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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때가 아직 낮이매 (요 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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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장애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장애가 무엇이겠습니까?
헬렌켈러 여사는 듣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참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어려움임을 짐작할 수있습니다.
제가 대전에 있을 때 맹아학교의 학생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집사님들의 인도를 받아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돌아가?것을 보면서 제 자신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볼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가끔 수련회라든지 성경학교에서 하는 놀이 중에 소경놀이가 있습니다.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소리를 들려주고 일정한 목표 지점을 빨리 갖다가 오는 놀이입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그 어려움과 불편함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앞을 못보는 분들에게는 그들이 느끼는 다섯 가지 위험과 두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번째가 보행의 위험입니다. 아무래도 눈이 안보이니 걷기부터 불편하시겠죠. 수 많은 자동차와 건물의 계단 지하철, 각종 공사장 아득한 낭떠러지 그들에게는 보행 자체가 위험일 겁니다. 두번째는 식사의 위험입니다. 그들이 무얼 먹는지 과연 먹어도 되는 걸 입에 넣고 있는 것인지, 오물이 묻었거나 상한 건 아닌지, 식사를 할 때마다 그것은 굉장히 불편하고 위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세번째는 화장실이라고 합니다. 생리적인 현상이야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마찬가지인데 외출했다가 볼일?이 생기면 굉장한 낭패일 것입니다. 다행히 화장실을 찾았다해도 남자용인지 여자용인지 용변기에 제대로 볼 일은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그들에게 굉장한 불편을 줄 것입니다. 네번째는 책입니다. 비장애인도 외국의 좋은 책이 번역본이 없어서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각장애인의 경우 그 불편이 오죽하겠습니까? 점자로 나와 있는 책이 아니면 읽을 수 없으니 더욱 더 사회로부터 멀어지고 소외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다섯번째로는 맹견의 위험이라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그들을 향하여 무서운 개가 덤벼들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맹견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다고 합니다. 죽거나 다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겠죠.
그러나 사실 이런 어려운 문제들보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소외되는 외로움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소경은 특히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때부터 이미 상상의 근원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대접을 받지 못하고 힘들게 살았을 것입니다.본문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님을 통해 치유되는 기적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소경을 치유하면서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귀한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우리 주님께서 이런 소경을 치유하시는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영적인 교훈이 무엇입니까?

1. 때가 낮이매 주님은 바로 보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1절에 예수께서 길가실때에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여기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소경을 우리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여기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전적으로 먼저 보시고 먼저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보신 이유는 그의 눈을 떠주기 위함입니다.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날때부터 소경임으로 무엇이 빛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남들이 자신을 소경이라고 하니까 소경인가 보다 생각할 뿐입니다.이 소경은 찬란한 태양빛이 비취고 있고 밤에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으며 둥근달이 밤하늘을 은은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하고, 물속에서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이 얼마나 신기한지도 전혀 상상하지못했습니다. 그저 눈 뜬 사람들이 알려주는 말로 그런가보다라고 어렴풋이 이해할 뿐이었을 것입니다. 사실상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를 깊이 느끼지 못하고 그저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겠거니 하고 살아갈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소경을 보면, 참으로 불쌍한 인생을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불행을 깊이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대로 보면서 살아갑니까?
여러분 날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의 상태가 바로 오늘 우리들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경에서는 여러분과 저가 날때부터 영적으로 소경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9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스스로는 절대로 그 소경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빛을 스스로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 소경도 날때부터 지금까지 그냥 소경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내가 소경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시니까 바리새인 가운데 한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그렇다면 우리도 소경입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바래새인은 자신이소경인데 소경인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소경인줄 알아야 눈을 뜨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종교는 사람의 눈을 열 수 없습니다. 지식이 사람의 눈을 열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눈을 열수 없습니다. 날때부터 소경 앞에서 사람은 이 사람이 왜 이런지 누구의 죄때문인지 그것을 따지고 문제삼고 토론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소경인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무조건적인 은혜로 날때부터 소경된 우리를 찾아오셔서 보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눈이 열려서 본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본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본사람들입니다.우리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눈을 열어서 보게 하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영원한 복들을 보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결국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합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 죽으면서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죽습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왔습니까?
스데반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고 있습니까?
어둡고 답답한 세상의 문제가 보이고 있습니까? 두려운 미래가 보이고 있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스펄젼목사님은 어느날 어떤 문제 때문에 몹시 답답하고 불안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까 염려하던중 어느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답니다.
마침 그 가정에 들어가니까 외양간에 소가 한마리 서있더랍니다. 그소는 들어 외양간 담위를 멀리 넘겨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이 그집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 소는 저렇게 서서 먼곳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러자 순박한 그집 주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마 저 소가 담을 통해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가보죠" 그 말을 들은 스펀젼 목사님은 순간적으로 마음에 와 닿는것이 있었습니다."그래 담때문에 보이지않으면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되는 것이구나" 나는 지금 눈 앞에가로막힌 문제의 담만보고 답답해 하고 괴로워했구나 문제의 담이 가로놓였을 때는 고개를 들자! 고개를 들어 좀더 위를 보자 그리고 멀리보자!
그래서 스펄젼 목사님은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것입니다. 이 세상만을 보는 눈은 영적 근시안입니다. 우리는 저 세상까지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이 열려서 아름답고 화려한 하늘나라를 본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이 분토만도 못할 것입니다.문제는 이 눈이 열려야 합니다. 내 영안이 열리고 내 마음의 문이 열려서 이 모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잇는 눈으로 항상 떠있고 항상 보시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여! 내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밝히볼수 있는 눈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2. 때가 아직 낮이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4절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니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여기 주님은 때가 아직 낮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낮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을 말하는 것입니다.지금 이땅에 사는 동안은 낮이며, 죽으면 밤이 되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주님 때가 아직 낮이매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어떤 목사님의 은퇴식을 참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370장 찬송가 “어둔밤 쉬되리니”를 그렇게 많이 부르면서도 그 가사가 절실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쉬 밤을 맞을 지 몰랐다는 것입니다.일을 하지 않고 보니 얼마나 일을 한다는 것이 귀하고 값진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그때 조금만 더 열심히 일을 할 것을 하고 후회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날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소경이었기에 낮에 살면서도 밤처럼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저 길가에 구걸이나 해서 겨우 생명만을 연장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빛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일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믿음으로 일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일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주님은 진짜 가치있는 일,의미있는 일,본질적인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신 하나님의 일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엇습니다.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 귀신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2명을 선택하여 주님의 제자로 잘 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이 일을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에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여기 주님은 낮의 때에 부지런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밤이 오면 일을 할 수 없다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보면 알 듯이 우리 주님은 공생애 3년동안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본문의 나면서 앉은뱅이된 이 사람을 고쳐준 일도 언제 하십니까? 바로 안식일날 일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면서 모든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해야 합니까? 곧 어두운 밤이 올 것을 알고 긴박한 심령으로 부지런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나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먼저 소경된 사람의 눈을 열어주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어주고 죽은 영혼을 살리는 가장 본질적인 생명을 구하는 일 영혼을 살리는 그 일을 우리가 긴박하게 먼저 해야 합니다.

우리 강동교회가 이제 이 지역에서 주어신 시간 동안 특별히 집중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는 먼저 주님의 제자삼는 일을 집중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꾼들을 키워서 함께 집중해야 할 일이 바로 우리 주님이 행했던 일입니다.
먼저 우리가 함께 집중해야 할 일이 장애인선교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거나 태어날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나거나 생활하면서 장애로 태어난 사람들을 우리가 섬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일을 할때 이런 일은 특수한 일이기 때문에 이런 분야의 전문적인 은사와 경험이 있는 선교단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관들을 함께 열심히 협력하여 돕는 일입니다.
다음은 노인들을 위한 선교입니다.
우리 지역에 어려운 노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내년부터는 먼저 우리 교회의 노인어른신들부터 시작하여 친구들과 주변의 어려운 노인들을 모시고 함께 예배하고 식사하고 교제할 수 잇는 섬김의 시간들을 갖을 것입니다.
셋째는 어려운 가정을 위하여 어린이를 위한 선교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많은 가정의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우리가 잘 섬겨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을 누군가 함께 열심히 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세상에서 해야 할 일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살후3:10에 보면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지요. 잠언6:6에서는 개미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배우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부지런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우리가 더욱 열심을 내야 할 일이 바로 교회 일입니다. 바로 복음의 일입니다. 사람을 섬기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일을 할때도 행복하지만 더욱 행복한 것이 주님의 백성을 위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일을 할때 얼마나 행복합니까?
여러분 이것도 때가 있습니다. 항상 그 일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이 항상 주어지지 않습니다.일을 할 때가 지금입니다. 그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일할 수 있는 때에 힘써서 일을 하시면서 사셔야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동안 열심히 주의일을 해야 합니다. 밤이오면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아직 낮인 이때에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3. 때가 낮이매 주님은 고통을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어떻게 뜨게 해줍니까?
먼저 진흙을 이겨 눈에 바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을 빚어 만드셨습니다.
예수께서 진흙을 소경의 눈에 바르신 것은 바로 자신이 창 조주 하나님이심을 계시한 것입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이 소경을 고치고 새롭게 하실 수 있음을 예시하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고난 이나 문제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실로암 못에 씻음
예수께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 라고 명령하십니다.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실로암 못은 기혼 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혼은 예루살렘 바깥 에 있던 샘입니다. 기혼 샘의 물이 바위를 깎아 만든 수로를 통 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실로암 못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그러 니까 기혼 샘에서 실로암 못까지 샘물이 “보냄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로암이라는 이름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유래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로암 못으로 소경을 보내면서 그 뜻이 “보냄을 받았다” 는 것을 강조하는 또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18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 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내가 나를 위 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 하시느니라.”
예수께서 자신이 아버지께로서 보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흑 암 속에 있는 사람들의 빛이 되기 위하여 창조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동시에 구세 주가 되기 위해 “보냄을 받은” 분입니다. 실로암 못은 바로 보 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는 절망을 통해서 영의눈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보통 때는 영의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고통과 환란과시련같은 절망스런 것들이 나에게 닥쳐왔을 때 오히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소경이 실로암에서 주님을 만났듯이 오늘 우리 주님은 고통 속에 만나주시고 복이 되게 하십니다.

건강할 때는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나라가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멜때 보여집니다.
사업이 잘될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세계가 사업이어려움을 당할때 눈에 보여집니다. 햇빛이 밝게 빛나는 낮에는 하늘에 펴 있는 별들의 빛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암흑의 환경속에서 진리의 별빛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에 나오는 날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은 가뜩이나 어두운눈위에 진흙을 이겨 발랐기 때문에 더욱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이 소경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에 순종하여 실로암못으로갔습니다. 못에가서 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여기에 눈뜨는 배경이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속에 있다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축복이 있습니다. 절망속에 고통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그 눈이 떠져서 밝히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찬송시를 지은 화니 크로스비* 여사는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생을 장님으로 살면서 찬송시를 무려 8천 여 편이나 썼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도 24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204장).

화니 크로스비의 행복은 주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불행한 처지에 있었지만 그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따라가는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았습니다. 당신에게도 영혼의 눈을 뜨는 기적이 일어나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찬양하는 삶을 살게 되기 바랍니다.
(박 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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