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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안에서 변화 받은 새 사람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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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로마서 12장 1절로 2절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인들과 어떤 점에서 다르며 또 달라야 하는지를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선민 이스라엘은 대단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상천외한 기적들이 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민은 특권만 누린 것이 아닙니다. 선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서인 레위기 11장 45절에서 이르시기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이란 속된 것으로부터 구별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에 살았던 이방 민족들처럼 살면 안 되었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따라서 살아야 했습니다. 심지어 먹는 음식조차도 정한 식물만 가려서 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선민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했을 때에는 번영을 누렸으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이방인들의 풍습을 좇아 살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구약시대는 막을 내렸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이를 신약시대라고 부릅니다. 이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위한 대속을 완성하셨습니다. 메시야께서 오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사명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선민과 이방인의 구별이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야 받지,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거저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10장 9절로 13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선민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동등하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다는 점에서 신약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구약시대의 사람들보다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19절에 보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방 죄인에 불과했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다니 이처럼 놀라운 일을 이 세상 어디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우리의 신분을 올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이같이 말씀합니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 구원에 이르는 첫 번째 단계는, 전도자를 통해서 복음을 전해 듣는 단계입니다. 일단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들음으로써 우리는 지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한 인간의 죄인 됨에 대하여,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믿음으로 구원 얻는 도리에 대하여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식을 아는 것만 가지고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지식을 근거로 하지만 지식이 곧 믿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을 알듯이 한갓 지식으로 성경을 아는 것 가지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은 올바른 성경적인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지식 이상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를 소유한 사람에게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첫 번 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이 거듭나게 됩니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는 영혼과 몸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영혼은 비물질적인 존재이나 몸은 물질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영과 혼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을 하고, 혼은 이성적인 활동을 맡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이 죽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혼이 건재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학문을 연구하고 예술적인 활동을 하고 사업도 하고 사랑도 하는 등 삶을 영위하는 데 조금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상태이므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고 말해 주어도 알지를 못합니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죽었던 영이 소생(蘇生)합니다.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죄를 미워합니다. 반면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듣기를 싫어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무엇이 죄인 줄 알지 못하며 죄를 지으면서도 가책이 없습니다. 이처럼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로 13절에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신 대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받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그저 종교적인 의식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과 성도들은 부자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스스럼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그들은 낯선 외인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은 성경의 보증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도 증거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 14절 이하에는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장차 주님께서 하늘 구름을 타시고  모든 천사와 함께 오셔서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인데, 그 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신 주님께서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3)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늘과 땅과 같습니다.


세 번 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삶의 목적과 방식이 다릅니다.

자기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바로 아는 성도는 이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실생활 속에서 변화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머리로만 알아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했습니다.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아는 지식은 단순한 지식 차원이 아닙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으로 인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인즉, 귀신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적대하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 떱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거역합니다.

혹 보면, 기독교인 가운데 성경에 대하여, 교회 생활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래봬도 내가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데” “교회생활에 대해서 알만큼 알아”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변화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교인은 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믿는 기독교의 진리를 삶 속에 적용하고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목회자 노릇을 할 수 있고,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행세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대단한 능력을 행함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5)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라고 했습니다.

물건은 눈에 띠지 않게 감출 수 있지만 냄새는 인위적으로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감출 수 없는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발산되어야 합니다. 불신 이웃들이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고 “당신, 예수 믿는 사람 맞지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양심적이고, 겸손하고, 온화하고, 친절한 모습을 통해서 불신 이웃들이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모습을 나타내려면 끊임없이 주님을 배우고 본받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단계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주님을 닮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닮아가는 데 성과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신앙생활을 해 나갈수록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는 부분이 많아져야 합니다. 간혹 보면,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 가운데 대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노년에 이르러 고백하기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목적이 올발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목적이 다를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은 동일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말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만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가운데는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일에 교회에서는 신실한 신자로서 행동하지만 한 주간 사회생활을 할 때에는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내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치 못한 삶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약 3:11). 이처럼 이중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데도 원인이 있지만 삶의 목적을 올바르게 세우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방향 감각이 잘못되어 엉뚱한 방향으로 달려간다면 아무리 빨리 달릴지라도 월계관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육상 선수가 골인 지점을 바라보면서 달음질하듯이 성도들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삶의 목적을 바로 정한 것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은 달리 말하면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물은 자기의 주장이 없어야 합니다. 제물은 자신을 온전히 바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와 같은 삶의 목적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자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곧게 뻗은 도로를 가면서도 핸들에 손을 떼지 않고 수시로 핸들을 움직여서 차의 나아가는 방향을 조정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상 선수가 결승점에 당도하기까지 달음질을 멈추지 않는 것처럼, 성도들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믿음의 경주를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변화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대는 죄악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런 만큼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핍박이나 환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화의 물결 곧 세속화된 이 사회의 분위기입니다.

신자들이 세속에 물드는 순간 온전한 신앙생활을 지속해 나갈 수 없게 됩니다. 달콤한 사탕이나 과자가 이를 썩게 만들듯이, 이 세상의 재미를 따라 살아가면 신앙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대신에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먼저, 알아둘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영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했습니다.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옛 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새 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은 옛 계명이요, 예수님께서 주신 복음은 새 계명입니다. 구약에 바쳤던 제물들은 불완전한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옛 사람은 죄에 물든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본성을 말하고, 새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도들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에 보니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는 ‘계속해서 새롭게 되어 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매일같이 새로워 져야 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우리가 날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어느새 세상의 때가 묻어 마음이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아무리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라도 자주 닦아주지 않으면 먼지가 끼어서 흐릿하게 되듯이, 우리의 심령도 자주 회개함으로 새롭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무디어져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풍조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변화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아무리 그럴듯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생각에 비하면 유치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의 지혜가 아무리 탁월해도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미련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까?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나의 뜻을 굴복시키고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날마다 변화 받은 새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변화 받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 심령에 뿌려졌으며,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사람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발을 씻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거룩하게 변화된 신분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의 모습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언행이 그리스도인다워야 하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발산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심으로 성도님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열납되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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