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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익한 자 (몬 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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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중의 하나가 휴대폰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휴대폰을 가진 사람의 숫자가 3천 3백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작년 통계니까 아마 한해가 끝나 가는 이 시점에서 보면 더 많아 졌을 것입니다. 3사람 중에 2사람이상이 휴대폰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청소년의 경우에는 10명중 9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연세가 많으신 분도 갖고 있고, 이젠 초등학생도 많이 가지고 다닙니다. 아이들이 선물로 가장 받고 싶은 것이 휴대폰이라는 것입니다.

  휴대폰이 이렇게 많다보니 공해현상이 종종 일어납니다. 지하철에서 이곳저곳에서 울리는 휴대폰소리에 아주 짜증이 납니다. 음악회나 연주회에서 집중해야할 상황에 울리는 휴대폰 때문에 공연을 망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 때문에 노이로제 현상까지 나타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벨소리가 예배시간에도 가끔 울린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 중의 하나가 휴대폰입니다. 아예 꺼놓던지, 가지고 오지 말던지 해야 합니다.

  휴대폰이 이런 역기능이 물론 있지만, 이것의 순기능이 더욱 큽니다. 휴대폰으로 이룬 경제성장, 인간관계개선, 생활의 편리, 정보제공, 건강체크, 범죄의 예방등은 지금까지 높이 평가되는 부분입니다. 휴대폰을 좋은 쪽으로 사용하면 귀한 물건입니다. 인간 삶에 이것만큼 편리한 물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휴대폰은 현대 사회에 가장 유익한 물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유익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부름의 목적에는 바로 우리를 유익한 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교회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유익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직까지 여기에 남아 있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유익한 자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은 그를 소개하면서 ‘유익한 자’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일에 유익한 자로 살았을까요? 본문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몇 가지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을 위한 유익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울을 위한 유익했던 것이 바로 오네시모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빌레몬서는 1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말씀입니다. 여기에 3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편지를 보내는 바울과, 편지를 받고 있는 빌레몬, 그리고 편지의 내용을 이루는 오네시모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 말씀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주인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당시 사회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이런 사람은 잡히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어느 날 바울을 만났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주님을 영접한 뒤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했고, 바울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이제 오네시모가 주님을 만난 뒤 뭔가 자유롭게 일을 하고 싶은데 주인의 용서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풀어주라고 탄원하는 것이 빌레몬서의 중심내용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소개하면서 그가 전에는 무익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나와 너’를 위해서라고 강조합니다.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그를 ‘심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심복이란 말은 바울의 마음 중심에 늘 자리잡고 있던 사람이란 뜻이고, 나아가서는 바울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일꾼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오네시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위하여 꼭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이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위대함을 인정합니다. 그가 남긴 업적과 공로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없이 세계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열정과 헌신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예수를 믿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큰 일을 감당하게 된 것은 바울 만의 공로가 아닙니다. 바울을 도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그를 도운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그들의 도움과 격려와 힘이 바울을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바울이 지치고 힘들 때, 낙심될 때, 육신과 영혼이 고통을 받을 때, 바울은 물론 주님의 격려가 있었지만 사람들의 위로도 놀라왔습니다. 그 위로를 받으면서 다시 일어났고, 힘을 내었고, 용기를 가졌던 것입습니다. 바울은 평생 잊지 못할 사람들 때문에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중에 오네시모가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을 위하여, 사람을 위하여, 유익한 존재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9. 11테러가 난지 꼭 4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벌써 세월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습니다. 테러가 나던 날 새벽잠을 설치며 참혹한 광경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아름답고 높은 빌딩이 한순간에 재로 변한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 일로 수 천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더욱 큰 충격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한인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들과 딸을 한순간에 잊어버리고 눈물과 한숨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고, 그날의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까? 그것은 사람을 존귀하게 생각지 않던, 세상에서 가장 무익한 자들이 저지른 만행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하워드 헨드릭슨은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 믿는 자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가장 귀한 일로 사람을 온전히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바르게 이끌어주는 멘토가 되라는 것입니다. 유익한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나는 어떤 자로 살아야 합니까? 나는 사람을 위하여 어떤 존재입니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나는 유익한 존재입니까? 지치고 힘들 때, 어렵고 낙심될 때,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유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걸어가셨던 삶이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오네시모처럼, 바울처럼, 앞서간 신앙인처럼, 사람을 위해 유익한 존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교회를 위한 유익입니다. 바울이 여기에서 오네시모를 유익한 자라고 부른 것은 바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교회를 위한 유익한 자인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여러 지역을 돌면서 세운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필요한 일군을 세웠습니다. 마가나 에바브라나 실라 디모데와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해서 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오네시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레몬서에서는 그가 바울과 함께 한 것으로 끝나지만 전통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용서를 받고 다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빌레몬이 세운 작은 교회에서 이름없이 빛도없이 충성하다가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교회를 위하여 유익한 자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수고와 열정과 땀과 눈물로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수고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사람을 위한 유익도 중요하지만 특히 교회를 위해서 유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고, 교회가 하나되고, 나를 통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이 일에 쓰임을 받아야 하고, 이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로 모인 교회가 정말 좋은 교회요, 성장하는 교회요, 가고싶은 교회요, 건강한 교회입니다.

  세상에 교회만큼 독특한 특징을 가진 공동체가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교회를 비난해도, 교회 만한 공동체가 없습니다. 교회가 다른 공동체에 비해 다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공동체는 자기의 유익을 구합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없으면 소속이 되지 않습니다. 직장도, 단체도, 정당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그 저변과 내면에는 자기유익이 깔려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이 없는데 헌신하는 공동체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자회를 끝내면서 저는 이것을 실감했습니다. 이렇게 밤과 낮으로 수고하면 일당을 주어도 많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일당을 달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자회를 하면 우리 교회 교인들이 거의 다 물건을 삽니다. 물론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도 많지만 많은 부분을 우리 교인들이 담당합니다. 자기 돈을 내어 물건을 사고, 시간을 투자하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물건을 팔다가 원가에 못 미치는 경우가 생기면 자기가 물어냅니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일년에 한번 있는 휴가를 자기나 가족을 위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공동체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한다면 도저히 몸담을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헌신 자를 통해 교회는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유익으로 섬기며 사셨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하여 유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에게 분명 세상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상급이 있습니다. 위로를 받으시고 힘을 내셔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자의 길을 걸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복음을 위한 유익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 달라고 소개하는 가장 큰 이유를 13절에서 밝힙니다. 바울이 오네시모가 유익한 자인데 물론 자신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유익한 자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자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복음을 위하여, 이것이 오네시모를 용서할 큰 이유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만난 뒤 그는 복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복음을 위하여 살고, 복음을 위하여 유익한 자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복음을 위한 삶의 모습에는 바울이 빠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평생 그것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땀을 흘렸고, 씨를 심었고, 여행을 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옥에 갇히고, 매도 맞고,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평생 즐기던 것, 좋은 것, 다 배설물같이 여겼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결국 피를 흘리면서 죽었습니다. 바로 복음을 위하여 바울이, 오네시모가, 신실한 사람들이 유익한 자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복음에 거치는 사람, 다른 하나는 복음을 위하여 쓸모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나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복음을 위하여 나는 유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무익한 사람입니까? 나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로 인해 오히려 복음이 막혀지고 있는 것입니까?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욕되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늘 이것에 초점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가 위대한 사도로 아름다운 일생을 마치게 된 것은 그의 업적이나 명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는 신앙의 분명한 의미를 알던 사람입니다. 삶의 방향과 초점이 뚜렷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 함께 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했고, 평생 복음을 위해 거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다짐했습니다. 그는 자기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거나 욕되지 않기를 몸부림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기에 고린도 교회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을 보자 이렇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신자를 보고 주님을 알게됩니다. 물론 사람이 표준은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도 완벽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불신자에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자를 향하여 가장 많이 지적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도 똑같더라, 아니 더 하더라, 더 욕심 많고, 더 속이고, 더 잘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나를 향해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오고, 구원을 얻는데 나는 거치는 자입니까, 아니면 통로가 됩니까? 방해자입니까, 아니면 공로자입니까? 진정 복음과 영광을 위하여 나는 유익한 자입니까, 아니면 무익한 자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압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보시고, 인자한 귀로서 기울이십니다.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남은 생애동안 오네시모처럼, 바울처럼 유익한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유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굳게 다짐하면서 다시 한 주간의 삶을 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 해 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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