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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③ -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딥니다 (고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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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사랑의 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들을 율법이 아닌 죄를 용서하고 자비와 사랑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율법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실현하시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의 천국에 이를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두 가지 큰 계명을 주셨으니 ‘첫째는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실제적으로 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의 외적인 표현이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도 없고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을 보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 마음에 인간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있어야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을 한번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주례를 서면서 결혼이라는 것은 상대에 대한 이해를 결심하는 예식이라는 것을 늘 강조하곤 합니다. 사랑은 이해함이며 그것은 자연스런 마음의 흐름만 가지고 되지는 않습니다. 내 마음에 이해되지 않아도 내 마음에 납득되지 않아도 그것을 이해하고 납득하고 수납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마음에 결심함으로 말미암아 이루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부패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흐르는 대로 흘러간다면 그것은 죄 짓는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괴롭히고 나도 괴로울 뿐인 것을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냥 마음 흐르는 대로가 아니라 믿음의 힘을 발휘해야합니다. 의도적으로 사랑을 이루고 베풀고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을 세 번째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이 줄 수 있는 감동이나 능력이나 지혜나 선행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사랑은 결코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본문에 따라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딤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정말 이 세상은 사랑이 없어서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아무리 척박한 곤고한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 가운데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해 봅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 자 다시 한번 따라합니다.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 자 다시 한번 여러분만 해보세요. 그렇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믿어 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기대하고 바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내하며 견디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은 이것에 대하여 말씀하려고 합니다. 오늘 특별히 제가 드리는 말씀을 역기능으로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 당신은 나를 참아주지도 못하고 믿어주지도 못하고 나를 기대하지도 않고 나를 견뎌주지도 않으니 당신 내게 대해서 사랑도 없어’ 하시지 마시고 ‘우리 자신이 회개하는 기회를 삼으셔서 내가 사랑을 이룰진대 진정으로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이와 같은 사랑을 이루어야 되겠다’라는 것으로 마음에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첫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서로에게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 어려움을 감내하며 서로에 대한 애틋한 보호와 방어를 이루어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진정으로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여겨 덮어주고 보호해주고 방어해주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 내 마음에 든다 안 든다라는 것은 별로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이 있다면 사랑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내 마음과 행동과 생활에 있어서 내 마음의 어려움을 참고 생활의 어려움을 참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방어하고 보호하며 결국 사랑으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랑이란 부모와 자식 간이건 아니면 부부 지간이건 아니면 어떤 관계이건 어려움을 감내하는 보호와 방어와 지켜줌에서 이루어집니다. 판단해 버리면 아무런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저는 요즘 고린도전서 13장을 생각해 보면서 사랑에 대한 많은 것들을 새롭게 느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랑은 판단해 버리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꺾고 어려움을 감내하며 그것을 보호해주고 방어하며 지켜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시원한대로 말해버리고 내 마음에 시원한대로 행동하고 유지되고 이루어질 사랑의 관계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고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상대의 죄가 보이지 않고 허물이 보이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이 보인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거래하고 집착하고 소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이해가 됩니다. ‘나는 당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하는 것은 ‘내가 당신을 지금 사랑하지 않아.’ 혹은 ‘내 사랑이 식어졌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라는 말은 우리에게 통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의지요 노력이요 애씀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의 비극은 사랑하지 못하고 거래하다 사랑하지 못하고 집착하고 소유하려하다 결국 사랑 한번 이루지 못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은 믿음으로 사랑의 방법을 터득하셔서 우리의 삶 전부가 사랑이 된다면 결국 우리는 성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긴 여정을 거치셔서 마침내 사랑을 터득하게 되시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인격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혹은 이러저러한 선언은 많은데 그 실천이 지극히 부족한 시대입니다. 실천이 부족하니 상대적으로 선언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별것 아니라도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어떠어떠한 과정을 통해 터득한다면 우리는 큰일을 하거나 알려지지 않아도 우리는 이 지상에서 천국의 삶과 주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세상을 탓할 필요 없습니다. 내 부족함 내 연약함 때문이니 차라리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 은혜를 얻음이 옳습니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참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참는다는 것은 상대를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를 판단치 않고 존중할 때 상대에 대해 이해하고 기대하고 힘을 주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터득하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삶이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게 되는 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라는 것은 내가 주님을 닮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다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내 가슴속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랑에 미숙한 것입니까? 왜 우리는 사랑을 외면합니까? 챙길 것도 없는 세상에 얼마나 챙기겠다고 마음 시원할 것도 별로 없는 세상에 얼마나 마음이 시원하겠다고 이길 것도 없는데 얼마나 승리에 도취해 보겠다고 우리는 참지 못하고 쉽게 표현해 버리고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상심하게 하고 내 앞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상심하는 것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모두 내 옆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이 지극히 아끼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참지 못하고 마음 시원한 대로 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심정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저 멀리 있는 것이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사단이 놓아 둔 구조 속에 빠져 결국은 사단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 참는다는 것은 아픔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즐거움이 우리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참음과 보호를 이루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즐거운 고통이 있습니다.

요즘 제가 자주 말씀드리죠?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은 평강입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고 분요가 있고 불편하다면 이것은 무조건 사단이 주는 생각이다라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갈등했지만 결국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마음에 평강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내가 사단에게 걸려들고 있구나 생각을 하고 아무런 생각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때 결정하는 것 그때 행동하는 것은 모두가 점점 더 큰 실수일 뿐입니다. 마음에 평강이 있고 사람들이 다 고맙고 사랑스러워 질 때 생각하고 행동하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요로운 심정에서는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과 뒤틀린 정서를 사람들에게 투사하여 보상받으려고 하는 죄악의 심리만 남습니다. 결국 내 영혼은 파멸되고 마침내 사람들에게 고통을 끼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큰 죄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내지 않아서 죄악이거나 주일 성수를 하지 않아서 죄악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주님이 원하는 심정을 이루지 못하고 사단이 이끄는 대로 이끌려가니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섭섭함과 미움과 분노가 생기면 우리는 참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을 완성해 갈 수 없으니 우리는 언제나 돌을 쪼아 조각하는 심정으로 우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유연히 삶의 사랑을 완성해 가야합니다.

저는 우리의 삶은 결국은 하나님이 인격을 완성해 가는 삶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해 가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인격의 완성이라는 것도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삶 속에 끊임없는 참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보호하고 방어하고 지켜주는 이와 같은 참음을 통하여 우리는 사랑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준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진정한 신뢰함입니다. 믿어주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에 믿음과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을 것 같아도 믿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믿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에 믿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못할 것 같고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단순한 사항의 나열에 불과 합니다. 사랑은 창조입니다. 사랑은 아닌 것을 진실로 변화시키며 사랑은 능력이 없는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며 변변치 못한 사람을 우아하고 유려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믿을 만하지 못해도 자식을 믿어줍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어줌 조차 없이 어떻게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원하고 이룰 수 있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 더 접근해 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이 조금 더 충적되어 쌓여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사랑을 원하고 이러저러한 삶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완성해 가며 주님의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삶의 작품이 일필휘재로 휘두르는 한 획에 의해서 완성되겠습니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조금씩 조금씩 또 실패와 그리고 이와 같은 갈고 닦음을 통해서 아픔과 실수 실패를 거쳐 가면서 사랑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진정으로 믿어주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믿어지는 것은 결국 주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체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정말 주님은 우리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닌데도 우리를 믿어주셨고 아껴주셨고 사랑해 주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라고 하지만 예수님을 면전에서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이고,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게 될 것이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 두려워서 다 도망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섭섭하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약점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믿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다 도망쳐 버렸지만 그들은 다시 모였고 오순절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그들은 다 나가 사도들이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다 순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과 그들의 약점과 어려움을 아셨으나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믿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그 믿음에 보답하여 순교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평가하고 믿어주는 대로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 따라해 봅시다. ‘사람은 평가하고 믿어 주는 대로 됩니다’ 사람은 요청하고 요구하는 대로 되지 않고 평가하고 믿어주는 대로 됩니다. 정말 그 사람에 대해서 ‘너는 정말 훌륭해. 너는 뭐가 될 것이 확실해’라고 믿어주면 그렇게 평가해주면 평가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 후하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박하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믿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을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시지요? 왜 또 대답이 없으세요? 훌륭하다고 생각하면 옆에 있는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부족해’라고 한다면 정말 부족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래’하고 평가하면 그렇게 됩니다. 자녀를 키우면서도 근본적으로 그 자녀에 대한 우리 기본적인 정서는 무엇이지요? 믿고 신뢰함입니다. 믿어주는 대로 되는 것이지요. 실수와 약점만 생각하면 어떻게 믿어집니까? 장점과 잘하는 점 생각하고 주님께서 그를 인도하심과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집에 아이들이 있지만 ‘네가 최고야. 너는 제일 잘할 수 있어. 그리고 너는 하나님이 사랑하셔. 아빠가 늘 기도하니까 너는 정말 최고로 잘 할 수 있어.’라고 하면서 괄호 넣기도 합니다. ‘너는 아빠의 뭐지?’ ‘아빠의 소망이요. 아빠의 꿈이요’ 이렇게 괄호 넣기도 합니다.

여러분 최고로 믿어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고로 기대해야 되지 않습니까? 기대하지 않는데 어떻게 훌륭해 질 수 있겠습니까? 믿어주지 않는데 어떻게 훌륭해 질 수 있겠습니까? ‘나는 당신이 최고라고 늘 믿고 살아가요’ ‘처음 듣는 소리 같은 데요’ 그래요? 자 다시 한번 ‘나는 당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최고의 사람하고 살아야지요. 최고의 사람하고 사셔야지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을 알면 우리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어줌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상대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나를 믿게 해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안 돼요. 비극일 뿐입니다. 사랑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을 요건이 되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믿음이 가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 상대를 믿지 못할 순간, 행동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을 무엇입니까?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 사람들, 주변 모든 여건들 믿을 만한 것이 없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대한 기대를 가지고 결국은 그들을 믿어준 것입니다. 믿고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사단의 장난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믿어주고 신뢰하는 것은 끝까지이며 어떤 거래가 아닌 체념이 아닌 진실한 기대입니다. 조그만 기쁨에도 크게 기뻐하며 큰 실망거리에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또 다른 기대를 가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사랑인 것입니다.

저는 요즘 조금씩 조금씩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볼 때마다 참 가엽고 안됐고 불쌍해 보입니다. 물론 저도 불쌍하고요. 잘못하면 다 잘못하는 배경과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능력이 안 되면 능력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거짓말하면 거짓말해야 될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거 같습니다.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다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판단해 버리고 징계해 버리고 하나님처럼 심판해 버리려는 관점에서 보면 다 심판하고 징계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잘 아시잖아요. 제나라에 관중과 포숙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둘이 동업을 했습니다. 관중이 돈을 많이 가지고 갑니다. 포숙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관중의 집에는 식구도 많고 돈 쓸데도 많아, 그러니까 많이 가지고 가는 거야. 절대로 탓하지 않습니다. 관중이라는 사람이 일을 도모하다 곤궁에 빠져도 어리석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벼슬하다 관중이 세 번이나 쫓겨납니다. 그래도 무능하다고 못났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세 번이나 도망갔지만 포숙은 관중에 대해서 겁쟁이다 비겁하다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관중이 나중에 말합니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요,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비겁해도, 정말 겁쟁이 같아도 정말 많은 것을 자기가 챙겨도 그래도 믿어주는 것입니다. 한번 믿어주기로 했으니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한테 다시 한번 고백해 봅시다. ‘나는 당신을 끝까지 믿어줍니다.’ 자 다시 한번 얘기 해 보십니다. ‘다신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믿어줍니다.’ 말이 어려워서 못하시나요? 가슴이 찔려서 못하시나요? 자, 다시 한번, ‘나는 당신을 끝까지 믿어 드립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끝까지 참을 뿐 아니라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겠지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서도 기대합니다. 인간적으로 기대할 것 없다 생각해도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믿어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쁨입니다. 무엇인가 믿어주자 하는 마음이 들고 믿음 뒤에 빛이 보이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구나하고 어떤 상태가 되어서가 아니라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를 느껴야 합니다.

금요일 심야기도회 끝나면 청년들이 늘 여기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아이들이 100여명 이상 모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거든요. 목사가 청년들을 위해서 특별히 금요 심야기도회 끝나고 한번씩 기도해주니까 아이들이 꼭 모이는 거 같습니다. 저는 제 마음에 정말 뜨거운 확신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반드시 믿음의 인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저는 제 마음에 아주 확신이 듭니다. 아이들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믿어집니다. ‘너희들은 분명히 훌륭한 믿음의 인물이 될 거야.’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안 들어요. ‘아니, 너희들 뭐 이러냐, 너희들이 되어 봐야 뭐가 되겠다고 이러느냐’ 이런 마음이 절대 안듭니다. 마음이 뜨겁고 기도하면 믿음대로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 마다 아이들의 사랑이 너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청년들도 마음에 그런 것을 느끼는 거 같아요. 사랑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어집니까? 믿어져야 합니다.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세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실망하지 않으며 기대를 버리지 않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자꾸 기대가 되어야 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그것은 기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강요에요. 진정한 기대와 소망은 아무리 기대와 소망을 해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기대하고 믿고 바라보는 것은 믿음이요, 평가요, 기대입니다. 이런 기대는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자랑스럽게 만듭니다. 어떠한 경우도 실망되지 않아야 됩니다. 한순간 혹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결과가 없다거나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말씀 꼭 기억하세요. 따라서 합니다. ‘사랑은 결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 당신한테 실망했어.’ 이 말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랑했다면 그 말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사랑은 실망할 수 없는데 어떻게 실망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끝까지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 짧은 시간 남기고 있는 우리가 사랑도 못하고 기대도 못하고 슬픔과 좌절 속에 산다면 얼마나 큰 비극이겠습니까? 어려움에 빠져도 그것을 구하지 못한 내가 탓해지고 내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그것을 못해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도 못해라고 지적하면 사랑이 아니에요. 그것도 못한 것, 내가 그렇게 도와주지 못한 것, 그것이 가슴 아파야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기대이기 때문에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제일 훌륭해 보여야 합니다. ‘당신이 제일 훌륭해 보여요. 당신이 최고에요.’ 왜냐하면 사랑하면 기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하고 사셔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기대해요, 당신이 최고에요. 사랑하면 그 사람이 최고가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 최고고, 그리고 내가 내 앞에 있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최고입니다. 이 자식이 언제 자라서 제 밥벌이나 하고 살까? 하고 걱정되지 않아요. 이 아이는 스스로 행복을 찾아 행복을 누릴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사람이 될꺼야하는 기대가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꿈을 이룸도 그를 위함이며 그가 꿈을 이룸을 기대하고 돕고 싶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도 결코 실망되지 않아야 합니다. 꼭 내 방법대로가 아니라 그의 방법대로에요. 이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내 방법대로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방법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이해해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나는 내 뜻을 접고 당신에게 맞추어 주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맞는 말입니다. ‘당신이 나를 좀 이해해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해해주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오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또 얘기합시다. ‘나는 당신을 이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신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나는 당신이 뭘 하든 이해하겠습니다.’ 후환이 두려워서 얘기하지 못하는 분 없으시죠? 다시 한번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나는 무슨 일을 해도 다 이해하겠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난 당신이 무슨 일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나는 당신을 다 이해하겠습니다. 나는 이해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이를 악물고 당신을 이해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꿈을 이룸도 그를 위함이고 그가 꿈을 이룸을 기대하며 돕고 싶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도 결코 실망되지 않습니다. 내 방법대로가 아니라 그의 방법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평생 사는데 소리나 지르고 살고 내 뜻 이루려고 애쓰다가 이루지도 못하고 사는 거 정말 내 앞에 있는 사람하나 행복하게 해주고 그것으로 인해 나도 행복을 배우고 그 행복을 터득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까지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어리석은 것은 기대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자신의 삶의 기운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룰 기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의 기운이 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끝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가, 아닌가의 싸움입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의 쓴잔을 피하려고 하시다가 결국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편하게 살자하고 생각하면 그것이 편한 것이 아니고 더 큰 고통과 갈등과 아픔을 가져올 뿐입니다. 이 짧은 세상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다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을 마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니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습니다. 어느새 이 교회가 세워진지 14년이 됐습니다. 여기 앞에 계신 분 보니 14년 전에 오셨는데 지금 앉아계신 분도 계시잖아요? 어떻게 삶의 시간이 그렇게 빨리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어린아이들 봤는데 그 아이들이 벌써 대학생이더라고요. 우리의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짧은 시간 어떻게 사시겠어요? 사랑하며 주의 천국 속에 사시겠습니까? 사랑도 이루지 못하며, 참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기대하지 못하고 사랑조차 이루지 못하고 이해조차 못하고 사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 저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생각하면서 그중에서 이 구절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감동이 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느니라. 이 말에 다 요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려움 겪을 때 뭐라고 말씀드렸죠?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다 아시죠? 한번 따라서 합시다. ‘힘을 더 쏟고, 시간을 더 쏟고, 방법을 개선하고 더 기도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라’ 내게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힘을 더 쏟는 것입니다. 시간을 더 투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방법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더 뜨겁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것이 뭐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어려움을 견디는 것입니다. 사랑은 결국 참는 것이고 참음의 힘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진심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인내의 힘을 견디는 힘을 줍니다. 또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즐겁고 감사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특징은 인내하며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강한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생각들 그리고 외부적인 요건들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마음의 생각도 어려움도 내 주장도 다 참고 또 의심과 믿어지지 못함과 불신과 두려움도 다 참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인내와 견딤은 결국 마음의 생각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 삶의 승리의 첫 발걸음입니다.

여러분 성을 빼앗는 자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더 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까?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들을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랑을 이루는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내 마음을 정화시켜 사단이 주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 가슴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사랑은 시작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사랑을 시작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참고 희생하여 완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 아시죠? 사랑은 열정으로 시작해서 의지로 유지하고 희생으로 꽃피워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랑은 시작하기 쉬워요.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는 것과 마지막까지 희생으로 꽃피우는 것을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견디어 내야 합니다. 내 마음을 그리고 외부의 어려움을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아픔들을 품어 아름다운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이루기 원하십니까? 행복을 원하십니까? 모든 것을 인내하며 견디셔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값없이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을 값 주고 취하는 귀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을 주님이 아픈 값을 이미 치르셨기 때문에 피 흘림과 고통과 절규의 값을 치렀기 때문에 우리는 치루지 않아도 될 뿐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유에 대한 집착, 우리는 사랑을 소유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집착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래하려고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소유와 집착과 거래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사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나 자녀나 성도나 주변의 모든 사람의 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소유하려고 하고 집착하려고 하고 우리는 거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자유로움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참고 믿어주고 기대하고 우리는 인내하는 모든 것을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는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마음에 드는 생각은 표현이 신중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젊었을 때는 실수해도 실수로 받아들여지고 이해되는데 점점 나이 들면 그것으로 평가받고 대접받고 삶이 결정되고 끝나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있어서 점차적으로 보다 더 인내하고 깊이 생각하고 우리는 사려깊고 배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을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소중한데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고 사물이고 상황이고 마음이 다 불편하고 마음에 차지 않고 이리저리 우리 삶을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고 계십니까? 자유하게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도 자유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끈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남편과 아내의 사랑도 우리 인간관계 속에서 맺어진 모든 것도 집착하고 소유하려고 하고 거래하려고 하고 주장하려고 하니 늘 마음에 불안과 발화가 마음속에 가득한 것입니다. 상대가 내 마음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찌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까? 평생을 가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상대에게 맞춰가야 한다고 생각해야 해요. 집착하고 소유하려고 하고 거래하려고 해서는 사랑은 이루어 질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건 안 돼요. 꼭 있어야 되는 것은 반드시 잃어버립니다. 반드시 깨져요. 왜죠? 그것이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깨뜨립니다. ‘하나님 나는 이거 절대로 놓을 수 없어요.’ 하는 것은 반드시 깨집니다. 왜죠? 그것이 우상이기 때문이에요. 우리 마음에는 자유를 통해서 진정한 소유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불행하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있건 없건, 만났건 헤어졌건 이루건 이루지 못했건 그 자체가 행복이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가져서만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시간이 가면서 우리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기쁨에 빠지게 됩니다. 주님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고 행동이며 마음이 흐르는 대로가 아니라 마음의 분명한 각오입니다. 은혜받기로 각오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은혜 받습니다. 시험받기로 각오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시험받습니다. 사랑하기로 각오한 사람은 늘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사랑하지 못하고 거래하고 집착하고 소유하는 사람은 늘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돼야 되기 때문이에요. 물론 모든 것은 내 뜻대로 안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질 뿐입니다. 내 뜻대로 안될 때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천국, 가정의 천국, 생활의 천국, 지상의 천국 마지막으로 주님의 내세의 천국을 이루는 우리가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삶이라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으로 극복하고 이겨내야 합니다. 세상은 결국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못하느냐로 그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주님의 마음에 있는 사랑을 닮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믿어줍니다. 바라보고 기대하고 견뎌주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사랑은 열정으로 시작해서 의지로 유지되고 희생으로 꽃피워집니다.’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사랑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으로 우리 마음에 주님의 인격을 소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최 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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