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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보답(2) -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 116: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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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석에 고향을 잘 다녀오셨습니까? 민족고유의 감사절인 추석명절에 시작한 시편 116편을 계속해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은 많은 분들이 낮 예배를 드리지 않고 고향 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집사님 기도를 들어보니까 700명쯤 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700명은 제가 시편 116편 말씀으로 전했지만 분깃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명절이 되면 맛있는 음식을 했는데 누가 늦게 온다든지 자리에 없으면 남겨놨다가 식구들을 주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제가 오늘 여러분들과 같은 본문에서 조금 더 말씀을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편 116편은 감사의 시입니다. 그래서 민족 고유의 명절 추석과 같은 절기에 아주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시편 116편은 전체를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지난주에는 두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서론이자 이 시 전체의 결론처럼 보이는 첫 부분을 살피고 두 번째 부분은 왜 그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들어보았습니다. 이 시인이 이 시 전부를 통해서 하시고 싶어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1, 2절)”

내가 그를 사랑합니다.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라. 이것이 시편 116편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입니다. 왜 그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 두 번째 부분, 3절부터 7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자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치 저승사자가 포승을 가지고 그를 묶어, 음부로 끌고 가서 침침한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절규에 가까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에서건 복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복을 받습니다. “내 영혼을 건지소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구원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되고 조상들의 신앙고백에 합류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고백은 옛날 모세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옛 조상들의 고백을 자기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이란 이미 수많은 성도들이 고백해 온 진리를 자기 것으로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앞서 체험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깨달을 때 믿음의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시인은 그분의 속성을 자기 고백으로 노래한 다음 이어서 그분의 사역을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6절)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낮아졌을 때 하나님의 구원은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천한 자리에 떨어질 때 찾아오십니다. 사람사이에 천덕꾸러기가 되고 미움과 눈총을 받는 자리에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삶이 바닥을 쳐도 하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무서운 질병 가운데서도 처참한 실패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람들 사이에서 비방과 멸시가 넘칠 때에도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거기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을 질병에서 건지시며, 파산선고가 내린 사업도 다시 일으키시며, 떨어진 명예를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구원을 체험한 시인은 스스로를 달랩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절)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님의 진리로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 들리는 부정적인 소리나 사탄의 파괴적인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하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전히 여러분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잃어버린 것에만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남겨진 것들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명절 되어서 사랑하는 이가 떠나간 것으로 인해서 슬퍼하는 대신에 아직도 여러분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자녀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을 후대하신 하나님을 회상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후대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이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한가위의 기쁨보다도 더 큰 구원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 하나님은 추수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우리의 마음에 허락하셨습니다.

하늘에서 가장 귀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축복을 다 허락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인 이 시의 세 번째 부분(8- 12절)을 살핍시다. 오늘 우리가 살필 세 번째 부분은 자신이 당한 시련과 주님이 베푸신 구원을 좀 더 상세히 묘사합니다. 후대하신 하나님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8절) 후대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일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시인은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단 한 마디를 아뢨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영혼을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셨고, 눈물로부터 눈을 구원하시고, 넘어짐에서부터 발을 구원하셨다고 증거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도 그 영혼이 평안함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여러분을 돌이킬 더 남아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한 것 이상,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한 것이나 예상한 것보다 훨씬 넘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 분을 찬양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21)

그 때 시인의 현실은 사망과 눈물, 넘어짐으로 묘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어려운 시련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는 슬픔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걸음은 몸을 가눌 수 없이 비틀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슬픔과 위험이 사라지고 사망에서 그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 “사망의 세계”에서 이제 “생명의 세계”로 넘어왔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이제 생명의 빛이 환히 비치는 곳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시인은 이제 생명의 땅에서 자유를 마음껏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후대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명을 무덤에 버려두지 않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슬픔의 골짜기에 던져두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걸음걸음을 넘어지지 않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면 사망은 놀라 달아납니다.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는 더 이상 죄로 인한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허락하는 한 하나님께 호소할 것이라고 결단합니다.

이같이 놀라운 구원을 받은 자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뿐 아니라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으로 생존세계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이 예배의 자리에 인도되었습니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 시인의 이 고백은 우리 신앙인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 앞에서”가 바로 우리의 현주소이어야 합니다. 순종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서 주님의 임재를 누리면서 걸음걸음 나아가십시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삶은 자유로운 삶입니다. 오직 주님의 인정만 받기 원하는 삶은 사람눈치 살필 일이 없습니다. 물론 사람사이에서 성실하고 예의바르게 살아야 하지만 사람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의 평가는 아침저녁으로 변합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피상적이고 상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면 소신 있는 인생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넘어짐에서 건짐 받은 발걸음은 여호와 앞에 행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 시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단순 미래로 보면 확신에 찬 기대를 나타냅니다. 의지미래로 보면 순종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를 다짐하는 삶이며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것을 기대하는 삶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길 기회입니다.

시인이 눈에 이생이 그토록 애착이 갔던 것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정이 그를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죽음과 무덤의 영역에서는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한가위 명절날 산소에 가 보셨습니까? 거기 누워계신 분들은 더 이상 감사하며 찬송하지 못합니다. 산자의 땅에 우리가 남겨졌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이 없는 사람도 생존세계에서 살아가기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탐욕을 즐기기 위함이요 자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함이요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해서 거기에만 마음을 두고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생존세계에서 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다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삶의 공간에서 그분을 섬길 수 있기를, 그 분의 영광을 드높이며 그분이 맡긴 일을 완수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피는 눈 아래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하나님의 자상하신 보호 아래 안전하게 사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 남은 생애 동안 줄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의 보살핌을 내가 받으리로다 하는 소원의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도 남은 날 동안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을 살도록 소원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부단히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아직도 산자의 땅에 남겨져 있는 것은 한숨쉬며 슬퍼하며 눈물 흘리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도록,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입니다.

이제 계속되는 시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10절)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해요. 믿으면 큰 곤란 같은 것은 당하지 않을 것처럼, 그것도 잘 믿으면 큰 곤란 같은 것은 당하지 않고 피해 갈 걸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보라고 권하잖아요? 시편을 이번 가을에 한번 독파를 해 보십시오. 공동번역은 “내 인생이 왜 이리 고달프냐 하고 생각될 때도, 나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로 번역합니다. 표준새번역은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도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로 한결같이 “내가 믿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콘 고통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나는 믿고 믿음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큰 고통을 당하느냐 안 당하느냐를 가지고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구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상황 속에서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 이것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과거의 믿음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과거형으로 표현 될 때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 옛날에 신앙 좋았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별반 의미가 없습니다. “앞으로 신앙생활 잘 할거야” 그것도 신앙의 고백은 아닙니다. 신앙의 고백은 뭐죠? “내가 지금 믿고 있다는 것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렇게 현재형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지금 믿는 고로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10절)

믿음이 없다면 시인은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리지 아니했다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지 아니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료 인생들에게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고백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외부적인 강요나 권유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확실한 소신을 사람들 앞에 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은 빈말 하지 않고 마음속에 확실한 믿음은 신앙고백을 하게 합니다. 복음을 믿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확신하는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처럼 강한 말은 없습니다.

믿는 고로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중요한 원리입니다.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믿는 고로 말하도록 쉽게 버려두질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시련에 빠지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 때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정말 그것은 큰 곤란이었지만 그런 곤경으로부터 구원받은 까닭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하나님께만 기도하기로 결단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믿음은 큰 시련을 만났으나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런 와중에서 실수를 한 적은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11절) 특히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말을 정당화하는 대신 성급하게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궁극적인 의미로는 모든 사람을 거짓말 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불신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는 정직하고 신실하며 양심적인 자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친구들과 충성스런 지지자들도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이 우리를 실망시킨다고 해도, 그들이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만 힘이 없어서 못하는 것 같으면 그런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로 부르는 것은 야박합니다. 큰 곤란에 직면한 내 처지에서 보면 거짓말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느낌으로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큰 곤란 가운데서 엉겁결에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내뱉은 말은 대개 쓰라린 후회를 동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편치 못할 때, 다급한 상황에서는 판단을 보류하고 침묵하는 편이 유익합니다.

물론 뒤에 자신의 말을 후회할 수는 있지만 그 말을 취소한다고 해서 그 말로 생긴 해악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경겁 중에 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입에 재갈을 먹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엉겁결에 내뱉은 그의 말이 갖는 진리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인간적 도움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추석대목을 지내면서 경험해보신분은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도와준다고 말해 놓고도 정작 도움이 필요한 때는 외면합니다. 어떤 이는 도울 수 있는데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도우고 싶지만 힘이 없어 도우지 못합니다. 다급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기만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시인은 친구와 친척까지도 고난당하는 자신을 버리고 있음을 절감합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기에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붙잡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내뱉는 가장 큰 거짓말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큰 거짓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아무리 큰 곤경에 두신다고 해도 그 곤경 가운데 남겨두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이 무심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극심한 환란 가운데 두는 것은 그 고난을 통하여 지극히 크고 중한 영광에 합당한 자로 빚으시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극한 어려움 속에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시118:8,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은 진실하시다”는 고백이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말은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면에는 “하나님 당신만은 진실하십니다.” 그 고백이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거짓됨과 그 자신의 언짢은 기분을 털어버리고 이제 시인은 신실하신 하나님께로 눈을 돌립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12절) 불완전하고 속이길 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별로 유익하지 못합니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신실하심을 묵상하고 찬양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이번 추석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헤아려보셨습니까? 비록 길이 막혀도 고향길 가는 분들은 기다리는 가족 있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돌아갈 고향도 없고 반겨줄 가까운 가족들도 없으면 추석 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 절기입니까? 길은 막히지만 그래도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 가면 반겨줄 식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나비가 무섭게 날개 짓 했지만 아직도 산등성과 들판에 남아있는 오곡백과가 풍성합니다.

추석 뒷날 월요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아들을 향해서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좀 쉬어라”고 하시면서 “할 일 다 하고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 먼 길 큰아들 있는 울산까지 오셨을 때는 뭔가 같이 좀 지낼 시간이라도 있기를 바래서 오신 거 아닙니까? 주일날 제가 일 해야 되는 날이니까 식구들과 지낼 시간 없었고, 월 요일 날 쉴까했더니 또 나가니까 한 말씀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해서 점심 먹고는 시간을 좀 내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모시고 두동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는 연신 감탄하셨습니다. 다운동 벗어나자마자 “벌써 시골 같다”면서 소풍가는 아이처럼 기뻐하셨습니다. 익어가는 벼논을 보아도 농사를 지어보신 분이라 감격이 남다릅니다.

그러면서 또 말씀하십니다. “저기 고추대도 그대로 서 있네.”텔레비전을 통해 태풍나비가 울산을 강타한 소식도 접했고 우수수 떨어진 배 밭도 보았나 봅니다. 때로 방송이란 너무 호들갑을 떨어서 사실의 일부로 사실의 전부를 왜곡하곤 합니다.

넘어진 농작물이며 떨어진 배를 텔레비전이 계속 보여주었기에 차창밖에 보이는 그대로 남겨진 농작물들을 보면서 신기해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태풍으로 인해 농가의 손실도 크지만 태풍 뒤에 남은 은혜가 더 큰 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 질문은 신앙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어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가 무르익은 가을 들녘뿐이겠습니까?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우리의 마음에 넘치는 감사도 주님이 주신 신령한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 질문 속에는 구원받은 성도의 깊은 감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 속에 또 한해의 풍년을 빌던 옛날과는 성도의 추석은 다릅니다. 이제는 수확하는 추수의 질이나 양을 떠나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모든 은혜”라고 하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부분적인 순종이 좋지 않듯이 부분적인 감사도 무가치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성도가 있다거나 모든 은혜를 다 헤아릴 수 있는 성도가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하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겐 자리해야 합니다. 그 모든 은혜를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하길 원할 따름입니다.

건강한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숨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은혜로 인해 오히려 감사 찬양하려고 소원합니다. 민족고유의 감사절 한가위를 맞이해서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를 한번쯤은 쉬면서 돌아보고 감사하는 절기 되어야만 합니다.

은혜의 교향곡을 연주할 때에 악보 한곳만 틀리거나 빠뜨려도 그 연주가 엉망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가지 은총에 대한 감사를 놓치면 나머지 은혜에 대한 감사마저 시들해 질 것입니다.

“무엇으로 보답할꼬?”참되신 하나님께 올바른 방법으로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신앙은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받으려고 여기 나온 자들이 아니라 가장 귀한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기 위해서 나온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정성을 다 기울여도 지금 여러분의 삶에 받은 그 은혜보다 더 큰 것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다. 하늘의 가장 귀한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구세주로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 받은 것이 감사해서 주일날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예배 마치고 나가면서 “오늘 내가 무엇을 받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예배가 오늘 어떠했는가? 하나님께 기쁨으로 드려졌는가? 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하늘의 하나님이 기뻐 하셨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때로 세워놓은 저희 같은 설교자가 제 구실을 못해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배하는 이 시간에 얼마나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려고 노력했는지, 드리기 위해서 여러분은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런 심정으로 나아와야 받는 게 있습니다. 받으려고만 마음을 먹으면 여러분은 아직도 유치한 신아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실 때마다 “무엇으로 보답할꼬?”무슨 방법으로 드려야 할까를 생각하는 성숙한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는 결실의 가을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정 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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