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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을 성전답게 하라 (요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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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더니 그 집 방의 벽에 가훈이 걸려 있었는데 그 가훈은“다웁게 살자”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그렇다. 모두가“다웁게”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자녀들은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그 집은 행복이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구성원 모두가“다웁게”살아간다면 이 사회는 살맛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지도자는 지도자답게, 선생님은 스승답게, 공무원은 공복답게, 살아간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밝고 아름답겠습니까? 교회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는 목회자답게, 중직자는 중직자답게 일반성도들의 모범이 된다면 그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어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성전을 성전답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성전이 성전답지 못했기에 예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토록 온유하신 예수님께서“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한복음 2:15~16)하셨습니다. 성전이 성전답지 못하면 주님께서 이토록 진노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보시고 실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본문의 배경을 말씀드리면, 유월절은 유대인의 명절 가운데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서 20마일 즉 약 80리 안에 살고 있는 성인 남자는 누구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유월절 행사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에서 살든지 1년에 한번 있는 절기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성전에 와서 그 절기를 지키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인파가 약 225만 명가량 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상상 못할 인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뜰은 약 145에이커로 우리나라 평수로는 18,000평정도 됩니다. 여기에서 번갈아가며 유월절 제사를 드렸으니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제물로 쓰일 소와 양을 파는 사람, 비둘기파는 사람, 성전에 바칠 돈 바꾸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이는 성전이라기보다 시장골목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 뜰에는 짐승들의 배설물 냄새가 코를 찔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처소입니다. 이 지상의 건물들 가운데 가장 고귀한 건물이 성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집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은 성도의 본분이며 하나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성전은 구석구석 청결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답게 단장해야 합니다.

성전이란, 육안으로 보이는 예배당도 성전이지만 우리의 몸도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3:16-17절에“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을 회개함으로 항상 깨끗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레위기 11:45에“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사람을 귀하게 들어 쓰십니다. 디모데후서 2:20~21에“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하셨습니다.

二. 이토록 성전이 더러워진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유월절이 되면 19세 이상 된 성인은 누구든지 성전에 들어갈 때 내야하는 세금이 있었습니다. 그 세금은 당시 노동자의 이틀 품값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세겔로 내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일반적으로 쓰는 돈은 로마의 화폐인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 돈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형상을 우상으로 여겼으므로 우상이 새겨진 돈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만 사용하는 돈 즉 세겔을 문밖에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여러 곳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성전 뜰에는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편의를 위해서 돈을 바꿔주는 것이라면 좋았을 텐데 당시 사람들은 돈을 바꿔주면서 막대한 환전차익을 챙겼습니다. 쉽게 말하면, 일반 화폐 십만 원을 성전 화폐로 환전하면 오만 원 정도만 내주고 나머지 오만 원은 환전차익으로 유대 지도자들 호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가도록 한 것입니다. 유월절 순례자들이 성전이 그리워 무리를 해가면서 예루살렘까지 찾아왔는데, 돈 바꾸는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착취를 당하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돈 바꾸는 것만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경의 규례대로 성전에 가게 될 때 그냥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비둘기나 양, 그리고 소를 재물로 바쳤습니다.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이러한 짐승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성전 뜰에서 제사할 짐승을 팔았습니다. 장사의 시작은 예배를 돕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제사에 사용되는 짐승은 무엇이나 완전해야만 되고 흠이 없는 것, 깨끗한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 당국에서는 바쳐질 희생의 제물을 심사하기 위해 감독관을 임명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제물을 검사한 후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감독관들은 심사를 하면서 심사비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깨끗한 제물이라도 제사장이 불합격 판정을 내리면 몇 번이라도 다시 바꾸어 와야 했습니다. 이러한 특권을 악용한 제사장들은 상인들과 결탁을 하고 성전 밖에서 가져온 짐승들은 깨끗해도 불합격시키고 성전 뜰에서 구입한 짐승들은 흠이 있어도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 파는 짐승들은 다른데서 사는 것보다 몇 갑절이나 비쌌습니다. 어떤 때는 밖에서 사는 값의 16배를 받아 챙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순례자들은 밖에서 구입한 제물들은 불합격이 되므로 성전 안에서 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사장들은 엄청난 이익을 챙겼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더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지켜보신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본문 15절 말씀처럼“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셔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접을 만들지 말라”하셨습니다.

사람이 물욕에 사로잡히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그곳에서 내어 쫓긴 원인이 무엇입니까? 선악과 즉 먹는 것이었습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를 택한 까닭이 무엇이었습니까? 육신의 욕망이었습니다. 그는 끝내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서 버림받은 원인이 무엇입니까? 살진 양과 소와 나귀였습니다. 그 영광스러웠던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왜 버림을 받았습니까? 물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최대의 적은 물욕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의 특징은 동시에 두 곳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동시에 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깊은 사랑은 동시에 두 곳에 갈 수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3:5에는“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물질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2천년간 자자손손이 저주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어느 분은 말하기를“예수를 믿으면서도 호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 진정한 회개자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물욕을 경계하기 위하여 미국의 조상들은 화폐에“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라는 글귀를 써넣었습니다. 후손들이 돈을 만질 때마다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했습니다.

욕심을 부리면 그것이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패망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물욕의 폐단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 6:9~10)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물질의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물질의 복을 받아 누리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명기 28:1~6의 말씀에“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는 십일조라고 하셨습니다.“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라기 3:10~12)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1~34에“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넉넉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로 하나님을 잘 섬겼던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자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다윗 등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는 나라마다 한결같이 선진국으로 부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부자가 되고자 물질을 신앙으로 삼고 살아갔던 유물론 사상자들인 공산주의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같이 다 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곳에 풍성한 축복이 있습니다.

三. 욕심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 형식적인 신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는 계속되었습니다. 수많은 제물들이 하나님의 제단에 드려졌습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으면서도, 성전을 시장 골목같이 만들었으면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보신 예수님은“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태복음 23:27)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형식이 나쁘거나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이 변질되고, 형식만 남았다면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껍데기입니다. 곡식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쭉정이 입니다. 이는 마치 변질된 음식이 담겨진 용기와 같습니다. 그릇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음식이 변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이 이와 같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도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기도가 있고, 예배가 있고, 봉사도 있습니다. 바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에 직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형식입니다. 형식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필요합니다.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질을 놓치면 안 됩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면 내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나를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체면, 내 이익, 내 주장이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입니다. 비록 내 몸이 교회에서 맡은 일이 증하고 또한 내게 열심이 있다 할지라도 이는 마치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같을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교회의 본질은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죄악이 세상에 이토록 가득하지만 아직도 세상 종말이 지연되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멸망 받을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베드로후서 3:9~10에“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사람의 몸으로 이 추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단한가지 영혼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것은 단한가지 영혼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그 후 성령님이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역사하고 계십니다. 왜 오셨습니까? 그 까닭은 단한가지 영혼 구원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찾아오는 영혼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남은 것은 신앙의 껍데기뿐이었습니다.

2. 직분의 본분에서 벗어났습니다.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성전을 찾아와서 제사드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제사를 돕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들이 제사의 방해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수만 명이 들어가는 큰 성전 건물을 상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넓은 뜰 가운데 조그마한 성전이 자라하고 있습니다. 성소의 크기는 넓이가 약 9m, 길이가 약 18.2m로 약 50평가량 됩니다. 지성소는 성소의 절반으로 사방 9m정방형으로 25평정도 되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합하면 그 크기가 75평정도 되었습니다. 그 주위에 제사장이 들어오는 홀이 있었습니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으며 일반성도들은 성전 마당에 선채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성전 마당은 성소와 지성소에 이르기까지 좌우로 몇 개의 뜰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방인의 뜰, 그 다음은 이스라엘의 뜰, 그 다음은 여인들의 뜰, 그 다음은 제사장의 뜰로 되어 있었습니다. 매매하는 일은 이방인의 뜰에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이방인이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뜰이었습니다. 이방사람들이 예배드리기 원할 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다른 데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뜰에는 사방을 대리석으로 붙여서 만든 난간 베란다가 있었고 그것을 떠받치는 네 줄로 된 기둥이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 베란다 밑에는 그늘이 지기 마련이고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난간을 중심으로 장사꾼들은 제사장의 허락 하에 한 쪽에서는 돈을 바꿔주고 다른 쪽에서는 비둘기나 양이나 소를 팔았습니다. 이처럼 예배를 드려야 될 거룩한 곳이 시장 바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들의 울음소리, 양들의 울음소리, 비둘기가 구구대는 소리, 상인들이 물건 사라고 외치는 소리, 동전 쩔렁거리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짐승들의 오물 냄새 등.....이런 것들이 뒤섞여 이방인들은 이곳에서 도저히 기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분노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四. 지금은 성전을 더럽히는 유혹이 없을까요?

오늘날은 성전을 더럽히려는 사탄의 유혹이 사라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시대와 형편에 따라 모양과 방법을 달리하여 적절하게 미혹합니다. 그 미혹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집요하게 계속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에게까지 마귀가 나타나 세 가지로 시험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돌이 떡이 되게 하라”는 물질로 인한 유혹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라”하셨습니다. 그 다음 사탄은“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지키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명예로 인한 유혹이었습니다. 그 다음 사탄은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를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누가복음 4:8)고 하시므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이것은 권력을 이용한 유혹입니다.

사탄이 오늘날 이 땅의 교회를 어지럽히려고 이용하는 도구는 명예욕인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주어지는 봉사의 직임을 개인의 명예로 착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명예에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이웃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교회에 짐이 됩니다. 이로 인해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방하며, 교만합니다. 원망하며 불평합니다. 평화의 전당인 성전에서 분쟁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로마서 10:3)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존엄성을 깨트리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6:7절에“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방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시는 곳이므로 연장소리까지 나지 않도록 주의했던 것이 다윗과 솔로몬의 신앙이었습니다. 전도서 5:1-2절의 말씀에“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하셨습니다. 성전을 건축하면서 망치소리까지 주의했는데 하물며 경솔하게 말하여 성도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개개인의 심령 성전이 아름답게 지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매사에 조심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또한 우리의 심령을 성전 삼으시고 하나님께서 좌정해 계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언제나 청결하게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영광을 돌려드리며, 개개인의 신앙이 성장하는데 우리 모두가 도움을 줄지언정 예루살렘 성전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처럼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지혜롭고 덕스럽게 하나님을 잘 섬기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원의 공항입니다. 축복의 항구입니다. 승리와 행복의 정류장입니다. 나를 죽이고 교회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익 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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