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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창 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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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역사는 정말 드라마 같습니다. 복에 목말라 아버지를 속입니다. 형에겐 씻을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는 피난길을 떠납니다. 외삼촌 집에서 장가들려고 14년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외삼촌에게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많이 속고 살았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는 갈 때는 빈손이었습니다. 홀몸이었습니다. 세월은 어언 20년이 흘렀습니다. 그는 두 아내와 자식이 생겼습니다. 또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옵니다.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형 에서의 자기에 대한 분노가 계속되지는 않는지 불안과 초조에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야곱이 고개를 들어 멀리 보았습니다. 형 에서가 400명 부하를 거느리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두 아내와 두 여종에게 자녀들을 나누어 맡겼습니다. 라헬과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맨 뒤에 따라오게 하였습니다. 요셉이 앞장서서 갑니다. 그는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는 형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에서도 뛰어와서 야곱의 목을 껴안았습니다. 동생에게 입을 맞춥니다. 그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가족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들은 누구냐?” “이들은 하나님께서 과분하게도 이 못난 당신의 종에게 주신 사람들입니다.”하고 대답하는데 야곱의 두 아내와 자녀들이 에서에게 절했습니다. 에서가 물었습니다. “내가 오다가 만난 가축 떼들은 웬 것들이냐?” “형님이 저를 너그럽게 보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아 내 살림도 넉넉하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하고 사양했습니다. 야곱은 야곱대로 받아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를 아우로 여기시거든 제 선물을 받아 주십시오. 형님이 저를 사랑으로 맞아 주시니 형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잘 돌봐 주셔서 제 살림은 이렇게 넉넉합니다. 그러니 제가 드리는 선물을 받아 주셔야 하겠습니다.” 에서는 동생의 태도에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가자. 내가 앞장서마.” 이것이 오늘 읽은 말씀의 줄거리입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다움입니다. 여기 에서와 야곱은 아주 이상한 사이였습니다. 그들은 쌍둥이였습니다. 그런데 화평이 깨어졌습니다. 다 야곱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저지른 잘못의 값을 톡톡히 받았습니다. 그는 많이 울었습니다. 겁이 나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가 속인 것 이상으로 속아 넘어 갔습니다. 그가 아픔을 준 것 이상 아파했습니다. 그는 외삼촌이자 장인의 마음이 변한 것을 눈치 챘습니다. 여기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환경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도망치듯 고향으로 갑니다. 이것 다 하나님께서 밀어 붙이시는 것입니다.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그 역사적인 장면이 벌어집니다. 20년 만에 형제가 부등켜  안고 용서를 빌고 또 용서해 줍니다. 멋있지요. 볼만한 장면입니다.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Ⅰ. 불안했던 야곱

야곱은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었습니다. 부모와 형제를 잃었습니다. 20년 동안 아마 하루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입니다. 산 넘어 산입니다. 외삼촌이 따라올 때에는 거기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400명 군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가족과 소떼와 양떼를 먼저 보냈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했습니다. 20년이면 옛날 원한이 풀린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형을 물리적으로 해롭게 한 것은 없습니다. 싸운 것도 아닙니다.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형이 아버지로부터 받아야 할 축복기도를 자기가 받아 버린 것입니다. 당장 무슨 변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아버지는 죽기 전에 자식에게 하는 축복기도가 있었습니다. 특히 장자에겐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복을 빌었습니다. 요즈음은 어떻습니까? 목사에게도 축복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 기도를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군 목사님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특수한 환경이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찾아가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이 약속하고 찾아와 무릎을 꿇고 기도 받고 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저보고 대신 개도해 달라고 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야곱은 이 일로 형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피난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잊을 만 하다고 생각하고 고향으로 오는 길입니다. 그는 얍복강을 도무지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죄어 오는 것입니다. 그는 밤새껏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씨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세요.” 그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맞아서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이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환영 한다면 400명 군인을 왜 끌고 오겠습니까? 야곱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안절부절 못합니다. 형님이 자기만 죽이지 않고 아내와 자식들까지 몰살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지은 사람은 불안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기 전이었습니다. 스스로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지어 입었습니다.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는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했습니다. 옷을 입지 않았으면 부끄러울 일입니다.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담은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습니다. 죄를 지으면 부끄럽습니다. 겁이 납니다. 죄를 짓고도 부끄럽지 않으면 영적 감각이 마비된 사람입니다. 중증환자(영적)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무서워야 합니다. 야곱은 자기 꾀에 아버지도 속았습니다. 형도 넘어 갔습니다. 이젠 피할 길이 없습니다. 막다른 길에 서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죄 짓는 것을 모릅니까? 사실 하나님이 무서워서 못 짓습니다. 벌이 무서워서 죄를 못 짓습니다. 요나 보세요. 니느웨로 가서 전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평소 원수지간인 니느웨가 망하는 것은 요나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입니다. 가만히만 있어도 니느웨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마침 있었습니다. 정반대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는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립니다. 자기 계획 이상으로 척척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잠깐이었습니다. 태풍이 붑니다. 제비 뽑힙니다. 바다에 던져집니다. 고래 뱃속에서 사흘간 죽을 고생을 합니다. 망신을 당합니다. 죄가 압니다.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립니다. 주일날 놀러가도 아무 탈이 없습니다. 십일조를 안 바쳐도 예금 통장에 숫자가 늘어납니다. 좋은 집도 삽니다. 차도 삽니다. 이거 하나도 좋아만 할 일이 아닙니다. 다음에 있을 하나님의 계획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철학자 키엘케골(KierKegaard)은 철학의 기초를 불안과 공포에다 두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떠나면 불안합니다. 하나님 안 계시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작은 몸 짓 하나도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 속짐작까지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꼼짝 못하지요. 이것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좀 모자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합니다. 좀 덜 된 사람으로 여깁니다. 좋아요. 지금은 그들이 비웃습니다. 손가락질합니다. 키득키득 조롱의 비웃음을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머지않아 후회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바보처럼 살아야 합니다.

Ⅱ. 나는 너의 앞잡이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만납니다.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야곱은 많은 선물을 형에게 바쳤습니다. 형은 사양했습니다. 극구 사양했습니다. 야곱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선물을 사양하는 것은 옛날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좋은 말을 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다.”는 칭찬을 했습니다. 형은 동생을 용서해 준다는 뜻으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고 합니다. 야곱은 고향 떠난 지 20년입니다. 그래서 형이 길 안내자가 됩니다. 이것이 쌍둥이 형제의 화해장면입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사랑의 극치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깃발입니다. 시골 부잣집 둘째 아들은 문제아였습니다.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많은 돈을 허랑방탕한 데 다 써버렸습니다. 그가 형편없는 몰골로 집에 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한 마디도 꾸짖지 않습니다. 그 돈 어디에 썼느냐 묻지 않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이러신 분이십니다. 형제간에 화해가 된 것입니다. 용서를 빌었습니다. 또 용서를 해준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용서에 조건이 따르면 용서가 아닙니다. 회개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 하시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너그러이 용서 합시다. 이 땅에서 풀 것은 풀어야 합니다. 물론 섭섭할 수 있습니다. 손해 본다고 생각합니다. 자존심도 상합니다. 예부터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지요. 우리 인생이 결코 길지 않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저가 아는 선배 목사님 두 분이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기도를 한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 제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그들은 해가 지기까지 분을 품지 않는답니다. 다 화해하고 잔다고 합니다. 그 때는 통신수단이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전화, e-mail, 문자 메시지, 많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모두가 다 제 탓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데 맘대로 잘 안 되지요. 노력 많이 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이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너그러워야 하는데, 야곱은 용서를 얻어내기 위해 많은 소, 양, 염소 떼를 바쳤습니다. 밤새우며 기도했습니다. 20년 동안 혀의 마음이 풀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도 형의 마음이 굳어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늘 불안했습니다.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절망에 빠졌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모든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형인 에서는 소문과는 달랐습니다. 순한 양 같았습니다. 동생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섭섭했던 앙금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이미 원수가 아닌 동생으로 맞아 준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내가 이 지역의 지형은 잘 안다. 길도 잘 안다. 내가 안전하게 인도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형의 자리에서 벌써부터 동생을 기다린 듯 합니다. 이미 용서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형은 과거의 형님이 아니었습니다. 형제가 화해했습니다. 우리도 종종 그런 경우를 봅니다. 화해가 아름다워요. 용서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용서 하셨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기억도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청해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오신 것입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야곱은 겨울 추위보다 더 떨었습니다. 외삼촌의 위협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다 막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확한 정보에 의하면 형 에서가 온다는 것입니다. 잊으려 해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행한 잘못이 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선물을 보냈습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얍복강을 건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밤새껏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매달렸습니다. 떼를 쓴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O. K(오케이) 싸인을 받아낸 것입니다. 그는 400명의 군인을 거느리고 온 형님을 만났습니다.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는 형님을 보니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형님은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에서는 내가 너의 길 안내자가 되마. 가자 우리 집으로. 그는 20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고향에 온 것입니다. 화해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용서가 이렇게 멋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땅에서 풉시다. 용서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사랑으로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박 충 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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