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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만한 믿음이 있는가? (눅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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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은 병들어 죽게 된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서 낫게 하신 일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셨다는 사실 자체보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한 사람의 믿음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는데 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기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보기 드문 칭찬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칭찬하신 사람은 어떤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이란 자기 수하에 백 명의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에는 로마군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기 44년까지는 갈릴리 지방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백부장은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눅3:1)가 주로 세관의 통관업무를 지원하기 위하여 고용한 군대의 지휘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헤롯일가와 그 군대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 때문에 그의 아버지 헤롯대왕 때부터 타국인들을 군인으로 고용하는 정책을 써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그가 유대인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 백부장이 유대인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만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는 성경 자체가 설명하고 있지 않아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오늘 본문이 전하는 바에 따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선 그에게는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3절의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한 말이 그것을 느끼게 합니다.  여기서 종은 노예를 말합니다.  노예 하나를 살리기 위해 여러 유대인 장로들을 동원하여 예수님께 구원요청을 드리는 등 동분서주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의 따뜻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부장으로부터 도움요청을 받은 장로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의 종을 구해주실 것을 간절히 청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장로들이란 가버나움 공동체의 어른들이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지위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사실로 보아 백부장은 그 공동체에서 대단히 신망이 높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의 종을 낫게 해주시는 것은 마땅한 일이고 그 백부장은 그런 호의와 도움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장로들은 그 타당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5절을 봅니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타국사람이고 또 세관에서 통관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고용된 군지휘관이라면 의례 권력을 이용하여 축재하고 그래서 원성의 대상이 되기 쉬울 법 한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장로들로부터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는 평판을 들을 만큼 그는 그의 직무를 공의롭게 수행했고 주민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는 가버나움주민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봉급은 가장 적게 받는 사람의 50배 정도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는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회당을 지어줄 정도의 갑부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가 회당 짓는 비용을 혼자서 다 부담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누구보다도 헌금을 많이 했다는 말인지, 또는 그가 가진 행정적 권력과 군사적 병력을 통해 회당 짓는 일에 적극 협력했다는 말인지 정확히는 알 수는 없으나 어쨌든 결과적으로 "우리의 회당은 그가 지어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라는 뜻 이상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그가 군사적으로 치안을 책임지고 행정적으로 이익을 보호하도록 자기에게 맡겨진 주민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너그럽고 희생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군인이지만 인격적이고 교양 있으며 사려 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로들의 설명과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도 그를 직접 대면하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사람 됨됨에 깊은 감명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백부장의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집 가까이에 이르셨을 때 백부장이 새로 보낸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이번에는 백부장이 자신의 친구들을 예수님께로 보낸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했습니다(6-8절).  예수님께서 이 말을 전해들으시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였던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단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의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하긴 했으나 뒤이어 생각해보고는 그렇게 할 일이 아니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집에 오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드는 일임이 뒤늦게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결례를 무릅쓰고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떠나서 스스로를 감히 예수님을 대면할 수 없는 죄인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발을 들여놓으시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일이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의 종을 낫게 할 희망은 여전히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이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는 멀리서라도 말씀 한 마디만 하시면 굳이 자기 집에까지 오시지 않고도 병을 고치시고 사람을 살리실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이러한 믿음을 자신의 군대경험을 통해서 더욱 확고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친구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께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한 것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최고 지휘관은 아닙니다.  그 위에 상관도 있고 그 밑에 부하도 있는 중간지휘관입니다.  따라서 백부장 자신도 상관의 어떤 명령을 받으면 무조건 그대로 복종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백부장 자신이 자기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라면 그 어떤 명령이라도 부하들이 두 말 없이 복종하고 이행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명령은 직접 부하들의 면전에서 주어진 것이든 멀리서 서면이나 전령을 통해 주어진 것이든 상관없이 그대로 실행될 것임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친구들을 보내 예수님께 새로 말씀드리기를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6-7절) 한 것입니다.

  백부장의 이러한 생각과 말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놀랄 정도로 깊은 이해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곧 그의 이해 속에서 예수님은 신적 권위와 말씀의 능력을 지니신 분이었습니다.  그는 공간을 초월하는 권위와 능력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공간을 초월하여 말씀 한 마디로 병을 제어하고 생사를 좌우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존재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이 보통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자기 같은 이방인의 간청도 들으시고 이방인의 하찮은 노예일지라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라는 이해가 없었다면 예수님께 그를 낫게 해달라는 청을 보내는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하셨던 믿음을 보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백부장은 따뜻한 인간성과 정의로운 행실로 이미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 되어 있었지만, 신적 권위와 말씀의 능력과 함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니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거기서 오는 죄인된 자신의 깨달음과 겸손으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평가와 찬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그 백부장에 대해서 놀라워하고 찬탄하는 것으로 그치신 것이 아닙니다.  9절 문장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눈여겨봐야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예수님의 변함없는 관심을 주목해야 합니다.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을 보시자 그를 따르던 무리에게 눈을 돌리셨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를 따라다니기는 하면서도 늘 의심하고 그저 이적 보여주기만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이방인의 믿음을 보라. 너희에게는 이만한 믿음이 있느냐"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이 유대인들에게 도전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 또한 그 백부장의 믿음같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택하신 백성이라 자부하며 주님을 항상 따라다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우리는 과연 이만한 믿음이 있는가?" 자문하게 하신 것입니다.  무릇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라면 그 정도의 믿음은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던 무리에게 던지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과연 오늘 본문의 백부장이 지녔던 그런 믿음이 있는지를 자문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공간을 초월하시며 모든 시간의 주인이시고 모든 병과 죽음의 권세까지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의 모든 문제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능력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우리에게 있는가?  그런 주님 앞에서 우리는 감히 머리조차 들 수 없는 죄인임을 처절히 깨닫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모든 죄인에게 찾아오시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한이 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가?  그래서 항상 무슨 일에나 오직 그만을 바라보고 그에게만 매달리며 간구하는 우리인가?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만 있다면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개인적, 국가적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 사람들을 보내 종의 치유를 구하되 예수님께서 굳이 수고롭게 집에까지 오실 것 없이 말씀만 한 마디 해주시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했던 백부장의 믿음대로 그 종이 낫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지 그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조차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이 예수님께 보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 종은 이미 나아 있었다고 본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믿음에 주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인 것입니다.  놀라운 믿음과 놀라운 치유의 역사,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서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보기를 원하시고 또 베풀고자 하시는 은혜라 믿습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이만한 믿음이 있는가?" 물으시는 주님께 그만한 믿음으로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수 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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