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71)

  • 잡초 잡초
  • 968
  • 0

첨부 1


# 1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요한복음 6장 2절을 보니, 오늘도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보니, 저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가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랬습니다. 저들 무리는 병든 자를 고쳐주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46절 이하에서, 왕의 신하의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절 이하에선,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이나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해서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어떤 병이든 다 고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결국 이 소문을 들은 온갖 병자들이 전국 각처에서 예수님께 몰려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번 문둥병을 고침 받았던 10명의 병자들 가운데 1명을 제외한 나머지 9명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갔듯, 병 고침을 받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왜? 저들의 병이 나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목적이 병 고치는 일이었는데, 병 고침을 받았으니, 더 이상 예수님 곁에 머무를 이유가 필요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요한복음 6장 66절에는 예수님을 떠나가는 저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읽어보실까요? / 6:66 / (읽기) / 문제는 표적을 보고 따라왔던 저들이 대부분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다시는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영영 떠나가 버린 거죠. 그렇게 철저하게 배신했던 거죠.

# 2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6장 22절을 보실까요? 거기 보니, 때는 이튿날이라 하는군요. 그렇다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알아봐야 하겠군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저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12절, <저희가 배부른 후에>, 13절,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랬습니다. 어제 저들 큰 무리는 오병이어의 표적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의 마음속에 엉뚱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표적을 행하는 능력자 예수님을 저들의 왕으로 모시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임금이 되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뵈니 전혀 그런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 해서 예수님을 모셔다가 자기들의 임금으로 세울 요량으로 계획을 세우고는 거사 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속셈을 알아차리신 우리 예수님, 한사코 거절하십니다. 이 땅에서 왕이 되는 것, 주님의 뜻도 아니요, 독생자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한 무리는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머리에 왕관을 씌어드리려고 합니다. 해서 우리 예수님, 그 밤으로 저들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십니다.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전해 줍니다. / 6:15 / (읽기)

그렇게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날이 밝았는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큰 무리들이 소요하기 시작합니다. 24절,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바다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더라!> 그랬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해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저들, 다짜고짜 이렇게 항의합니다. 25절,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왜 우리를 남겨 두고 혼자 가셨느냐는 거지요. 가시면 가신다 말씀이라도 하시고 가실 일이지, 우리를 남겨 두고 어느 새 여기까지 오셨느냐는 거지요. 이제 예수님 마음대로 오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거죠.

바로 그 때, 예수님이 속내를 드러내시며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26절인데요, 거기 중간에,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그리고 맨 마지막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저들의 속셈을 들켜 버렸습니다. 예수 말씀 하시기를, 너희들이 나를 찾는 이유를 내가 알고 있으니, 어제 떡과 고기를 먹고 배가 부른 까닭 아니냐는 거지요.

그랬습니다. 저들은 예수님 곁에 있기만 하면, 먹을 것이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자기 밥줄 정도로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간밤에 어딜 가셨는지, 아침에 보이지 않자 초조해 졌던 것이요, 애를 써 예수님을 다시 만나자 먼저 투정부터 터져 나왔던 것이지요.

그러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저들, 그 기적을 통해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쫓아왔던 저 무리도 종국엔 예수님을 떠나가고 맙니다. 다시 66절인데요,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다!> 거기 <제자>라는 단어에 주목하시지요. 2절에선 <무리>라 했는데 지금 저들을 제자라고 부르는 이유, 저들도 한 때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서원했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서원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 예수님을 떠났으며, 다시는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 3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솔직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왜 예수님을 찾아오셨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혹시 병 고침의 표적을 기대하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고 오셨습니까? 나는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문제는 오늘날에도 자기 몸의 건강만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무리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바라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오직 건강, 오직 출세, 오직 성공, 오직 자기만족을 위함인 경우가 많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부턴가 한국 교회 강단이 그런 인간적 욕구들을 반영하는 말씀들로만 채워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병 고침을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 살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출세하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성공하게 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수 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잘 믿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궁극적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본질상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들어가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해서 복음에 충실하면 충실할 수록 이 세상과 타협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십자가를 지고 죽는 한이 있어도, 난 예수님 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 세상엔 아직도 복음을 반대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악한 무리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 강단에선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는 메시지만 선포되고 있습니다. 말씀인지 만담인지 구분하기 힘든 경우도 많습니다. 복음을 들었는데, 내 안에서, 내 삶에서 그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고민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살아 역사하질 않습니다. 결국 하늘의 뜻은 어디가고 인간의 욕구만을 충족시켜 주려는 값싼 복음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이 한국 교회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내놓는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성도가 1천만 명이나 되건만, 십자가를 내건 교회가 5만개가 넘건만,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서울 거리에 넘쳐나건만, 우리 사회 그 어디에서도 크리스천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곤 신자든 불신자든, 세상에 나가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복음의 진리가 이 땅에서 통용되지 못합니다. 말씀의 가치가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성공을 지향하는 캔디 복음 대신 이 세상의 모순과 사회의 죄악을 폭로하고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자를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보장된 자기 미래를 다 포기하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 지고, 주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려는 진짜 제자들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합니다. <살살 해~!>

그런 끝에 결국 한국 교회는 크게 보아 말씀의 능력이 사라진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분단 60년의 한도 풀어내지 못하는 교회, 이 사회의 정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아무런 힘도 없는 교회, 이 사회의 집단적 병리 현상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인 교회,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만 큰소리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 4
그런 저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너무나 착잡하셨습니다. 하여 드디어 예수님, 작심하시고, 저들에게 천국 복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복음 6장 27절 이하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핵심적인 구절만 함께 따라 읽으며, 우리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6:27 / 6:35 / 6:40 / 한 마디로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는 거지요. 곧 죽을 이 몸의 건강을 위해 올인 하지 말고, 영원히 죽지 않을 영혼의 건강을 위해 올인 하라는 거지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영생의 떡이니 나를 먹고 마시라는 거지요. 곧 나를 믿으라는 거지요.

말씀을 듣고 보니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병 고치려고 왔는데 영생을 고민하라 하십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왔는데, 썩을 양식 위해 일하지 말고 영의 양식을 위해 일하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질 않나, 나를 먹고 마시라고 하시질 않나, 믿기만 하면 영생을 주신다고 하시질 않나, 점입가경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이제 병은 고쳐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인가? 이제 먹을 것도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인가?

게다가 유대인들은 그 말을 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해서 저들이 수군거리면서 하는 말, 42절, 아니,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가 그의 부모를 알거늘, 어찌 저가 하늘로서 내려왔다고 하느냐?

그러자 수군거리는 저들을 향하여 예수님 한 말씀 더 주십니다. / 6:44 / (읽기) / 아무라도 내게 오기만 하면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리라, 그러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내게 올 수 없느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한 관계를 털어놓으시면서, 여기에 영생의 신비가 담겨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처럼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이후의 저들의 반응이었습니다. 52절을 보니, 유대인들은 서로 다투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럴 수 없다는 거지요. 60절을 보니, 제자 중 여럿이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그 말씀, 너무 어려워서 그 누구도 알아 들을 수 없다는 거지요.

거기 60절에 어렵다는 말, 헬라어로 난해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너무 고차원 방정식의 문제라 풀기 어려워서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내가 그 말씀을 수용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왜? 자기들이 원하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병 고침의 표적을 보고 왔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따라 왔고, 해서 이젠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싶은데, 영생을 생각하라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냐는 겁니다.

그랬습니다. 저들은 병 고쳐준다고 해서 왔지, 말씀을 받으러 온 것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을 준다고 해서 왔지, 가르침 받으러 온 것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천국 복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바라고 기대하는 것, 계속 되는 표적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육적인 욕망들을 충족시켜 줄 또 하나의 표적을 바라고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왔던 것입니다. 그런 저들의 심령 속에 말씀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던 것입니다.

해서 우리 예수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할 때 천국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심령이란 것이 대개 배가 고플 때 가난해 집니다. 배가 부를 땐 그 마음도 불러, 가난한 심령이 되지 못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떡을 먹고 배가 불렀던 저들의 심령도 너무 불러서 말씀이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60절에 있는 <듣다>라는 헬라어 단어에는 <순종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 누구도 들을 수 없다는 말은, 그 말씀에 동의할 수 없고, 따라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기 어렵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은 받아들일 수도 없고, 순종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자 우리 예수님, 저들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6:61 / (읽기0 /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

잘 보십시오.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저들의 마음속에 오직 예수님만이 최고였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 같은 분은 또 없다고 믿었습니다. 해서 억지로라도 자기들의 왕을 삼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저들의 마음이 180도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 말씀이 귀에 거슬려 더 이상 따를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 했고, 애를 써서 드디어 만났건만, 그 주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 난 후 돌아서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 5
왜 떠났을까? 저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64절,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믿지 못했다가 아니라, 믿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십니다. 그런데요, 더 심각한 문제는 믿지 않다가 그만 저들이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불신이 배신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신하다 배신할 자가 스스로 떠나기까지, 강제로 내쫓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돌아서기를 기다려주신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 가장 가까운 곁에 있었으나 끝내 믿지 못했던 수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자, 이제 예수님 곁에는 열 두 제자만이 남았습니다. 다행인 것은 열두 제자가 거기 남아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끝까지 남는 제자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우리 예수님, 끝까지 남은 열두 제자를 향해 엉뚱한 질문을 하십니다. 67절,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내 말이 어려우냐? 너희도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없겠느냐? 너희도 순종하지 못하겠느냐?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의 고백과 함께 가장 위대한 고백으로 전해지는 말씀인데요, 함께 읽으며 오늘 나의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 6:68-69 / (읽기) / 두 가지 고백이군요. 주께 영생의 말씀이 계시온 즉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또 하나, 주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거룩하신 분, 곧 우리의 구세주이시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궁극적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궁극적 목적,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을 통해 주신 영생의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표적을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내 일신상의 안일함과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서의 성공과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치 철없는 어린 아이가 값비싼 가보를 엿장수에게 주고 엿 몇 가락 얻어먹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왜? 영생을 보장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날 수 없는 것, 그것은 그 분이 영생으로 인도해 주시는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요, 병 고침의 표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영생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 6
그런데 우리 예수님, 이어서 가슴 아픈 말씀을 하십니다. 70절,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71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가룟 유다는 처음에 동료들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회계 업무를 담당했었지요. 그도 처음엔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마귀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신의 꿈을 이루어주실 분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어긋나자 예수님을 불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불신이 배신으로 악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예수 믿는 것을 팔지 않았는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모른 척 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마귀의 조종을 당한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는 질문에 유다는 아니라고 하지 못하고 그냥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영생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입니다. 거룩하신 분, 우리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삼고, 주와 함께 영원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시간 예수님께서 나에게 물으십니다. <너도 가려느냐?>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신 말씀 마음에 새기며, 기도로 주님께 응답하시겠습니다. 아멘! (장  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2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