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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 (행 11: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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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미국 애틀란틱시티에 있는 OMSC 선교훈련원에 선교세미나를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일을 맞이해서 그 도시에 있는 에피스코팔 처치에 속한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 날 제가 인상깊게 본 것은 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몇 사람은 상당히 큰 모양으로 십자가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k 같은 그런 금이 아니고 순금빛깔을 내는 십자가였습니다. 왜 십자가 목걸이를 그렇게 걸고 있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로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아마 '저 사람도 그리스도인인가 보다' 그렇게 쉽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를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십자가로 하시겠습니까? 순금으로 해야 순 그리스도인이 될까요? 남보다 조금 더 크게 해야 큰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될까요? 믿음의 표시,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 그것은 십자가의 형상으로 보이는 표시만으로는 그 본질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말은 헬라어의 '크리스티아노스'라는 말인데 사전적인 뜻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이런 뜻입니다. 좀 더 다른 의미를 첨부한다면 '작은 예수' 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보고 예수님을 본듯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큰 예수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예수입니다. 예수께 속한 자요 예수의 사람이요 예수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메시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무장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별칭은 안디옥 교회에서 받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별명이 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갈릴리 사람들이 많으니까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가리켜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나사렛 당'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사렛에서 자라나셨고 거기서 사셨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나사렛 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제자들' '형제들' 이런 명칭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명칭은 안디옥 교회에서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예루살렘 교회 위에 성령이 강림하고 방언이 터지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예루살렘 교회가 폭발적으로 성장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으니까 그 기점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을 했습니다. 수만 명의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큰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주의자들과 권력자들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교인들이 이방 땅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오늘날 터키의 영해에 속해 있는 안디옥에 가서 하나님의 교회를 일으켰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이 되자 바나바와 바울이 지도자로 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 명칭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명칭이었습니다. '저 친구들은 그리스도밖에 모른다, 그리스도 외에는 저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상종하지 않는다. 저 사람들은 그냥 상대하지 말아야 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는 호칭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로마서 1장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그 당시에는 조롱과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는 말로 용감하게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운 이름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도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이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살고, 예수 이름으로 생각하고, 예수 이름을 전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을 욕하는 것은 예수를 욕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당시에 있어서 부끄러운 이름이었습니다. 이름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전에 가지고 있었던 이름이 사울입니다. 사울은 구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름의 뜻만 보면 사울이라는 이름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 예수 그 분만이 큰 자요 나는 그를 높이는 작은 자다, 그리스도가 내 몸에서 존귀케 되기를 원한다는 작은 자라는 이름의 바울로 자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체성을 가집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환경이나 문화나 가치관에 급변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영구히 변하지 말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정체성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변질시키거나 타협을 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아무리 내게 도전과 고난이 와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정체성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서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받은 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오늘 우리 신앙중심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놓쳐 버리면 그리스도인으로 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 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운명론을 넘어서서

  첫째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 앞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앞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답도 그리스도와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 가치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에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철학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운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운명론자는 아니면서도 운명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아무도 '나는 운명론자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전부 운명을 좇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운명적'이라는 이 말을 조금 쉽게 풀이하면 우리가 살아가다가 환경을 탓하는 것이 운명론입니다. 내 문제를 다른 사람과 결부시켜 책임을 전가하는 이 사고방식이 운명론에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그런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환경이 나를 어렵게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집니다.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 안에서 절망을 이겨가고 고난을 이겨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우리의 삶 속에서 확고하게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어떤 집의 아이가 이가 못났습니다. 그래서 이 딸아이가 거울을 볼 때마다 엄마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외출하려고 거울을 보니까 또 속이 상합니다. 그래서 엄마를 보고 또 한마디 합니다. "엄마, 왜 나를 이렇게 이빨이 못나도록 낳았어." 이 엄마도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야, 내가 너를 낳을 때는 이빨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운명론자는 아니면서도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현대인의 이 불쌍한 사고방식적인 삶의 형태를 벗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에게 가져오십시오. 문제도 해답도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기본자세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

  두번째,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 외에 이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 인류를 구원할 도덕성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인류를 구원할 자라고 기대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에 도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주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며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인품이 착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영적 지도력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은혜를 받고 밭을 팔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바치면서 초대교회의 유능한 후원자로 헌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물질을 바로 다스렸고, 물질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섬겼고, 그가 뭇 사람들 앞에 칭찬을 받으며 착한 인격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영적 지도력을 가지고 뭇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이런 지도자가 있는 안디옥 교회와 그 교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예수를 닮은 자들이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라, 예수께 속한 자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인정받을 그 당시에 기독교인의 수가 9%였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성도들의 열정이 로마를 복음화시키고 로마의 국교를 기독교로 선정하는 교회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기독교 인구가 20∼25%로 추산을 합니다. 대단한 통계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도덕적 영향력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굵직한 불상사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포함된 것이 아니라 주역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도덕적인 영향력이라는 것은 새마을운동이나 도덕운동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 예루살렘 교회가 보여준 이 위대한 도덕적 영향력은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가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도덕의 근원

  부도덕이 어디에서 발생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는 자주 생각을 해야 됩니다. 부도덕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부도덕합니까? 돈 때문입니다. 제가 언젠가 서초동에 있는 법원에 방청을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가보니까 복도, 매점, 로비, 법정 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습니다. 재판 일정이 꽉 차 있었습니다. 민사재판장을 제가 갔는데 민사재판은 전부 돈에 얽힌 재판입니다. 돈 떼먹은 사람, 돈을 떼어서 억울한 사람, 보상을 받겠다고 재판을 거는 그런 사람들로 우글거렸습니다. 저는 평소에 그 법원 앞을 지나면서 서초동에서 제일 큰 건물이 법원과 검찰청 건물인데 법원 건물이 저렇게 클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니까 새로 지어야 될 정도로 비좁았습니다. 방마다 사람들로 꽉꽉 찼습니다. 전부 돈 때문에 시비하는 사람들로 차 있었습니다. 이혼법정도 깊이 따져보면 돈에 얽힌 것이 대부분입니다.

  어느 방송에서 수해지역을 취재했는데 한 노인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노인이 20년 간 돈을 모았습니다. 푼돈도 아끼고 농사를 지어서 그렇게 20년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약 2천만 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자식들이 용돈 주는 것을 아껴서 자기 나름대로 돈을 모았는데 이게 하루아침에 다 떠내려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중얼중얼 한 마디씩 내 뱉는 말이 돈이 이렇게 허무한 것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돈이 이렇게 무기력한지 몰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노인이 자기 생전에 돈을 모아야겠다고 돈을 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자기 가족을 구해준 것도 아니고 자기 집을 구해준 것도 아니고 자기도 겨우 빠져 나와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야 됩니다. 한 번은 버스에 강도가 탔습니다. 하나는 권총을 겨누고 있고 하나는 승객들의 가진 돈을 다 내놓으라고 호주머니를 뒤집니다. 그런데 그 버스에 만득이와 용득이가 탔습니다. 이 두 친구가 뒷좌석에 앉아서 보니까 큰일났거든요. 돈을 안 내놓을 수 없으니까 용득이가 만득이 허리를 꾹꾹 찌르면서 "받아!" "뭔데?" "돈이야 돈!" "웬 돈이야?" "3년 전에 너한테 빌린 돈 있지? 그거 내가 지금 갚는 거야!"

  여러분, 강도가 들어오면 돈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알게 됩니다. 전쟁이 나면 돈이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알게 됩니다. 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돈을 버십시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도 말고 숭배하지도 마십시오. 돈을 하인처럼 부리기를 바랍니다. 돈을 상전처럼 모시지 마십시오. 그럴 때 문제가 일어납니다. 수해에서 2천만 원을 잃고 허탈해 하는 노인은 그 2천만 원을 모으려고 손자들 앞에 용돈 줄 것도 인색한 할아버지 소리를 들었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돈 때문에 손자를 울린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봅시다. 돈 때문에 부모를 울리고, 자식을 울리고, 친구를 울리는 돈이 그렇게도 대단합니까? 사람들을 그렇게 상하게 할만큼 돈이 대단한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 부모를 울릴 수 없고 자식을 울릴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적어도 돈 때문에 남에게 상함을 준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잘못 사는 것입니다. 돈을 잃고 돈에 의미를 알았던 수해를 입은 그 노인의 한숨 속에 진리가 있습니다. 돈을 모을 때 그것을 알았어야 됩니다. 바나바는 돈을 가진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돈에 대한 가치관을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착한 사람이었고 칭찬 듣는 사람이었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훈장에 맞는 사역

  세번째, 그리스도인은 원수에게도 전도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원래는 원수입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찾아 죽이려고 했던 그 때 바나바가 걸렸으면 죽었을 것입니다. 전에는 원수였는데 바나바와 바울은 같이 만나서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 함께 일을 합니다. 거기서 전도를 하며 이방 선교에 아름다운 흔적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원수에게도 전도할 수 있고 원수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훈장을 많이 달고 삽니다. 아버지 훈장, 어머니 훈장, 교회에 오면 목사 훈장, 장로 훈장, 권사 훈장, 집사 훈장, 직장에 가면 계장, 과장, 부장, 사장의 훈장을 달고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훈장을 가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로서 속상하고 어머니로서 속상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망가지는 것은 탄식할 줄 모르면서 목사의 자존심이 상했다고, 장로의 자존심이 상했다고 펄펄 뛰는 우리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 상한 것에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 우리의 병든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폴리갑이 순교를 당할 때 그를 죽인 군인이 "이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 소리만 들으면 다른 것은 다 회복될 줄 믿습니다. 그 안에 우리의 명예와 영광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소리를 듣기 원합니까? "당신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요" "정말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요" "당신은 주님을 따르는 자요" 그 말을 듣는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요즘 아버지들이 참 피곤하다고 아우성입니다. 특히 강남에 있는 아버지들이 더 피곤하다고 합니다. 부인과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거는 기대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통 좋은 아버지가 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런데 강남에는 슈퍼 아빠가 되라고 한답니다. '언제나 당신이 일등이 되라'는 것입니다. 옆집 아빠보다 당신이 슈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슈퍼 아빠 병이 더 많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중대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모 신문에 보니까 2년 동안에 고등학생이 27만 명이 줄어들었습니다. 금년 수능시험 숫자가 대학정원에 밑도는 이런 현상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등학생이 2년 사이에 27만 명이 줄었다는 그것이 우리 집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 직업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고등학생 수가 이렇게 급감해 가는 것이 우리 사회의 중대한 어떤 도전과 변화가 일어날 현상입니다.

  맺는 말

  앞으로 10년 전후로 해서 일본과 같이 우리나라도 노인천하 시대가 옵니다. 이게 눈앞에 다가온 변화입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습니다. 현재 사람을 죽게 하는 3대 질병이 암과 심장질환과 뇌혈관 질환입니다. 이 세 가지만 없으면 체력이 다하고 노쇠할 때까지 살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질병 때문에 젊어도 죽고, 늙어도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질병이 극복되면 평균 수명이 남자는 9년, 여자는 8년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결정적인 병 때문에 죽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평균 연령이 여자는 88세, 남자는 81세가 됩니다. 지금 일본은 현재 여자가 84세, 남자가 78세입니다. 그러니까 각종 성인병이 극복되어도 지구촌은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온갖 방면으로 급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너무도 변화될 우리 삶의 환경 앞에서 영원히 변치 말아야 하는 가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주님을 사랑하고 주께 속하고 주님을 따르는 작은 예수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우리가 상실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충성되이 사는 영원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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