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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나 잘 하세요 (마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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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테이프로 유명한 쓰리엠이란 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는 첨단과학 기업입니다. 이 회사는 직원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실패한 실험도 ‘어딘가는 쓰이겠지’라는 낙천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런 전향적인 생각에서 포스트잇이 나왔습니다.

이 회사의 스펜서 실버라는 과학자는 접착제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너무 강하지 않은 접착제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실패한 접착제를 버릴 뻔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회사의 아트 프라이라는 사람이 그 접착제를 주목했습니다. 그는 악보 위에 무엇을 쓰지 않고 표시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프라이는 실버의 접착제를 종잇조각에 묻혀서 페이지를 표시하는 용도로 썼습니다. 얼마 후 이 접착제를 바른 종잇조각은 단순한 표시 기능 외에 의사를 표시하는 메모지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붙였다 떼었다 하는 메모지 포스트잇이 탄생했습니다. 이 메모지는 현대 책상 위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또 쓰리엠사의 대표적인 상품인 스카치가드도 실수에서 나온 상품입니다. 쓰리엠사는 비행기에서 쓰는 화학약품을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연구원이 이 약품을 실수로 자기 운동화에 쏟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운동화에 묻은 약품이 지워지지도 않았고, 때가 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섬유보호제 스카치가드입니다.

이렇게 우연한 실수가 오히려 역전의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실수가 전화위복이 되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수를 탓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실수를 격려하고 새로운 용기와 힘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7:1부터 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그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비판은 처음에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시작합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합니다. 호되게 지적할 수도 있고 부드럽게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아랫사람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꾸짖고 야단을 칩니다. 윗사람에게는 불평을 하게 됩니다. 동등한 관계의 사람에게는 비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판을 하다가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지적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적을 하다보면 잘못된 것을 넘어서 잘못한 사람을 건드리게 됩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사람을 건드리면 일이 커집니다. 이것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섞인 비판은 관계를 파괴합니다.

부부싸움을 보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불만스러운 일로 시작합니다. 결국 상대방의 인격을 깎아 내립니다. 심지어는 시댁이나 처갓집까지 들먹입니다. 싸움이 점점 커지고 되고 수습이 어려워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헤아림이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잣대를 뜻합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실 때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실까요? 그것은 놀랍게도 내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했던 그 기준입니다. 내가 너그럽게 대했으면 하나님도 나를 너그럽게 대하십니다. 내가 남에게 가혹하게 대했으면 하나님도 나를 엄하게 심판하십니다.

본문의 ‘비판’이란 단어는 심판이란 뜻에 가깝습니다. 더 정확하게 직역한다면 단죄라는 단어가 적합합니다. 즉 세상 종말에 우리를 한 줄로 세워놓고 심판하시는 종말론적 심판입니다.

심판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판단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라야 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람은 판사입니다. 판사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판사가 되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사법고시는 3 차 시험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고시 합격자들은 사법연수원에서 또 몇 년 동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법고시 성적과 사법연수원 성적에 따라서 판사, 검사, 변호사의 길로 나눠집니다. 지원자 가운데 판사는 성적이 상위 10 % 이내에 들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로 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얼마동안은 예비 판사로 법정에서 선배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보고서를 내고 통과가 될 때 비로소 판사 발령을 받게 됩니다.

판사가 되면 법정에는 세 명의 판사가 나섭니다. 가운데 판사가 부장판사입니다. 그리고 좌배석, 우배석 판사가 각각 한 명씩 있습니다. 그 중에 부장판사가 판결문을 작성하고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판사는 법률적 분쟁에서 최종으로 판결을 하는 중대한 임무를 해야 합니다. 재판 중에 판사는 모든 법률과 상황을 검토해서 최종적으로 판결을 합니다. 그래서 판사의 모든 판결은 공정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판사가 한번 내린 판결은 판례로 남아 그 이후의 모든 판결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판사 한 명을 세우는 절차가 이렇게 까다로운 것입니다.

판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죄인임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따라 형벌을 정합니다. 그러니 심판이나 단죄 같은 용어를 쓴다는 것은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일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런 비중으로 읽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함부로 사람의 죄를 정하고 판단합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심판해 버립니다. 그래서 쉽게 마음에 상처를 입힙니다. 한번 긁은 마음의 상처는 여간해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연장자라고 해서, 힘이 세다고 해서, 먼저 왔다고 해서 남을 판단합니까? 사람들은 자기 편하게 판단합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면 악이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선입니다. 이런 잣대로 하는 심판은 폭행입니다.

“너나 잘하세요.” 이 말은 요즘 개봉된 영화에서 여배우가 한 말입니다. 이 말이 올해 개봉된 영화 가운데 최고의 명대사로 뽑혔습니다. 한 영화비평가의 글을 보니까 이 말은 영화감독이 기독교를 향해 날린 펀치라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고생한 주인공이 교도소 철문을 나서면서 내뱉은 첫마디입니다. 감옥살이하는 주인공을 개화하도록 보살펴온 전도사가 두부를 건네자, 두부를 바닥에 버리면서 한 말이 “너나 잘하세요.”입니다. 이중적이고 모순된 사회를 향한 냉소적이고 신랄한 대사입니다. 정말 비평가의 말대로 감독이 기독교의 뒤통수를 친듯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남을 가르치려면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라는 본문의 주님의 메시지와도 통합니다.

3 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내 눈에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뺄 수 없습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려면 먼저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려면 자기 잣대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법률이라는 잣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법률에 따라 판단하는 이는 오직 판사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경찰도 못합니다. 대통령도 못합니다. 세상도 판결이 이렇게 엄격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크리스천인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까? 세상이 법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잣대로 우리도 우리 이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판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용서입니다. 잘못했지만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주기도문의 둘째 우리 청원인 죄 용서 청원을 확대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죄 용서 청원이 무엇입니까? “우리 죄들을 용서해 주소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오늘 본문 7:1 말씀을 다시 봅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남을 비판하지 않으면 나도 비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남을 용서하면 나도 용서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2>

비판이라고 해서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비판의 순기능이 있습니다. 사회에 비판 기능이 없으면 그 사회는 붕괴합니다. 제 대학원 논문 제목이 “비판적 평화교육의 기독교교육 모델 연구”입니다. 비판을 교육적으로 어떻게 잘 활용하는가를 연구한 논문입니다. 비판을 잘 활용하면 사회를 변혁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기독교 공동체의 범주 안에서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3절부터 5 절까지는 형제라는 명칭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 안에서 비판은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비판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 잘못을 지적할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할까요?

일단 무조건 참습니다. 어떤 일이든 양면이 있습니다. 뒤집어보면 칭찬거리가 있습니다. 불행한 일 가운데는 언제나 다행이 있습니다. 그 다행한 것을 크게 보고 불행한 일은 작게 봐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심입니다.

교회에서 큰 상처를 주는 것은 늑대가 아닙니다. 다른 양입니다. 그래서 교인들끼리 서로 조심해야 합니다. 집에서 사회에서 하던 대로 사람을 대하다가 심한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 안에서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요령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유 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과 방법을 주장하다가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제 주장을 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둘째, 현실적인 기대를 하십시오.
비판하면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반면에 이상에 대한 노력 없이 현실에 안주하는 것도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거나 갈등을 하게 되면 교회를 탈출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곧 다시 실망하게 됩니다. 완벽한 교회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교회는 다 나름대로의 약점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다 아십니다. 그래서 그 갈등과 문제를 조정하고 풀어가는 것이 교회가 할 일인 것입니다.

본 훼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동체보다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이다.

셋째, 비판하기보다는 격려하십시오.
다른 지체들이 진정한 믿음에서 한 행동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제 비교하고 비난하는데 보낸 모든 시간을 교제와 연합, 그리고 형제를 격려하는 데 쓰십시다.

넷째, 험담을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험담은 퍼뜨리는 것뿐 아니라 귀담아 들어서도 안 됩니다. 험담에 귀 기울이는 것은 훔친 물건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잠 20:19>
만약 험담을 퍼뜨리는 자가 있다면 그만 하도록 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우리에 대해서도 험담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갈등이 생기면 교회에 알려 해결방법을 찾도록 하십시오.
갈등이 생기면 제삼자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관련된 사람과 개인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도 단 둘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교회 지도자들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알려서 해결방법을 빨리 찾는 것이 성경적 방법입니다.

여섯째, 목사와 지도자들을 지지해주십시오.
완벽한 지도자는 없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킬 책임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언젠가 목회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양들을 얼마나 잘 돌보았는지 계산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얼마나 지도자들에게 순종했는지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 13:17>

본문 마지막 6 절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고,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개나 돼지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은 개를 더 미치게 할 뿐입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바꾸려고 하면 싸움만 일어납니다. 결국 진리는 자기 고집이나 생각을 버리고 변하려는 사람에게 보물이 됩니다. 마음을 닫고 움직이지 않으면 그가 곧 개요 돼지가 되는 것입니다. (황 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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