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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고향을 찾는 사람들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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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올라온 글에 보니까 추석을 맞이하는 어느 남편의 일기가 있었습니다.  시간상 일부분만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벽에 걸린 달력 보니 어이쿠야 추석이네
짐 싸면서 투덜대는 당신보고 괴로웠네
마누라야 니만 되나 눈치보는 나도 되다
아내들은 육체 노동 가장들은 마음 고생
욕을 해도 추석 가고, 웃고 가도 세월 간다.
속 편하게 보여지는 직장 얘기 들어보게
직장에서 더러븐 꼴 속속들이 밝혀봄세
봉급쟁이 오장육부 시꺼멓게 다 탄다네.
자네 조금 참아주니 온 집안에 칭찬 자자
당신 얼굴 밝게 하니 보름달이 따로 없다
이번 추석 마치거든 우리 둘만 시간내자
이리 옆에 오려무나 내 팔 베개 빌려 주께.

고향!  말만 들어도 우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단어입니다.  특히나 우리 민족은 친족, 혈연 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고향이 갖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그래서 명절 때만 되면 고향을 찾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나라 전체가 시끌벅적합니다.  한마디로 민족의 대 이동이 이루어집니다.  이맘때면 아무리 교통 정책을 잘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대 혼란이 일어납니다.  4시간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12시간, 혹은 그 이상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찾는 사람들의 꼬리는 멈추지를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고향이라고 하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지역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사용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고향에 가면 조상들의 향취가 있습니다.  고향, 거기에는 우리들의 삶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아끼고 자랑을 합니다.  그래서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지나가다가 고향 사람을 만나면 부모 형제를 만난 것처럼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저 고향이 같다는 이름 하나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주위에는 오늘도 고향이 있음에도 가지를 못하고 애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북에 고향을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북한이 고향인 사람들은 임진각이나 통일전망대에 올라가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고향이 너무도 그리워서 향수병에 걸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못 가는 고향을 안타까워하면서 눈물로 지새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네 민족이 가지고 있는 고향의 의미입니다.  평생을 외국에서 살던 사람들도 죽으면 고향에 묻히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네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이 있다는 것은, 돌아가 쉴 고향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풍요롭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향이 있고 그래서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의 고향의 의미는 우리의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에 끝이 납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들이 찾아가야 할 진정한 고향, 영원한 고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십니까?  우리 인생이 진정으로 찾아가야 하고, 또 훗날에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말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우리의 고향은 일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고향이 아닙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우리들에게 말씀하는 고향도 그런 고향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표준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네가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1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오늘 봉독한 본문을 살펴보면 다른 고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들이 갈망하고 애타게 그리는 고향은 과거에 그들이 살았고, 떠나왔던 그런 곳이 아닙니다.  명절이면 가보고 싶은 그리움과 추억이 담겨져 있는 곳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고향은 앞에 있는 곳, 그리고 우리의 인생들이 그곳을 향하여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나아가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찾아가고 있는 고향"이라든가 "갈망하고 있는 곳"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코 "뒤돌아보게 되는 고향"이라든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떠나온 그곳을 결코 고향으로 생각하지를 않았다"는 매우 강력한 어투의 말로서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고향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의미의 고향과는 거리가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돌아가야 하고 또 찾아야 할 고향은 어디입니까?  본문 16절에서는 우리 인생들이 찾아가야 할 고향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저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본문의 히브리서 11장은 "믿음 장"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믿음을 따라 살다가 간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시작하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같은 믿음의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고향은 본래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그를 불러 떠나라고 한 이래로 그는 이 갈대아 우르를 절대로 고향으로 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나은 고향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만이 그러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신앙의 선진들이 다 그와 같은 자세로 일평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바로 살았던 이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모한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늘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곳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생각하는 공간적인 하늘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서의 하늘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이 하나님의 약속의 표현인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간절히 바라보는 고향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곧 인간의 부족한 뜻이 완전히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그런 세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이 세상을 떠나서 가게 되는 장소 천국인 영원한 하늘나라도 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 세상 속에서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순간 순간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된 세상이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의 완성은 미래의 것이지만 그러나 오늘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성도들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본문에서는 이것에 대한 해답을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그리고 16절을 여러분께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한 때 우리 사회에서 한창 유행되었던 노래 가운데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자못 심각한 말로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을 보면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그것이 인생이라고 하면서, 아예 정과 미련을 두지 말자고 하는 노래입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공감을 하였기에 한동안 이 노래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불리워졌고 인기를 얻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아무리 불러 보아도, 들어보아도 속 시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일시적인 감정으로 감상적이 될 수는 있을는지는 몰라도 이 노래가 우리의 영혼 깊은 곳에서 새로운 힘을 솟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노래 가사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인생이 "떠돌다 가는 구름 같은 허무한 존재"라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허무하게 떠돌다 가는 인생들이기에 모든 죽음 앞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은 모두가 한을 남기고 간 아쉬움들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나그네들은 슬픔과 눈물로 인생을 마칩니다.  후회와 한을 안고 마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슬픔과 눈물로 인생을 마치지 않습니다.  결코 믿음의 사람은 한을 품고 인생을 끝내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주님이 부르시면 기쁨으로 올라가 사랑하는 주님을 만나게 되는 삶을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믿는 성도들과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과의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더 나은 본향을 향한 소망을 품고 승리하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순간순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결코 이 땅 위에 정처 없이 떠돌다 구름처럼 흩어질 의미 없는 인생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다가 가면 되는 그런 인생들은 더더구나 아닙니다.  그저 하룻밤 자고 떠나가는 여름의 나그네들처럼, 그래서 아무런 책임도 없이 오물을 남기고 떠나가는 그런 인생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조만간 죽음 뒤에 펼쳐질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은 그렇게 의미없는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은 이 땅 위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에 지나치게 민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습들은 때가 되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자신을 쳐 복종시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하늘에 있는 것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관심사이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출세를 할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까?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날까?  좀 더 쉽게 살수는 없을까?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생활이 좀 넉넉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남들처럼 풍요롭게 살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가치를 정해 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생의 진리를 깊이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들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니까 제 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다 누리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장차 성도들이 누릴 본향에서의 영광스러운 삶에 바라보면 비교도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받는 환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세상은 잠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끝까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인내의 경주를 잘 마치자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좀 더 출세를 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더 나은 배우자를 만나고, 그리고 무엇을 성취해 보려는 것이 결코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해야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것을 추구하든지 보다 중요한 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가령, 고향을 떠나 온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장차 훗날에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결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저 살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해서 삽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고향에 다가 땅을 삽니다.  왜냐하면 내가 훗날에 돌아갈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신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자세가 이러하다면 영원한 본향을 그리워해야 할 믿음의 사람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솔직히 오늘 우리들 주변에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도 교회의 직분까지 가진 사람들이 영원한 본향을 잊어버리고 세상과 벗하면서 현실에 집착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영원한 본향인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시 잠깐 후면 없어질 것을 붙잡고 몸부림치며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도대체 영원한 본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51세 되는 중국계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이민을 와서 남달리 성공한 사례에 속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가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저축하고 증식하는 데만 즐거움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의 매일의 일과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조간을 펴 들고 증권시장의 변동에 신경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파티에 가면 자연히 친구들과의 대화 내용도 모두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러다 그는 장래성이 있어 보임직한 불모지 몇 에이커의 땅을 싼 값에 샀습니다.  그후 5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자리에 하이웨이가 생기게 되는 행운을 맞아 엄청난 돈으로 팔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수백만 달러의 횡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서 매일 매일 더 많은 재산을 늘리기 위한 꿈으로 마음이 벅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재산을 얻게 된 후 2주일만에 그는 심장마비로 그 많은 돈을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는 데도 동정이 가지만, 그러나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본향을 생각하며 살았던들..... 하는 아쉬움이 앞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이 있습니다. 유리 수정 바다가 펼쳐져 있고, 열두 진주 문이 있는 아름다운 본향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실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하늘 나라를 바라보는 우리들은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나그네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도 떠돌다 가는 구름 같은 허무한 존재처럼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그리워하며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의 본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바로 서서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 앞에는 수많은 시험과 환난과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만이 겪는 시련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보다 앞서 간 믿음의 선조들도 이 같은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브라함도 겪었습니다.  이삭도 겪었고, 야곱도 겼었습니다.  어쩌면 믿음의 선조들은 우리들이 겪는 고난보다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고난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그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겨내었던 사람들입니다.

본문 15절을 다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의 뜻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선진들이 나그네 생활이 어려워서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 본토 친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쉽고 편안 삶을 살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향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그것을 사모했습니다.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더 그리워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이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나그네의 삶이 어려워 언제라도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또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는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마치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을 배반하고 떠나갔던 데마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이 피곤하고 힘들다고 해서 이 길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더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충성된 삶을 갈아갈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 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살아가는 나그네의 삶은 고난의 삶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부터 38절에 보면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는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받았던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꿈과 희망이 있는 곳이 아니며 궁극적인 관심의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천성의 본향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언제나 고독한 곳이 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땅은 더 이상 미련을 둘만한 곳이 못됩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땅의 삶은 순간 순간이 결단의 삶이어야 합니다.  육체적 즐거움을 쫓아 좀 더 놀고 싶어도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기에 절제해야 합니다.  안목의 자랑을 쫓아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사치를 하고 싶어도 영원한 하늘의 본향을 그리워하기에 참아야 합니다.  장차 가게 될 영원한 본향에서 더 아름다운 상급을 바라기 위해서 더 많은 헌신과 투자를 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의 삶은 매 순간이 순교적인 삶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본문 11장은 믿음장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도 살아오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갈 곳도 모르고 그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그 말씀에 의지하여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70여 년의 긴 세월동안 정들었던 고향을 뒤로하고 비록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믿고 길을 떠났습니다.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길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조카 롯의 가족이 멸망당하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인생의 역경을 헤쳐온 그를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한 마디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이겼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은 본향에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고대광실보다도 더 좋은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사십시오.  시편 84편에서 기자는 영원한 본향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습니다"(84:10)  시편 기자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명절을 지내기 위해서 고향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이제 오늘 저녁이 되면 하나 둘씩 떠나갈 것입니다.  수많은 차량 행렬들이 각자의 일터를 향해서 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한동안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고향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것입니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인간의 육신의 고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영혼의 고향을 잊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는 이 땅에서 나그네된 삶을 정리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더 나은 본향, 우리 영혼의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주 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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