐서린 밀러의 글

주님의 선택이 더 나았습니다. 나라면 햇빛이 비치는 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장미꽃이 흩뿌린 듯 피어 있고 앞을 가로막는 구름도 없으며 근심의 그림자도 전혀 없는.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해 더 나은 길을 택하셨습니다. /햇빛이나 향내 나는 장미 대신 머리 위에는 구름이, 발밑에는 가시가 있는. /

그래서 비록 발은 베어 아프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깊은 기쁨을 누리고 있으니/ 그건 샤론의 꽃 예수님 때문이랍니다./ 햇빛에 관한 한, 그분의 아름다운 얼굴 자체가 제게는 완전한 햇빛이지요. /나라면 보다 능동적이고 강인하며 지칠 줄 모르는 인생을 택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하는 인생을./ 그러나 주님은 나를 위해 더 나은 인생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자주 수반되는 인생이요 힘이 가장 필요할 때 주어지지 않으며/ 얻는 대신 잃어버려야만 하는 인생이랍니다.

주님은 내게 다른 종류의 일을 주셨는데 /그건 내 생각과 너무 다른 일로 그분이 피 값으로 사신 영혼들을 위해/ 그분과 함께 하나님께 탄원하는 일이랍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그 분이 선택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그분 손에 맡겨 두기만 하면/ 그분은 실수 하나 없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눈이 먼 우리는 절대로 어둡고 험한 길을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절대 발견하지 못하겠지요. /좌절과 곤란과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변함없는 그분에게로 돌아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신실하며 사랑 많으시고 지혜로운 분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는 무엇인가를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아니하든 우리는 지금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 결국 우리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내리는 결정은 결국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바르고 유익하고 성숙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야 합니다.

부름 받는 자의 가치

우리 인간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여러 번 바닥에 떨어지고, 밟히며, 더러워지는 일이 있으며 실패라는 이름으로, 실수라는 이름으로 또는 패배라는 이름으로 겪게 되는 그 아픔들, 그런 아픔을 겪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쓸 모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데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우리 인간이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가치는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겨지고 짓밟혀도 여전히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가치를 부름 받은 우리에게 부여하시고 그리고 사랑하시며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선택에 의해 부름 받은 자로 살아가면서 주님이 진정 원하시고 계획하시고 기뻐하시는 곳으로 보내시려는 뜻에 기꺼이 자원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보냄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 정 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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