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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 노릇한데서 해방되어 (롬 8: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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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름이 오면 꼭 한번 저 자신을 시험해 보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에 가서 레푸팅을 하는 것인데 흔히 사람들이 레푸팅 하면 물이 많은 강원도 어는 강에서 한. 두시간 즐기며 노는 것을 연상합니다마는 제가 하는 레푸팅은 무주에서 양산까지 5시간에서 8시간짜리 레푸팅을 하는 것입니다.

무주에서 보트를 강에 내려놓는 시간부터가 저와의 싸움입니다. 고무보트에 바람을 넣는 일이 보통이 아닙니다. 바람 넣는 펌프를 발로 밟아 그 큰 보트를 세우려면 30분정도가 걸리는데 발에 쥐가 다 납니다. 그때 뭐 하러 이 짖을 하나 하는 생각이 나지요. 바람을 다 넣은 다음에는 보트를 강에 띠우기 위하여 강둑에서 들고 들어가는데 다행히 사람이 3사람쯤 되면 그래도 낳은 편이지만 둘밖에 없을 때는 보통고역이 아닙니다. 무게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강에 띠운다고 그냥 갑니까? 어느 곳은 물이 없어서 보트바닥이 강바닥에 닿으니까? 보트가 움직이질 않아요 그러면 보트를 들고 울퉁불퉁한 강바닥을 내려갑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돌에 까지고 그러다가 강물이 불어난 곳을 만나면 천국을 만난기분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제는 고요한 호수입니다. 여울이 끝나면 호가 생기는데 500미터에서 큰 것은 1키로 정도이지요. 물이 잔잔합니다. 보트가 떠내려가지를 않아요. 그러면 노를 저어야지요. 노를 저어가지고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사람을 녹초로 만들지요 아무리 노를 저어도 끝이 없어요. 사람이 걷는 것보다 더 느리니까? 답답하지요.

그렇게 5시간 이상을 하고나면 수십 번 배를 걷고 싶은 생각이 납니다. 그것을 이기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 기쁨은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은 없는 거예요. 해방되었습니다. 자유입니다. 고통에서 괴로움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보트를 강가에 대고 모래위에 누워 있을 때의 평안함 이대로 죽어도 좋다. 입니다. 레푸팅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인간사가 이렇구나 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희비가 엇갈리고 고난과 평안이 엇갈리고 때로는 편안한 것 같은데 지루하고 영원한 것이 없어요.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을 이기고 나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감동이 찾아옵니다. 영원한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럼으로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긍적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세계관을 세 가지로 나누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허무주의에 바진 세계관입니다. 세상의모든 것이 허무하다. 결혼해보아도 자식을 키워보아도 돈을 벌어보아도 허무하다. 헛되고 헛되어서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는 것이지요. 세상을 어둡게만 봅니다. 요즈음 금강산 구경을 많이 가잖아요. 그 산을 보면서 야 참 아름답다. 산에 올라가면 좋겠다. 하는데 옆에 사람이 산이 뭐 저렇게 생겼냐? 바위만 잔뜩 하고 삐쭉삐쭉해서 고생문이 환하다. 하는 거예요. 같은 것을 보아도 세계관이 다르니까? 이렇게 차이가납니다. 들꽃하나가 피었어요. 야 아름답다 어떻게 여기에 꽃이 필수 있느냐 대단하다. 하고 감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참 외롭다. 너는 어쩌다 이신세세가 되었니. 네 신세나 내 신세나 똑같다 하는 것이지요. 이런 허무감은 절망을 낳고 사람을 한없이 약하게 만들지요.

또 하나는 세상을 낙천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지요. 살다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 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걱정을 안 해요. 지금 먹을 때 거리가 없어도 뭐 어떻게 되겠지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일을 안 해요. 돈 떨어지면 이집 저집 가서 외상을 잔뜩 먹고 돈이나 꾸러 다니고 그리고는 갚지를 않지요. 어떻게 보면 배짱이 좋아요. 고약할 때는 내 배째라 그러고 태평한거요. 이런 사람이 이단에 빠지면 교주가 되어서 며칟날 재림 한다 새 세상이 온다. 그날만 기다리고 앉아 있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믿음으로 가지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세계관이지요. 말씀 안에서 그 근거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 약속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인내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데서 가지는 세계관입니다. 이 천지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 창조하신세상을 다스리심을 믿습니다. 그 섭리 속에 내가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의고백이 나옵니다.

18절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 할 수 없도다” 영광이 크다는 것이지요. 고난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도전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네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떠납니다. 우리말 가운데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갈 바를 모릅니다.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러면 99프로 고생문이 훤하지요. 그가 집 문을 나서는 첫발부터가 고생입니다.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닙니다. 식솔들을 다 끌고 가는 여행입니다. 더욱이 조카까지 따라 붙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도전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가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뿐입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고생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고난 끝에 영광이라는 것이지요. 이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고난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미래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미래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음을 믿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고난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바람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고난을 보면서 죄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바람은 이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함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김 서방도 이서방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사람만 고통을 받는 것이냐 그러지 않아요. 지구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같이 고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식물도 심지어 돌 하나에까지 모두가 바라는 것입니다. 총체적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1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바라는 것은 그냥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히 사모하면서 바라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가는 곳마다 수도가 있고 생수 파는 데가 있고 우물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물이 귀해서 셈으로 물을 길러 가는 것이지요. 날은 지긋지긋하게 덥고 후덥지근 한데다가 바람도 없어요. 논에 두벌메기 풀을 뽑고 있는데 날은 푹푹찌지 벼는 자라서 눈을 찌르지 땀은 비 오듯 하지 온갖 악조건을 다가지고 있는데 물을 먹으려고 나와 보니 주전자에 물이 떨어졌네. 마누라 보고 물 좀 떠와요. 해서 물을 뜨러 갔는데 와야지 저쪽 동네 어귀를 쳐다보면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데 와야지 입은 바짝바짝 마르고 사람은 보이지 않고 와 성질나지요. 이놈의 여편네가 죽었나. 살았나 하지요. 그때의 목마름은 다른 때의 목마름의 열배 스므 배가 넘습니다. 여기바람은 그러한 갈증을 갖고 기다리는 바람입니다.

왜 이렇게 바라는 것입니까?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려는 것입니다. 썩어짐의 종노릇. 죄 아닙니까? 우리가 죄의 종노릇 하고 살지 않습니까? 보세요.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세상은 서로가 돕고 보존해 주고 지켜주고 아껴주는 세상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도 그랬어요. 아담이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했어요. 그런데 죄를 짓고 나서는 저 여자 때문이다. 했어요.

오늘 날 이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집이 불행한 것도 저 여자 때문이요 우리가 망하는 것도 저 여자 때문이요. 자식이 잘못되는 것도 저 여자 때문이요. 우리는 지금 이렇게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개발이라는 이름 앞에 얼마나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연생태계가 다 무너지고 있습니다. 짐승도 식물도 종이 감소되었습니다. 씨가 말랐다는 말입니다. 보세요. 그 흔하던 제비를 볼 수가 없습니다. 까마귀를 볼 수가 없습니다. 종달새 우는 소리를 못 듣습니다.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기독교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 사람들은 겨울에 눈이 하얗게 와서 산 짐승들이 먹을 것이 없어 마을에 내려오면 두터운 보루지나 신문지를 깔고 먹이를 갖다 줍니다. 그리고 멀리서서 산짐승들이 와서 먹는 것을 보고 좋아 합니다. 사람과 짐승들이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눈이 와서 짐승이 마을로 내려 왔다 때는 이대다 하고 때려잡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기진맥진 하다가 혹시나 하고 인가에 내려왔더니 몽둥이로 때려잡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래서 만물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바람이 무엇입니까? 종노릇한데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23절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영혼 구원만이 아닙니다. 몸의 구원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는 그날을 소망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고 사는 사람은 25절의말씀처럼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입니다.

왜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죄에서 해방되는 영광을 맛보는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레푸팅을 다 마치고 같이 레푸팅을 한 목사님 사모님에게 도착 통보를 보냅니다. 그러면 사모님이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가지고 옵니다. 그때 먹는 시원한 물 한 잔 날아 갈 것 같아요. 삼겹살을 구워서 먹는 밥맛은 어떻구요. 꿀맛. 저리가라요. 둘이 먹다 하나죽어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열이 먹다가 아홉이 죽어도 모르는 맛입니다.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장차 아버지 집에서 받는 어떤 것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김 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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