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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성령님과 성도 (행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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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어릴 때에 집회에 참석하여 들은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 어머니와 아들 단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심한 화상으로 얼굴이 보기에 흉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들이 그 어머니의 얼굴로 인해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게 되고 자라면서 점점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꾸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내일부터는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얼굴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감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 아들이 이제 학교에 다니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어머니는 아들이 자기 때문에 놀림을 받는 것을 보고서 장롱 속에서 젊고 예쁜 사진 하나를 꺼내어서 아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아들이 그 사진을 보고 이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사진의 여자가 바로 자신임을 밝히고 자기 얼굴이 심한 화상으로 흉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 아들이 아주 어릴 때에 혼자 몸으로 가정을 꾸려가던 어머니가 아들을 혼자 안방에 재워두고 집 앞에 있는 빨래터에 나가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집에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집 안에 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불타는 집 안으로 뛰어 들었고 아들을 이불로 싸서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어머니는 불에 심한 화상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언젠가 이야기 해 주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 네가 이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들은 울면서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엄마 왜 그 이야기를 이제야 내게 해 주는거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을 터인데 엄마 정말 미안해, 엄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얼굴에 화상을 입었는데 내가 그 얼굴을 불평하고 부끄러워하다니 정말 미안하다고 엄마 가슴에 머리를 묻고 울었습니다. 이 후에 아들의 눈에는 엄마의 얼굴이 흉한 모습이 아니라 거룩한 모습이었고 친구들이 그 엄마를 놀릴 때에 오히려 그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똑같은 어머니인데 어제는 부끄러워하고 싫어하고 원망하고 오늘은 감사하고 자랑스럽고 기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바로 그 어머니고 아들도 바로 그 아들인데 왜 어제와 오늘이 완전히 다른 아들이 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제는 어머니가 입은 화상밖에 보지 못했지만 오늘은 어머니가 왜 화상을 입었는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제는 어머니의 화상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줄 알았다가 오늘은 어머니의 화상이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령을 받기 전과 성령을 받은 이후의 삶이 이렇게 달라지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아직 알지 못했을 때에 일어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를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때부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끄러움이 아니요 우리의 자랑이 됩니다.

첫째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이유는 주님이 주신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오순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처음 주신 날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출 19:1의 말씀을 추론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처음 받은 날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오순절을 율법을 받는 날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비로소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 - 성령으로 깨달을 수 있다.

성령님이 성도에게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중심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성령님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을 깨닫게 하시는 일입니다. 때문에 사람이 성령을 받으면 그 인격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함께 기도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기다렸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재하시기 전까지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십자가를 보았고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을 보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바른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삼 년을 함께 지냈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도 자신들의 사명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한국 말은 언어의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의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추인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들은 여러 지방에서 왔는데 성령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때에 자기 말로 들렸다고 했습니다.

아는 것도 신비지만 알지 못하는 것도 신비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시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을 감추신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2: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둘째 성령님은 하나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곳에 모였더니 했습니다. 성령님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교회를 이간질하는 영입니다. 성도가 사랑하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남을 헐뜯거나 판단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마귀의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신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변인 노릇을 해 온 사람들은 주로 부흥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란 부흥사를 통해서 받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흥회는 성령을 받는 기대감을 항상 주어왔습니다. 마치 성령님의 역사는 특별한 사람만을 위한 영역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님을 이해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방해도 했습니다. 한 면만 보는 사람은 그 면에서는 도움을 주지마는 그것 때문에 다른 면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 교회는 성령님의 개인화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이러한 정서가 있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성령님을 내 개인의 어떤 목적을 이루어 주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내 개인의 어떤 소원을 이루는 도구로써의 성령님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것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을 사명 안에서 살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시고 내 욕심과 우리들의 욕망에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욕심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오시면 매여 있던 우리를 자유케 하시며 자기 만을 위해서 살던 인생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일의 반대 개념으로 육체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유일의 방법은 바로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욕심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고자 노력할 때에 침묵하거나 아니면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육체의 욕심을 이기고자 노력할 때에 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셋째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언어가 성령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고 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새로운 시작은 말이 바꾸어지는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통해서 언어를 잃어버리므로 분열된 인생이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가 되는 역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시작하다는 말은 "알코"라는 말로 처음이 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말이 바꾸어지기 전에는 그 사람은 아직 새로운 출발점에 서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언어를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바꾸어져야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언어가 달라지게 되는 것 중에서 첫째가 성령을 받으면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살았던 삶이 바로 죄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원망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불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짓게 되는 대부분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성령 받게 될 때에 비로소 그것이 죄임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회개란 죄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식인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잘못을 느끼는 것도 상대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불효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자기가 불효를 할 때에 깨닫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내가 얼마나 부모에게 잘못 했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입술로 감사하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절망하게 되고 실망하게 되는 이유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알고 보면 결국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입술로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입술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사명이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할 수 있습니다. 사명은 힘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부모를 위해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에 그 은혜를 따라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강제로 충성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성령님의 노예로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인격과 마음으로 충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노예로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로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일은 성령님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바로 이 영적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도 성령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야 주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은 사람의 개인 능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조 병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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