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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막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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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23살의 콜린스(Collins)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운동선수였던 그는 코치가 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야영을 가서 강변에 있는 나무에 올라갔습니다. 흐르는 강물이 너무 시원스럽게 보여 순간적으로 다이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강물이 너무 얕아 강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게 됩니다. 눈을 떠보니 병원입니다. 간신히 숨을 쉬고 음식을 씹거나 말하는 것만 가능하게 됩니다. 의사가 말합니다.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어 평생을 전신마비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내 인생은 끝났구나” 하며 한없는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팔에 부착된 특수장치를 통해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 이라는 단어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전신마비가 되었는데 이런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단 말인가? 나같이 쓸모 없는 인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선한 일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콜린스는 곧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주님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그는 일생을 주님께 맡기기로 작정했습니다.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콜린스는 현재 주님을 찬양하는 복음송 가수가 되어 앨범을 발간하고, 수많은 교회에서 찬양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비록 전신마비의 상태이지만 믿음을 통하여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의 빛을 모든 장애인들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단지 복음서에 나타난 흔한 치유의 사건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반드시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고 교훈 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은 너무 막연합니다.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고함을 치며 부르짖어도 위기를 만나면 두려워합니다. “내가 주님을 확실히 믿습니다” 라며 두 주먹 불끈 쥐고 눈을 부릅뜨고 고백하여도 부정적인 현실이 눈앞에 닥치고 장애물이 앞을 가로막으면 두려워하며 쉽게 흔들려 버립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야이로 회당장이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와서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열 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어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지체되었을 때 야이로의 집에서 소식이 옵니다. “당신 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더 이상 괴롭힐 필요가 없습니다”. 야이로는 이 말을 듣고 절망합니다. 흔들리며 두려워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운 일이 있습니까? 절망의 환경입니까? 이 시간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찬양합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고침 받았습니다. 죽었던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는 주님의 말씀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선교지를 방문하였습니다. 선교사님이 선교비가 부족해 십일조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목사님은 선교사님께 “아무리 어려워도 십일조는 해야합니다. 이제부터라도 꼭 하세요. 만약 생활비가 모자라면 전화하세요. 그러면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그 선교사님은 목사님의 약속에 용기를 얻어 십일조 생활을 하였는데, 생활비가 모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일년 뒤 귀국해서 그 목사님을 만나 “목사님 말씀대로 했더니 생활비가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더랍니다. 그 때 목사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선교사님,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내 말은 그렇게 철썩 같이 믿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은 믿지 못하였습니까?”

믿음이란 영적 감각입니다. 육체에 시각, 청각, 촉각이 있듯이, 영에는 믿음의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만져야 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오직 믿음의 감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에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를 절망케 하는 사건, 우환과 질고,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때로는 생각지 않았던 삶의 문제들이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이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물질이나 지식이나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염려하며 삽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인사법에도 “염려 덕분에 잘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염려해 주고 걱정해 주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염려하는 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성도들은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믿음의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있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어떤 두려움도 능히 이길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내어놓아야 합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때 필요한 것은 의사를 신뢰하고 모든 증상을 숨김없이 내놓아야 합니다. 옷을 벗으라면 벗어야합니다. 만일 의사 앞에 선 환자가 “나는 대학교수인데, 나는 장관인데, 어떻게 옷을 벗을 수 있느냐고. 그래도 사회적 위치가 있는데” 라고 말한다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환자는 의사 앞에 자기를 그대로 내어놓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본문의 야이로를 보십시오. 22-23절을 보면,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 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라고 간청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기의 엎드렸다는 것은 항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야이로는 자신의 문제를 주님께 내어놓았습니다. 23절을 보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라고 합니다. 그는 한번만 요청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간청했다는 말입니다. 간절히 매달린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이요, 회당장인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자신의 죽어 가는 딸을 살리기 위해 체면을 버렸습니다. 지위도 버렸습니다. 자존심도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예수님께 나와 엎드려 요청했습니다. “오셔서 내 어린 딸을 고쳐주소서”. 참 으로 귀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내게 오시옵소서” 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합니다. 교회와 멀어지고 자기 성을 쌓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가지려면 자아를 깨뜨려야 합니다. 얼마나 자기 고집, 자기 체면을 극복하느냐가 기적의 관건입니다. 언제나 주님에게 문제를 내어놓으며 “내게 오시옵소서” 라고 요청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 절망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상황은 끝났습니다.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철저한 절망의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가십니다. “회당장의 집에 가시사 헌화함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듣고 예수께서 들어가시사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훤화란 말은 ‘소요하며’ 의 뜻입니다. 죽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합니다. 통곡 소리가 들리며 혼란해 합니다. 이는 절망의 환경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현재 시제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계속해서 믿어라. 계속해서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다면 기적이 일어나리라” 의 뜻입니다. 최악의 절망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끝이지만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기만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죽은 심령을 일으키십니다. 죽은 신앙을 일으키십니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기적을 체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영화관람 하듯 구경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수준에서 이해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처럼 “더 이상 선생을 괴롭게 마옵소서. 예수님이라도 이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사람이 먼저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야이로에게 말씀합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네가 끝까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기적을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현실을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야이로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계십니까?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여 어려운 상황과 환경에서 일어나는 달리다굼의 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달리다 굼의 ‘달리다’ 는 아람어로 ‘작은 소녀’ 이며 ‘굼’은 ‘일어나라’ 는 뜻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굼’ 하셔야 합니다. 부디 이제부터는 두려움대신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복된 삶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광 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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