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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잔을 함께 마시겠는가 (민 21:4~9, 막 10: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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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구약성서 말씀에 이런 이야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풀려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도중에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과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들어서 아시는 대로, 구약성서를 기록한 히브리어는 본래 모음이 없고, 자음으로만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막에는 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리기 때문에, 입을 오래 열면 입 속에 모래가 들어가서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한마디하고 끝내고, 한마디하고 끝내고 했기 때문에, 모음을 만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음만 연속해 놓아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른 다음에 세대가 바뀌고 바뀌면서, 옛날 자음 글자의 발음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대에 와서 학자들이 자음에다가 모음을 붙여서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구약성서의 원문을 보면 히브리어가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가 하고싶은 말은, 광야 생활 때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이라는 것이, 입을 열면 안 될 정도로 열악했다는 것입니다. 입을 닫고 살아야 했습니다. 한마디하고 바람을 쏘이지 않아야 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은 입을 닫고 사는 것이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은 입을 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보다 불평, 불만이 많았던 것입니다. 400년 종살이에서 건져내 주었더니, 그렇게 고맙다고 소리치더니, 벌써 불평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사막 날씨는 낮이 너무 덥고 밤은 또 너무 춥고, 공기는 너무 건조하여 견디기 어렵고, 걷자니 발이 아프고, 목도 마르지 않았겠습니까?

이집트에서는 종살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누울 방이 있었는데, 사막에는 방도 없고 침대도 없고,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평 불만이 시시때때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불평은 이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해방시켜서 요 모양 요 꼴로 광야에서 걱정하고 고생하게 만듭니까?"

우리가 속도를 재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칭찬하는 소리, 좋은 소리, 아름다운 소리는 파급속도가 분명히 늦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불평, 불만, 원망, 비방, 이건 굉장히 속도가 빠르게 퍼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긍정적이고 좋은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야기가 발이 달린 듯 빨리 퍼지는데, 독감이 부산에 상륙했다 하면, 어느새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독감에 걸리듯이, 나쁜 이야기도 질병 같이 오늘 우리 가슴을 산산조각으로 찢어놓으면서 발빠른 행보를 하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던 당시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불평이 꼬리를 잇고 이런저런 넋두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망각된 지 오랩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입었지만, 곧이어 다시 불평이 시작됩니다. 이 모든 불평 가운데에서 바다같이 넓고 하늘같이 높은 하나님의 가슴은 찢어집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셔서, 불평 불만에 찌든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죽이게 하셨겠습니까? 성서 말씀에 보면 수많은 사람이 불뱀에 물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분이거나, 기분 나쁘면 뱀 보내시는 그런 분이 아닌데, 오죽하면 그러셨겠습니까?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불평 불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러셨다면, 인간은 오죽하겠습니까? 불평 불만 너무 많이 해서 사람들을 찢어놓지는 마십시다. 오히려 아름다운 찬양의 소리로, 전파 속도가 늦더라도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보십시다.
이제 불뱀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자,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키고 모세에게 와서 간청합니다. "불뱀 좀 막아 주십시오." 모세가 하나님께 간청했더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처방을 내리십니다. 지금 구리로 불뱀 하나를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누구든지 그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불뱀에 물렸어도 나음을 받을 것이다." 그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낫게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종교개혁을 한 마르틴 루터가 구리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첫째로, 구리뱀은 모양은 불뱀 같으나 독이 전혀 없는 뱀을 말합니다. 그건 마치 죄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가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높이 달린 것과 같습니다. 그 어린양은 본인은 독이 없으나, 불뱀과 같은 이 세상 수많은 사람의 독, 그들의 죄를 지고 지금 골고다 언덕의 장대에서 하염없이 죽어갑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멸하기로 작정하신 모든 죄와 악이, 죽어 가는 그 구리뱀 예수와 함께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합니다. 예수만 처형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예수가 걸머진 인간의 모든 죄악이 함께 공개 처형됩니다. 이것이 골고다의 진상입니다.
셋째로, 그러므로 죄를 지은 모든 사람들, 구원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눈을 들어서 골고다 언덕에 달린 구리뱀과 같은 죄 없는 어린양 예수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요즘 "눈 높이" 얘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신앙에도 "눈 높이"가 있습니다. 신앙에서는 눈 높이를 어디에다 맞추어야 하느냐 하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나무에 달린 어린양 예수에다 맞추어야 합니다. 그 눈 높이에 맞춘 신앙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처럼, 스스로는 한 점의 독도 없으면서도, 세상의 독을 온 몸에 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려서 오늘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갑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신앙의 역사에 두 종류의 제사장이 있습니다.

한 종류의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던 광야 시절의 제사장으로, 모세의 형인 아론이 그 원조입니다. 그 원조를 계승하여 계속 대제사장들이 나왔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 성전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온 백성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년에 한번씩 반드시 성지순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메카를 순례하는 이슬람교인도,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유대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론의 후예인 제사장은 구리뱀처럼 골고다에 달리는 일이 없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제사장이 있는데, 아론이 아니라 멜기세덱으로 대표되는 제사장 계열이 그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언제 났는지, 어디서 났는지, 그 출생과 족보와 사망 연월일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단,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찬양을 드리고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던 제사장의 족보, 역사적 족보가 아닌 믿음의 족보입니다.

골고다에 달린 어린양 예수는 멜기세덱 제사장 계열에 속합니다. 아론 계열의 제사장은 제사를 집전하지만, 멜기세덱 계열의 제사장은 자기 스스로 몸을 던져서 희생 제물이 됩니다. 죽음의 독침도 스스로 맞습니다. 죄악도 끌어안습니다. 죄도 걸머집니다. 그리고 공개 처형당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을 때 모든 죄악을 끌어안고 죽기 때문에 죄악도 함께 공개 처형을 당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대제사장, 대신해 죽는 사람, 예수의 족보는 멜기세덱 족보입니다. 오늘 수난절의 이야기는 아론 족보의 대제사장 이야기가 아닙니다. 멜기세덱, 스스로 순종하고 희생당하는 대제사장 멜기세덱의 족보 예수!
제가 엊그제 WCC가 발행하는 뉴스레터를 받아 읽었는데, 그 가운데 전세계 기독교인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의 기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은 아프리카 서북부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에 사는 한 여성입니다.

이 여성은 회교 신자인데, 남편에게 버림받아 강제로 이혼을 당했습니다. 이 강제 이혼의 규정은 유대교의 율법에도 똑같이 있습니다. 유대교 율법에 보면 자기 아내가 보기 싫으면, 추한 게 발견되거든 그냥 이혼 증서를 써주고 이혼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혼하는 겁니다. 여성은 이혼을 당하는 겁니다. 회교의 율법에도 똑같은 규정이 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토라"라고 이름합니다. 회교도들은 율법을 "샤리아"라고 합니다. 토라가 됐든 샤리아가 됐든 율법 내용은 똑같습니다. 그래서 죄 지은 사람은 눈도 빼고 손도 자르라고 합니다.
자, 이 여성은 남편한테 버림받은 이혼녀, 강제 이혼녀입니다. 그런데 혼자된 이 여성이 한 살 된 어린 딸 하나를 기르고 있습니다. 어디서 딸이 생겼느냐? 남편이 없으니 간음으로 생긴 것 아니냐? 혼외 정사로 딸을 낳은 게 아니냐? 그래서 고소를 당했습니다. 이 여인은 교회의 도움을 얻어서 변호사를 사서 재판에 임했습니다. 그런데 1심 법정에서, 간음한 여인이므로 돌로 쳐죽이라는 사형 언도가 내려졌습니다. 이 여인은 변호사를 통해서 항소를 했습니다. 3월 18일, 우리 날짜로 내일입니다. 내일, 라고스 고등법원에서 항소심이 열립니다.
1심에서 변호사의 변론 내용입니다.
"이 여인이 한 살 된 여아를 데리고 있는데, 이 여인이 아이를 갖게 된 것은 강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물었습니다.
"강간당했습니까?"
"당했습니다."
"강간한 자가 누군지 압니까?"
"압니다."
"누굽니까?"
"몇 년 전에 저를 버린 전 남편입니다. 그 남자가 일 년 전에 저를 강간했고, 그래서 지금 그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제 아이가 아니고, 저를 버린 전 남편의 아이입니다. 그래도 벌을 받아야 합니까?"
판사의 선고입니다.
"이유가 어떻든 남자는 상관이 없고, 여자는 간음했으므로 돌로 쳐서 죽이는 사형에 처한다."
이 뉴스레터를 작성한 WCC의 기자가 판사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판결을 내리셨습니까?" 판사의 말은 이런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냥 두면 최후의 심판 날에 심판을 받고 엄청난 벌을 받을 테니, 차라리 지금 돌로 심판당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겁니다. 두 번째, 그러나 이 여성은 반드시 용서받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겁니다." 이게 사형 언도를 내린 판사의 말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이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의 천주교 대교구 교구장인 오코기이라는 대주교가 이 여인을 살리기에 앞장섰습니다. "정말로 이 회교도 여인을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면, 대신 내가 사형을 당하겠습니다. 나를 돌로 쳐서 죽이시오." 하고 재판정에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호소합니다. "종교, 출신, 신분을 불문하고 이 여인을 살립시다. 죽는 건 내가 죽겠습니다." 멜기세덱의 후예인 대제사장은 예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와 비슷한 대제사장이 또 하나 나타난 것 같습니다. 회교도 여성에게는 회교도 내에서는 아무런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개신교, 천주교 할 것 없이, 신자, 불신자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이 여인을 구해주려고 합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말씀, 시편 10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불쌍한 사람이 억눌림을 당하고, 가련한 사람이 폭력에 쓰러집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받는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간음했다고 잡혀간 "훗사이나"라고 하는 여인, 이 여인의 호소 역시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세상 죄를 지고 죽어 간 구리뱀 예수 그리스도는, 2001년의 골고다 언덕에서도 억울한 여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폭력, 샤리아라 이름하는 그 율법을 걸머지고 샤리아와 함께 공개 처형을 당하려 하십니다. 사랑을 배제한 율법, 그래서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율법이라면, 그 율법, 그 토라도 십자가에 달려서 공개 처형당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 보면, 세상 죄를 대신 지고, 모든 인간에게 희망과 생명을 주기 위해 골고다의 죽음으로 향하는 예수에게 두 측근이 따라 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시게 되면, 저와 제 동생을 좌의정, 우의정 좀 시켜 주십시오." 요즘 말로 하면 우리도 측근 정치 좀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 측근이 되고 싶으냐? 부활한 다음에 생명 나라에서 누가 내 측근이 될는지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서 정의롭게 결정하실 일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지금 묻는 것은, 내가 마시는 죽음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지금 받는 죽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예수께서 세상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는데, "샤리아"의 폭력과 함께 골고다에서 죽어야 할텐데, 그때 두 사람이 예수의 좌우에 함께 못박힐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독립된 이스라엘의 좌의정, 우의정이 되고 싶었지만, 예수의 말씀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두 형제가 좌우에서 함께 죽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도 요한도 불가능했습니다. 그 대신 이름 모르는 두 강도가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골고다로 가는 길, 물론 좁은 길입니다. 어려운 길이고 수난의 길입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수많은 남성들이, 배고픈 자들이, 이 세계의 5분의 1이나 되는, 하루 끼니가 없어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이 오늘 예수와 함께 골고다라 이름하는 길을 갑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빗대면,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을 살펴보면,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든 서울로 통하든, 상관없이 인생의 길을 가다 보면 봉착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길은 솔직히 말해서 무덤에서 끝납니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무덤 앞에서 자기 인생길이 완전히 끝납니다. 예수의 길도 골고다 언덕에서 완전히 끝났습니다. 골고다에서 끝난 그 길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쓴 잔을 마신 사람은 그 때문에 나와 함께 죽지만, 골고다 언덕에서 그 길이 끝나지만, 무덤에 함께 묻히지만, 그러나 그 끝은 끝이 아니다. 골고다 언덕이 흔들리고, 무덤이 열리고, 천둥이 치고, 하늘이 무너지고, 그래서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 길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길, 그 길은 무한대로 열린 길, 인간이 관여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영원이라 이름하는, 종말이라 이름하는 무덤 이후의 길! 아무도 가보지 못한 그 길로 내가 인도할 것이다. 그 길을 가기 전에 나와 함께 골고다에 가자!"
부활을 맛본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영원에 이어지는 길, 무한히 열려진 길,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길, 그 길 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예수가 걸었던 험난한 길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말합니다. "좁은 길을 택하라!"
골고다를 거친 다음에야 새 길이 열립니다. 이 새 길은 하나님이 결정하신 길, 우리는 그 길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질병과 고통과 좌절 속에 헤매고, 불의와 착취 속에 고생하는 우리 사회, 가정, 우리 자신들은 부르짖게 됩니다. "언제까지 우리는 골고다 길로 가야 합니까? 언제 골고다가 끝나고 영원한 새 길이 열립니까? 그 길을 빨리 역사 현실로 보여 주십시오."
우리가 곧이어 한 찬송을 부르겠습니다만, 이 찬송의 가사를 쓴 신앙인은 자기 자신과 우리에게 묻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데
그대들은 어디 계십니까?
지금 주님께서 쓴 잔을 마시려고 하는데
그대는 지금 어디서 그 잔을 어디서 바라보고 계십니까?
지금 천지가 진동하고, 태양은 빛을 잃고, 세계가 온통 뒤범벅이고 난리인데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주께서 지금 무덤 속에 뉘어지고 있는데
당신은 슬픈 애가라도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도망가 계십니까?
주께서 지금 무덤 문을 열고 막 나오려고 하는데
당신은 잠자고 있습니까? 좌절 속에 숨었습니까? 어디 계십니까?

"나와 함께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물음입니다. 인생의 막다른 길, 무덤만 보면 좌절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 길로 자신 있게 들어온 사람은 그 무덤 뒤편에 열린 영원한 새 길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신앙으로 깨닫는 자만 깨달으십시오.
주님께서는 라고스의 이야기에서처럼 수많은 부정과 부패와 폭력의 골고다에서 죽어 가는 죄 없는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 가셔서, 그들에게 새 길을 보여 주십니다. 수난의 현장 가운데에서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골고다로 가자. 그리고 골고다 넘어 부활의 새 길도 함께 가자." 주님의 약속입니다. 아멘
(박 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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