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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왕하 6:14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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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습니다. 아람 왕은 곧 바로 전쟁에서 패배의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아람 왕의 모든 계획을 미리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오직 하나 엘리사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은 지금 엘리사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신하 중에 하나가 대답하기를 그가 지금 도단이라고 하는 성에 머물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람 왕은 많은 군사와 말과 병거로 하여금 도단 성을 포위케하고 엘리사를 잡으라고 명했습니다(왕하 6:13-14).
그날 밤에 엘리사 선지자가 있던 도단 성은 아람 왕의 군사들로 말미암아 에워싸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쯤되고 보니 엘리사는 도단 성에서 꼼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를 수종드는 사환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나머지 엘리사에게 다급히 보고했습니다. 도단 성의 위기를 직감한 사환은 엘리사에게 "아, 아, 내주여 어찌 하오리까"하고 공포와 절망의 비명을 질렀습니다. 사환의 급보를 전해 받은 엘리사는 사환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있는 곳에 보이는 것은 사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엘리사와 그의 사환은 안타깝게도 동질성이 파괴되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한 사건을 보고 두 사람은 생각하는 것과 보는 것이 달랐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시각의 차이 때문에 표현이 다르고 행동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왕하 6:18).

이때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었습니다(왕하 6:17). 눈이 열리자 사환은 전과는 다른 상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했습니다(왕하 6:17). 얼마 후에 도단 성을 포위한 아람 군대는 엘리사를 잡기 위하여 접근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기를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엘리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그들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왕하 6:18).

눈이 어두워진 아람 군대 앞에 엘리사가 나가서 아람 군대에게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 성에 이르게 했습니다(왕하 6:19).
사마리아 성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다시 기도하여 이 무리들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저들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신들이 사마리아 가운데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왕하 6:20).

Ⅰ. 인간에게 있는 본능적(本能的)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자연적인 눈입니다)

요한복음 9장 11절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본능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생물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동작이나 운동이라고 정의 합니다.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신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된 자의 눈을 열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에게 육신의 눈을 열어서 당신이 지으신 각양 오묘한 피조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눈은 현실을 아무런 이해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투영하는 눈입니다. 이 눈은 모든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육안입니다. 색깔, 모양, 크기, 깊이, 높이, 넓이, 원근을 직시하는 눈입니다.

대체로 본능이라고 하면 거칠고 감정적인 기복에 좌우되는 성질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실상 본능은 그 어떤 균형 잡힌 이성보다 일의 방향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본능은 학습이나 외부 여건에 관계없이 본래 가지고 있는 생득적 능력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능의 원리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진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엘리사도 엘리사의 종도 모두 육안이 밝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람 왕의 많은 군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람 군대들도 육안이 밝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 가운데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눈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피조세계와 그의 활동을 보기 위함입니다.

Ⅱ. 미래를 예측하는 이성적(理性的)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문화적 사명의 눈입니다)

본문 6장 15절에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 쌓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성(理性)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 혹은 실천적 원리에 따라 의지와 행동을 규정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엘리사의 종은 미래를 통시하는 이성적인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은 다가올 미래를 눈으로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선생 엘리사가 아람 군대에게 잡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참한 모습으로 역사적 전범자가 되어서 참혹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줄 아는 눈입니다. 그 결과 자기의 선생 엘리사에게 가서 "아, 아, 내 주여 어찌하리까"라고 하는 절망의 탄성을 발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러한 눈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나름대로 계산된 역사적인 통찰력이 있는 지적인 눈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러한 지성의 눈을 주어서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육의 눈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눈을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과학의 눈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성적인 눈을 가지고 과학문명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물위에 나무가 뜨는 것을 보고 배를 만들었습니다. 바다 밑을 보기 위해 잠수함을 만들었습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수증기의 힘을 보고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는가 하면 공중의 나는 새를 정복하기 위해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지성의 눈이 열려야만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개발하고 다스리는 문화적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육안만 가지고는 문화적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Ⅲ. 초자연적인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신령한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여시매
1) 하나님의 군대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 6장 17절에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 불말과 불병거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군대를 말합니다.
엘리사의 종은 아람 군대가 도단 성을 에워싸고 있는 이 절박한 상황을 자기의 선생 엘리사에게 보고했습니다. 엘리사가 자신의 생각과 공감하면서 어떤 자구책을 모색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본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반응은 엉뚱하게 나타났습니다.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이 말은 나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한 자가 저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환이 볼 때 자기의 선생 엘리사의 말은 비현실적이요 비과학적이요 비생산적인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자리에는 자신과 엘리사 이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도단 성을 에워싸고 있는 아람 군대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그럼에도 엘리사가 자기의 사환에게 두려워 말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육의 눈, 이성의 눈은 밝았지만 영안이 닫혀 있는 사환에게 도무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사환의 눈을 열었습니다. 이제 눈이 열린 사환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눈을 여시매

2) 하나님의 군대가 엘리사를 둘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 6장 17절에 {…엘리사를 둘렀더라}고 했습니다.
아람 군대는 도단 성을 에워싸고 있지만 아람 군대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군대는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기 위해 도단 성을 포위할 때 하나님은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하여 불말과 불병거를 급파하여 엘리사를 둘러싸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엘리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아람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대로 아람 사람들의 눈이 어둡게 되어 주위를 분간할 줄 몰랐습니다. 엘리사는 이들을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다시 이들의 눈을 열어달라고 했습니다. 아람 사람들이 보니 자신들이 적진 깊숙한 곳 사마리아 가운데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왕이 흥분하여 엘리사에게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치지 말고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아람 군대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초에 에덴동산의 인간을 뱀이 밝은 눈을 조건으로 유혹했습니다. 뱀에게 유혹되어 마침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여자가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눈이 밝았습니다. 그 눈은 신령한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사물을 보는데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의 판단이 선악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육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육의 눈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세계를 보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에게 선과 악을 결정할 권이 있습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정할 권이 없습니다. 선악의 결정은 하나님의 일인데 인간이 그 일을 하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인간은 벗은 몸이 정상이었습니다. 범죄하고 나서 벗은 것이 부끄러운 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본능적인 눈만 밝아지면(열리면)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의 눈은 곧 합리적인 눈입니다. 이성의 눈은 제법 신령한 척 하지만 초자연적인 눈이 아닙니다. 철저히 과학적인 눈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으로는 그 과학자체에 머무를 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인간이 취하는 죄를 범할 뿐입니다. 문화적 사명의 절정인 개발하고 다스려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장적 사명을 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적 사명이 빠지면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문화적 사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사명으로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의 눈은 밝은 육의 눈과 함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실천적 원리에 따라 철저히 의지와 행동을 규정하는 능력의 눈입니다.
육의 눈과 이성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육의 눈과 이성의 눈의 불충분성입니다. 그러나 육의 눈의 기능이 필요하고 이성의 눈의 기능도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세계는 영의 눈이 밝아야 볼 수 있습니다.
육의 눈과 이성의 눈만을 가지고 발락을 따라가던 발람은 영의 눈이 어두운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발람이 탄 나귀의 눈을 여실 때 발람의 눈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자신이 타고 다니던 나귀보다 못했습니다. 마침내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습니다(민 22:31)
육의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인 성경을 볼 수 없습니다.
이성의 눈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들을 수도 없습니다.
에스라 9장 8절에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로 종노릇하는 중에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선견자 갓은 인본주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역대상 21장 16절에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3장 8절에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3장 18절에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2절에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말을 알았더면 좋을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이 숨기웠도다}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1절에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 8절에 {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한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 16절에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9절에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눈을 열고 닫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을 열어 보게하소서 라고 타율적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육신의 눈도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아야 하나님의 피조 세계의 역할과 기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미래를 통시하는 역사적 통찰력이 있는 이성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문화적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그래야 임마누엘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마누엘 현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주님의 몸된 교회운동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습니다. 본능적인 자연인의 눈, 즉 육의 눈은 영의 눈이 보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영의 눈이 열려야 영의 생각을 하게 되고 영의 일을 하게 됩니다.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세상이 못 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세상에서 못 듣는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못하는 말도 하게 됩니다. 마침내 세상이 할 수 없는 크고 기이한 일을 하게 됩니다. -아 멘 -
(강 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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