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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만져주심 (마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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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상설교가 끝나고 마태복음 8 장으로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8 장과 9 장에는 모두 10 개의 기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8 장에 5 개, 9 장에 5 개입니다. 특히 마태복음에 나오는 기적이 8 장과 9 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산상설교를 마치고 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 장 마지막 말씀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설교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이는 따분하게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비교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서기관들은 성경에 능통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옛 선조들의 어록을 인용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르침에는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능통하고 있으면서도, 그 율법을 능가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율법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들었던 말씀과 크게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의 새로운 장을 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신약의 말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새로운 말씀의 기초를 열 사람은 오직 한 분입니다. 바로 메시야뿐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산상설교를 마치고 이어서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베푸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메시아는 놀라운 말씀뿐만 아니라 기적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면 메시아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8:17 절에 이 병자들을 고치신 사건을 구약의 예언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8:17 절 말씀을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장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이런 기적을 행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한센환자를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을 나병 혹은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은 병명을 번역할 때 과격한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 번역하면서 병명을 부드럽게 바꿨습니다. 요즘 나오는 개정판에서는 문둥병자를 나병환자 혹은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소경을 맹인이라고 합니다. 벙어리를 말 못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한센환자를 고치고 나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 있는 대로 율법의 전통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모세의 율법보다 한 차원 높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시켰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한센환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확증을 제사장에게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센병은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병입니다. 어원을 보면 레피스라는 단어인데 고질적인 피부병이란 뜻입니다. 이 병은 한번 걸리면 낮지 않는 불치병입니다. 구약 성경에 오직 이 병이 나았다는 기사는 두 번밖에 없습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다가 한센병에 걸렸습니다. 모세는 누이를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낫게 됩니다. 또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한센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해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고 나았습니다.

이 한센병은 얼굴과 몸이 얼마나 추악해지는지 모릅니다. 온 몸에 진물이 나면서 마디가 끊어져 나갑니다. 손과 발에 감각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통증도 모릅니다. 털까지도 사라져 그 모습은 너무 추악해집니다. 이 병은 뼈와 신경에도 손상을 입힙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이 병으로 잘 죽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생만하고 잘 죽지도 못하는 병입니다. 그래서 저주받은 병으로 여겼습니다.

거기다 전염성이 강했습니다. 지금도 이 병의 정확한 전염 경로를 모르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병에 걸리면 쫓겨났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사는 집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혹시 사람들을 만나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외쳐야 했습니다.

(레13: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우연히 그들을 만나는 사람도 덩달아 부정해집니다. 진밖에 나가서 그 부정을 씻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그들을 산송장 취급했습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말씀에 감동을 받은 무리가 주님을 쫓았습니다. 그 때 한 한센환자가 주님께 나아와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청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한센환자의 용기와 믿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선 그는 무리 가운데 함께 할 수 없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무리에 섞여 있었습니다. 아무리 거적을 뒤집어써도 오래 동안 씻지 못한 냄새 때문에 위장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사람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할지 모르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씀과 치유를 사모하는 열정으로 주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모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겸손하게 아뢰었습니다. 그는 당장 고쳐달라고 외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대부분의 병자들은 병 낫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주님께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주님이 원하셔야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엎드림은 겸손한 엎드림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번째 기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첫 번째 기적은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첫 번째 기적은 오늘 본문의 이 한센환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어떤 기적이 가장 먼저 일어난 기적일까요? 성경은 기록한 사람의 신앙과 관점에 따라서 적혔습니다. 역사적인 순서대로 적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센환자의 치유 사건은 예수님 선교의 아주 초기에 일어난 사건임에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병 낫기를 원하면 내 앞에 나아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까지도 예수님은 단지 설교를 잘하는 선생 즉 랍비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센환자는 어떻게 예수님이 자기 병을 낫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예감했을까요? 나아만 장군을 낫게 한 엘리사 같은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일까요?

그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권능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말씀 속에서 아~! 이 분은 이 병을 낫게 하실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용기입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으면 못합니다. 걸리면 낫기를 포기해야 할 병이었습니다. 낫는다면 반드시 기적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기적의 주님으로 알려지기 전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께 나아온 모습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의 나아옴은 기적을 부르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온 그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많은 기적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나타내신 기적들은 모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 이야기들을 모두 옛날이야기로만 읽으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기적 소문이 들리면 그건 속임수일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속임수를 쓰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적 이야기가 소개된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기적에 대한 기대를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엎드린 연약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셨듯이, 오늘 주님 앞에 엎드린 이들도 똑같이 보십니다.

오늘 성령님은 치료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주님의 손은 여전히 연약한 이들을 만져주십니다.

본문의 한센환자가 주님 앞에 엎드렸을 때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저를 만지셨습니다. 본문 3 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이 병의 알려진 전염 경로는 손을 댔을 때입니다. 환자의 몸에 있는 진물이 만진 자의 상처에 묻으면 전염됩니다. 그래서 부정한 한센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당시에 이 추악한 모습의 저주받은 자를 만진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그를 만지셨을까요?

이때까지 유대인들은 부정을 만지면 부정이 옮겨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결법은 모두 그런 원리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것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만일 부정한 것을 만졌으면 그도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 부정이 옮겨지는 원리는 상식적입니다. 우리가 더러운 것을 깨끗한 손으로 만지면 손이 더러워집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한 손으로 만졌다고 해서 그 더러운 것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이 상식이 깨졌습니다. 이제까지는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보다 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을 이긴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산상설교에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은 모두 더러운 것을 이깁니다.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산에서 외치시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를 실천하신 것입니다. 진물 나는 이 한센환자를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주님의 거룩함이, 주님이 깨끗함이 더러운 이 병자에게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깨끗함을 주시면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루만지심을 통해서 이 깨끗함이 전해졌습니다. 즉시 그 병이 깨끗해졌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그를 만지셨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누구도 그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그를 만지지 않았습니다. 보기만 하면 피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스스로 나는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스스로 멀리해야 했습니다. 병을 앓는 오랫동안 그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몸을 움직이기도 어려운데 혼자 먹을 것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피부병으로 온 몸이 가려워도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만지셨을 때, 낫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우선 그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통해서 이제껏 누리지 못했던 잃어버린 사랑을 채웠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를 고치시면서 하신 말씀을 다시 자세히 보십시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내가 원한다는 이 말씀은 바로 이 환자의 말을 그대로 받으신 것입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여러분! 그래서 기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주님은 기도한 대로 응답하십니다. 믿는다고 고백하면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십니다.

이 사건 바로 뒤에 백부장 하인을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도 백부장은 주님께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환자가 있는 현장에 가지도 않으시고 말씀으로만 그를 낫게 하십니다.

주님의 응답이 바로 우리의 기도에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의 응답 방향이 결정됩니다. 응답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맞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믿으면 주님은 기적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세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 둘째,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셋째,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라.

첫째 침묵명령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에 같은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그 뒷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그는 침묵명령을 어기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선교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배용준이란 배우가 일본에서 인기입니다. 그를 욘사마라고 부르는 팬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배용준씨는 거리에 나오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동네에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시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사방에서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이 사람이 떠들고 다닌 것이 예수님의 선교에 정말 방해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침묵 명령을 내리신 것은 예수님을 단지 병고쳐주는 신비한 사람으로만 여길까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류 구원의 사명이 있으십니다. 천국 복음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병자들이 주님께 나아왔을 때 한 번도 안 고쳐주신 적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측은히 여기시면서 일일이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병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먼저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겸손히 엎드려 주님이 허락하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 어루만져 주심을 기다리십시오. 나 같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나를 만져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 기적 이야기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내 삶의 자리에 여전히 유효한 능력의 말씀입니다. 성령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질고를 아시고 낫게 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황 금 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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