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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투에 사로잡힌 사울 (삼상 1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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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이 함께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웃는 얼굴로 인사합시다. “당신 때문에 저는 행복합니다.” 인사만 해도 행복하시죠? ^^

1936년,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개막되었습니다. 그 때는 히틀러가 집권하던 때였고, 나치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올림픽을 통해서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육상 경기의 최고 선수는 ‘검은 탄환’으로 불리는 미국의 제시 오웬스라는 선수였습니다. 나치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유태인과 흑인을 올림픽에서 추방하자!’

제시 오웬스 선수는 나치의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100m, 200m, 400m 계주와 멀리뛰기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 네가지 종목에서 제시 오웬스와 견줄 선수는 독일의 멀리뛰기 선수 루즈롱 뿐이었습니다. 루즈롱은 순조롭게 예선을 통과하고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시 오웬스의 순서가 다가왔습니다. 독일인들의 야유가 엄청나게 빗발쳤습니다. 멀리 뛰기 종목의 첫 번째 시도에서 오웬스는 도약 선을 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실격 처리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뜀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뛰었기 때문에 성적이 저조하게 나왔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시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시 오웬스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경쟁자, 루즈롱이 오웬스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저도 작년에 대회에서 선수로 나갈 때 그렇게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간단한 요령이 필요해요.”하면서 수건을 달라고 하더니, 수건을 뜀틀 가까이에 놓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올 때 이 수건을 기준으로 뛰어 보라고, 그러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의 말을 건네었습니다. 
그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 제시 오웬스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다시 뛰었는데, 그는 예선을 무사히 통과해서 결승에 진출하였습니다. 이제 미국의 제시 오웬스와 독일의 루즈롱, 두 사람이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히틀러는 이 루즈롱을 특별히 불러 “자네는 꼭 이번에 승리해야 된다.”고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루즈롱이 먼저 뛰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뛰었고,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엄청난 함성난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로 미국의 제시 오웬스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가 뛰었는데, 방금 전의 루즈롱의 기록을 뛰어넘어 세계 최고 신기록을 갱신했습니다. 독일 관중들로 가득 차있던 관중석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히틀러의 얼굴은 그 순간 몹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이 때 갑자기 루즈롱 선수가 제시 오웬스의 손을 잡아들고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제시! 제시!” 조용하던 관중석에서도 "제시!"라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제시 오웬스가 목청껏 소리쳤습니다. “루즈롱! 루즈롱! 루즈롱!” 관중석에서는 더 큰 함성이 울려 나왔습니다.
이 제시 오웬스의 기록은 그 후 24년이나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 기록을 깨뜨릴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시 오웬스는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 4관왕으로서 가장 위대한 선수 중의 한 사람으로 오늘도 존경받고 있는 흑인선수가 되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제시 오웬스는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세운 기록은 언젠가 분명히 깨질 것입니다. 하지만 루즈롱이 내 손을 치켜들었던 그 광경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독일 선수 루즈롱이 흑인인 나의 손을 치켜들었던 그 광경만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그의 말처럼 제시 오웬스와 루즈롱은 역사에 함께 기록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무서운 경쟁자요, 라이벌의 관계였지만, 놀라운 우정과 사랑 그리고 감동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한 비극적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앞의 이야기와 유사한 상황이지만, 선의의 경쟁자요 라이벌로 인정하지 못하고 위험과 질투의 노예가 되어서, 평생 한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살다가 그렇게 생을 마친 사울 말입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촉망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시골의 청년이지만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얼마나 컸는지, 다른 사람과 견주어 서면 어깨 위로 목이 하나 올라올 정도로 그렇게 키가 큰 장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잘났고, 또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존경을 받았고, 전쟁에 나가면 늘 승리하는 그런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블레셋의 골리앗이 공격해 왔는데, 어느 장수도 골리앗을 대항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대승을 거뒀습니다. 어린 다윗, 목동 소년이지만 그는 물맷돌 다섯 개를 가지고 나가서 한 방에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사울과 다윗, 그리고 장수들과 사병들은 이제 도성으로 입성하면서 엄청난 퍼레이드를 벌이게 되어있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나와서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일단의 여자들은 춤을 추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노래가사가 문제였습니다. 오늘 성경 10절에 보니까 여인들은 노래하기를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사울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사울은 몹시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이제는 다윗이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더 무엇이냐.”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노래의 내용인즉슨 사울은 천명을 무찔렀는데, 다윗은 만명을 무찔렀다는 노래이니 말입니다. 
어찌 보면 좀 속이 없는 여인들이 전혀 사울 왕을 의식하지 않고 생각 없이 한 노래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사건에 사울 왕의 눈이 뒤집혀 버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구절에 보니까 그날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였더라고 나와 있습니다. 주목이라는 것은 집중적으로 주시하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보니까 의심과 시기로 그를 바라보았더라고 했습니다. 그 날 이후 어찌 보면 평온하던 사울의 마음속에 질투의 회오리가 불일듯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게 쉽게 그 여인들의 노랫가락 한 마디에 사울의 마음이 뒤집혀버리고 말았을까요?

간단합니다. 사울에게 상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그에게는 상처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서 상 앞 편을 살펴보면 두 가지 사건에서 사울이 실수를 합니다. 먼저는 사무엘 선지자가 “내가 가서 제사를 지낼 테니까 기다리라”고 했는데, 이레를 기다려도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왕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백성을 위해서 스스로 제사를 집례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사울은 사무엘의 책망을 받았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말렉의 아각 왕을 살려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든 노획물은 다 죽이라고 했습니다. 저 사울왕은 아각 왕을 살려뒀습니다. 그리고 살찐 짐승들을 따로 모아놓았습니다. 아마 부하들에게 나눠줄 요량인지도 모릅니다. 변명으로는 제사드릴 때 쓸려고 모아뒀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왕을 버렸습니다.’ 그것이 그의 마음속에 상처가 되었습니다.

또 블레셋의 골리앗이 쳐들어 왔는데, 골리앗을 대항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 목동 다윗이 그 엄청난 거인 골리앗을 무찔렀지 뭡니까. 왕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그의 지휘는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의 확신은 불안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여인들의 노랫소리가 비수같이 사울의 마음속에 꽂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잘 살고 있고, 사업이 잘 되고 있을때는 누가 한 마디 해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그거 뭐 지나가는 말로 듣고, 또 안들은 것으로 여기면 되는 거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몸과 마음에 상처가 있습니다. 건강이 안 좋을 때, 뭔가 경제적으로 힘들 때 옆에 있는 집사님이 한 마디 농담을 했다면 그것이 상처가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삐지기도 하고,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이 연약한 사울의 마음속에 질투의 화살이 꽂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울은 질투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질투의 대상인 다윗만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노예가 되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을 온통 다 빼앗겨 버렸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60주년 광복절 기념 주일을 맞이했습니다만 일부의 사람들은 정말 우리가 진정한 광복을 맞이했느냐고 되묻기도 합니다. 물론 주권적으로는 일본에게서 우리가 해방되었지만, 아직도 우리의 생활 습관에는, 우리의 언어나 문화나 모든 것이 일본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처리하지 않고서 어찌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 순간에 질투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온통 마음을 다윗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질투를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옆의 친구가 공부를 잘하고 뜀뛰기를 잘하면 부러워하다가 나중에는 좀 시기하게 되고 좀 미워하는 마음도 생길 수 있습니다. 얘 혹시 전학 안가나? 얘가 전학가면 내가 1등 할 수 있는데. 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뭐 애교로 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질투는 죄악과 같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악마적인 영성이 있다고 성경은 소개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10절에 보니까 사울에게 악령이 힘 있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질투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그 틈을 타고 악령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울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 때부터 불행한 인생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란 책을 쓴 레베카 피펏은 ‘질투는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질투는 질투하는 사람을 파멸로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굴 미워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미움 받는 사람이 괴롭습니까? 미워하는 사람이 괴롭습니까? 미워하는 내가 괴롭습니다. 그 사람 생각만 하면 내가 속이 뒤집힙니다. 내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내가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괴롭습니다. 질투하는 그 순간에서부터 나는 파멸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질투하면 사리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이성을 잃어버리고 냉정함을 잃어버리고 평정심을 잃어버립니다. 오직 질투하는 대상만을 주목하게 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자유를 뺏겨버립니다. 질투의 영에게 내 자유를 다 내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과 방법을 연구하다가, 자기 딸과 결혼시켜서 사위 삼는 것까지 진행합니다. 그리고는 “그런데 네가 결혼지참금이 없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블레셋 사람 100명만 잡아서 그 껍질을 벗겨오너라.”라고 말합니다. 어떤 속셈입니까?  사위 삼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하고 싸우다가 죽으라고 보내는 것입니다. 오직 사울의 관심은 다윗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블레셋하고 전쟁하는데 지금 다윗이 어디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면, 전쟁하던 왕이 전쟁을 그만 두고 다윗을 잡으려고 쫓아갑니다. 이러니 나라꼴이 되겠습니까? 그는 일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을 미워하고 질투하는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비참한 나라를 향해서 날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어떻게 됐습니까? 블레셋과 전쟁하다가 패배했습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스스로 자기 칼로 자기가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생입니까? 그 훌륭한 왕이, 그 위대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말입니다. 한 사람을 미워하는 순간부터 그의 인생이 파멸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수하기 위해서 일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를 미워하기 위해서 일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경찰관이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벌을 줄 자에게 벌을 주고, 상을 줄 자에게 상을 주는 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여러분이 재판관의 자리에 서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냥 여러분의 일에 최선을 다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 그러면 이 사울이 질투의 노예가 되었는데, 그가 일으킨 질투의 반응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원래 누군가를 질투하게 되면

첫째는 분노에 빠지게 됩니다.
아가서 8:1에 보니까 “투기는 음보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은지라.”고 했습니다.  자 우리 오늘 8절 말씀을 다시 읽어볼까요?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에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이 말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고, 또 심히 분노했다고 했습니다. 질투하면 분노심이 생깁니다. 성경에 보면 형제간의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입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성장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농사지은 채소와 곡식으로 드렸고, 아벨은 자기가 양치는 목동으로 드렸기 때문에 양을 잡아서 그 피와 고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셨습니다. 그 제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정성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는 순간 가인의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내동생 아벨 때문에 하나님이 내 제사를 받지 않는구나!’ 라 생각했고, 아벨을 미워하고,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돌로 쳐서 동생 아벨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질투의 결과입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우리 심령 속에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연극, 영화로 알려진 ‘아마데우스’란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궁중 악사인 안토니오 살리에리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나름대로 악사로서 훌륭한 재능과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궁중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란 소년이 나타나면서 그의 삶이 뒤집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그는 비록 어린 소년이지만 그의 음악적인 재능은 천부적이었습니다. 연주가 끝나면 때로 장난치며 웃는 어린 소년에 불과 했지만, 그가 악기를 잡는 순간부터 놀라운 음악이 연주돼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졌고 질투하면서 분노의 감정이 끌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 어린 소년에게 저런 놀라운 재능을 주시고 왜 내게는 저런 재능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라며 하나님을 저주했습니다. 그가 모차르트를 질투하면 그의 재능마저 상실돼 버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질투는 분노를 가져옵니다.

두 번째 질투는 탈 인격적 행동을 가져옵니다.

오늘 말씀 10~11절 말씀에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란 말씀이 나옵니다. 악신이 사울에게 임하니 그가 집 가운데서 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음악을 연주하는 궁중악사인 다윗을 향해서 두 번씩이나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다윗을 무척 사랑하고 배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다윗이 전쟁에 나간다고 하니까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벗어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지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자신의 은인과 같은 소년인데, 다윗을 향해서 죽이려고 창을 두 번 던진 것은 이성을 잃은 행동이었고, 분별력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질투로 말미암아 나타난 탈 인격적이고 비인격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그랬습니다. 야곱이 아들 중에서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꿈을 꾸고 형님들의 곡식 단이 자기를 향해 절하고, 해와 달과 별이 자기를 향해 절한다고 꿈 이야기를 한 것이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질투하게 돼었고, 결국은 요셉을 웅덩이에 던져 죽이려고 하다가 애굽의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어떻게 같은 형제를 그렇게 팔아버릴 수 있는지.... 그들의 비인격적 행동은 바로 질투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중의 하나가 ‘오셀로’입니다. 오셀로에게 말을 잡고 달리는 기수 ‘이야고’란 부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고는 자신이 부관이 될 줄  알았는데, 개시오란 사람이 부관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오셀로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갖은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오셀로 장군에게 자기 부인을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 부인 데스데모나가 부관 캐시오와 음밀하고 이상한 관계에 빠진 것처럼 꾸밉니다. 그래서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결국 오셀로 장군은 이야고에 의해 조종당해 자기 부인을 의심하게 되고 의심의 겉잡을 수 없이 타오르게 되어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투가로 인해 비인격적인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질투의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오늘 성경 12~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란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느낀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심으로 온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보지 않으려고, 전쟁터에서 죽게 하려고 천부장을 삼아서 전방 전쟁터로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가는 곳 마다 승리하고 돌아옵니다. 사울은 그런 다윗을 볼 때마다 점점 더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을 내어 쫒는 다고 했는데, 질투하는 마음은 두려움을 가져왔습니다. 상대가 잘되고 성공하면 할수록 나 자신이 좌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고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읽은 ‘백설공주’란 동화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설공주의 친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계모가 들어왔는데, 매우 예뻤습니다. 계모는 아침마다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자기 품에 가진 마술거울에게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라고 묻는 한 가지 버릇이 있었습니다. 거울이 “왕비님이 제일 예쁘죠.”하면 만족하게 하루를 살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란 물음에 “물론 왕비님도 예쁘지만 지금은 백설공주가 더 예뻐요.”란 말을 듣는 순간 백설공주를 질투하게 되고, 두려움에 빠져서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온통 백설공주에 매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자신도 자멸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의 거울이게 “거울아 거울아 영신교회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란 물음에 “그래 내가 제일 예쁘다고 맞아 할렐루야.”하고 지내다가 어느 날 물어보니까 아니야 김 집사가 더 예쁘다고 대답하면 그 때부터 김 집사를 미워하기 시작 하고, ‘왜 네가 더 잘났냐? 왜 네가 봉사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고 찬양도 잘해.’하며 기분 나빠합니다. 그 때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인들 마음속에도 질투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질투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질투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첫째로 질투를 극복하려면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이 범하는 잘못 중의 하나가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 저 사람은 나보다 공부도 못했고, 생긴 것도 못생겼고, 내가 지보다 훨씬 낫지.’하며 늘 자신의 것과 다른 것들을 비교합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셔서 교만한 자를 배척하시고 교만한 자에게 은혜를 주지 않으십니다.
또 한 가지 비교할 때 오는 것에 열등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 내가 못하는 것이 많은 것 같고, 그 사람은 너무 훌륭한 것 같아서 열등감을 갖게 되고 부러움을 갖게 되고 나중엔 미워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이 주신 양에 따라 다 귀하고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 하나는 하나님의 귀한 걸작품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질투를 극복하려면 받은 복을 세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과 그 선물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세어봐야 합니다. 감사하며 살아도 짧은 한 평생입니다.
사람들은 질투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들을 다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사랑스러운 자녀를 주셨고, 단란한 가정을 주셨고, 직장을 주셨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강을 주셨습니다. 그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내게 없는 몇 가지를 가지고 부러워하고 질투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질투를 극복하려면 진정으로 상대를 축복하셔야 됩니다.

저는 ‘만약에 사울 왕이 다윗을 축복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랬다면 후세 사람들이 다윗 왕보다 사울 왕이 더 마음이 넓고 훌륭한 인물이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영국 런던에 유명한 마이어 목사님과 켐벧 몰간 목사님과 스펄젼 목사님이 있었어요. 그런데, 켐벧 몰간 목사님과 스펄젼 목사님의 교회는 날마다 부흥되어 가는데, 마이어 목사님의 교회는 계속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마이어 목사는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두 분 목사님에 대한 미움과 시기심이 싹트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 제 마음속의 시기심을 제거하고 제 마음속에 평화를 주옵소서.”하고 기도 했지만 마음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두 분 목사님을 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축복하는 순간부터 그의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서로를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갈등을 겪는 분들은 대개 질투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흔히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이런 갈등이 있을 수 있어요.

예전에 영화를 보니 그런 영화가 있었습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외아들을 홀로 키웠습니다. 아들이 자라서 결혼하고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며느리와 아들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며느리와 오랜 시간 같이 있게 되자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질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와 아들이 자면 이불을 가지고 가서 그 사이에 자면서 자기가 38선이 되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아들은 며느리와 사랑하는 부부가 돼야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며 키운 것은 부모로서 내 할 일과 내 의무를 다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를 축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우들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축복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축복하는 그 사람을 더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네 번째로 질투를 극복하려면 성령님을 의지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 마음으로 내가 절제가 안 되는 것을 어떻게 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일수록 성령님께 내 자신을 맡기셔야 합니다. 성령님만이 질투하는 마음을 평화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박치기왕 김일씨 아시죠? 어제 신문에 김일씨에 대해 나온 것을 봤습니다.

그분은 역도산의 제자고 박치기 왕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레슬러였습니다. 이제는 그분도 나이가 들어 이제 80세가 다 돼가고, 사업에 실패해서 가난하게 살아간다고 합니다. 젊어서 박치기를 많이 해서 근육과 뇌에 문제가 생겼고 병원에 갈 돈이 없었는데, 김일을 좋아하던 을지병원 병원장이 자기 병원에 초청해서 무료로 치료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건장했던 박치기왕 김일도 이제는 마지막 임종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일생을 살다가 마지막 정리할 때가 찾아옵니다. 그때 사람들은 대개 임종의 때에 3가지 때문에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내가 왜 좀더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왜 악착같이 끌어 모으려고만 했을까? 하나님 앞에 이웃 앞에 좀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를 후회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좀더 참지 못했을까?’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내가 좀더 참았다면 우리 부부가 헤어지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내가 조금만 참았다면 며느리가 집나가지 않았을 텐데..  내가 조금만 참았더라면 우리아들 가출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참았다면 직장에서 멋있게 은퇴했을 텐데..’등등 조금더 참지 못한 것에 후회가 된답니다.

세 번째는 ‘내가 왜 좀더 사랑하며 살지 못했을까?’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세월인데 왜 미워하며 증오하며 질투하며 살아갔는가?’ 그것을 후회하게 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격려하고 용서하고 남을 세워주며 사시기 바랍니다.

사울의 일생은 실패한 인생이었습니다. 인생의 어느 날 질투하는 순간부터 자기 마음과 행복을 다 빼앗겨 버리고 파멸을 향해 달려갔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여러분! 서로 비교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세어보시고, 서로를 축복하시고 성령님을 의지하셔서 사울과 같은 질투의 늪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보람된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영 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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