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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 (갈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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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가 뭐 그리 중요한가? 마음으로만 믿고 살면 됐지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세례 받을 때의 장면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러 세례요한에게 가까이 나아갈 때에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하면서 세례 받으시려는 것을 말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태 3:14)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세례 받지 않아도 될 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자 예수님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 받겠다 안받겠다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았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세례 받으신 것입니까? 이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이루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 3:15)

교인들 가운데는 열심히 교회 다니며 성경도 공부하고 설교도 듣지만 세례는 안 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는 다 받아야 합니다. 믿는 자는 다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정식으로 세례 받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경위를 간증도하며 신앙생활 하는 것이 바르고 옳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는 어떻게 받는 것이 바른 세례이며 세례의 효과는 무엇인가? 바른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야 그 세례가 바른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합하지 않고도 받는 세례가 있을 수 있습니까? 네, 엄밀히 볼 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지 않는 세례란 신앙고백은 하지만 자기는 온전히 죽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지도 않고 그저 세례만 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한 세례라는 것은 세례 받는 자가 그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합하여 그리스도와 붙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그러한 분명한 인식 속에 세례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몽학 선생인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합니다.

(갈 3:24,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이때까지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이루려 애써봤지만 그것은 다 헛수고일 뿐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그 십자가 사건이 나의 사건이 된다고 그래서 그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된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하느냐? 사람이 스스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십자가 사건이란 것을 믿기만 하면 자기의 모든 죄가 사해지고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이론을 어떻게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런 이론을 옳은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느냐 곰곰히 생각해 봐라 그래서 절대로 그런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전면 부정하고 인간이 스스로 노력 하고 고행 하고 율법 지킴을 통하여 의에 이르려는 이론이 다시 고개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앖습니다.

복음주의자 프레드 브라운(Fred Brown)은 율법의 목적을 묘사하는데 세 가지의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첫째, 율법은 치과의사가 환자의 입안에 넣는 작은 거울과 같습니다. 치과의사는 이 거울을 가지고 충치를 검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충치를 치료하거나 뽑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 거울은 단지 충치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한 비정상인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줄 수 있을 뿐입니다. 이 거울로는 진단은 가능하지만 치료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또한 회중전등과 같습니다. 만약 한 밤에 전기가 나간다면 당신은 회중전등을 사용하여 전기차단기가 있는 어두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전등을 비추어 퓨우즈를 살펴 볼 것이며, 곧 차단기 안의 퓨우즈가 타버린 것을 확인할 것입니다. 전원이 다시 들어오게 하기 위해 그 타버린 퓨우즈를 제거한 후, 새로운 퓨우즈로 갈아 끼울 것입니다. 회중전등은 이런 작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은 마치 다림줄과 같다고 합니다. 건축가는 종종 세우고 있는 건물이 수직으로 잘 올라가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무거운 추를 달아 점검을 합니다. 그래서 만약 삐뚤어져 수직에서 벗어난 실수가 발견된다면, 그 건축가는 망치와 톱을 사용하여 그것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건축가는 다림줄을 통해 수직여부를 검사하며, 고칠 때는 망치와 톱을 사용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은 죄의 문제를 지적할 뿐이지 그 문제의 해결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복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통한 복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복이 구약에 분명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다시 율법 아래로 들어가거나 율법을 붙들고 율법을 통하여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마치 저주 아래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무시무시한 말씀이지만 사도바울은 복음이 너무나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자는 더 이상 율법에 메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됩니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합니다.

바르게 배워왔고 믿어왔던 십자가의 복음을 한 순간 헌신짝 같이 내 던지고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설명하면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죄인은 어떻게 의인이 되는가 믿음과 의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를 처음부터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이 기초를 가르치면서 먼저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6절)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 무엇입니까? 불가능한 것을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불가능한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자기 아내가 이미 경수도 다 끊어졌고 마른 막대기와 같아서 싹도 틔울 수 없고.. 아기도 낳을 수 없는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아내가 아기를 낳을 것이다 그리고 네 후손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을 것이고..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과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체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의 예를 들었습니다.

(갈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구약 앞부분에 등장하는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구약 끝부분에 등장하는 하박국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구약의 중심 사상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지 다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속죄의 십자가와 이어집니다.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주겠다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받으시고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의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자랑하여야 합니다.

볼리비아 선교회는 백인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인디언들에게 방법을 사용하여 선교했습니다. 인디언들이 주로 다니는 길목이나 개간지, 혹은 물이 있는 곳에 인디언을 위하여 선물을 놓고 갑니다. 그리고는 그 선물 속에 흰 십자가도 넣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직 한 번도 선교사를 보지 못한 인디언들을 위해서는 흰 십자가를 상징으로 담아 선물을 준 사람이 바로 이 십자가의 주인과 동일인임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선교사들은 흰 십자가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인디언들로 하여금 선물과 함께 놓였던 십자가와 선교사들이 들고 있는 십자가가 동일한 것임을 알게 하여 우정을 나누도록 계획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선교사들은 인디언들의 신임을 얻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 은총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눌린 자와 죄인을 위한 피난처며 원수를 화목시켜 한 형제로 만드는 능력인 것입니다.(디럭스바이블-선물 속의 흰 십자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며 새로운 존재가 된 신분의 표시로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는 것입니다.

검소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초청장이 날아왔는데 장관이 초대한 파티였습니다. 그는 파티가 열리는 날에 평소대로 검소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섰습니다. 버스를 타고 파티 장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파티는 으리으리했습니다. 오색 불빛이 환하게 빛나 고 있었습니다. 그는 입구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입구를 막아 선 문지기가 옷이 허름하다는 이유로 통과시키지 않았으나 다행히 아는 사람을 만나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파티장에 들어선 학자는 구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차를 권하지도 않고 식사를 내주지도 않았습니다. 학자는 머쓱해져서 나와 버렸습니다. 그는 곧 집으로 돌아가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파티 장소로 갔습니다. 그러자 좀 전에 그를 밀어냈던 문지기가 재빨리 거수경례를 했습니다. 그는 쉽게 입구를 지날 수 있었습니다. 파티장에 들어서자 이번엔 장관과 모든 참석자들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장관은 그를 가장 좋은 자리에 앉혔습니다. 고급 식사가 나오고 술도 아주 비싼 것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의자에 앉아서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습니다. 그러고는 옷을 벗더니 음식과 술에 가져다대며 중얼거렸습니다. "옷아, 이것들은 네가 먹어라. 사람을 보고는 주는 음식이 아니라 옷을 보고 주는 음식이니까...."

어린아이가 몹시 아팠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 갔고 의사는 곧 수술했습니다. 그 아이는 어린이 병동에 입원했는데 그 곳은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가 보고 싶어서 초조해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우연히 어머니는 청소부의 옷과 물통과 빗자루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옷을 입고 물통과 빗자루를 들고 병동으로 들어갔는데, 아무도 그 여인을 주의 깊게 보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아파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아이도 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부드럽게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얼마나 부드러웠던지 모든 아이들이 다 편안하게 잠들었습니다.

군대에 입대하면 모두가 다 군복으로 갈아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신분, 군인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과거에는 어떠한 사람이었든지 간에 학교에서 공부하다 군대 온 학생이든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군대에 온 선생님이든지 아니면 시장에서 장사하다가 군대에 온 상인이든지 간에 모두가 다 새로운 존재 새로운 신분을 상징하는 군복으로 갈아입듯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죄의 옷을 입고서는 죽음입니다.  옛날에 한 번은 늑대가 변장해 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양의 가죽으로 몸을 휘감고 양떼 속에 교묘히 들어가서 양과 함께 풀을 뜯고 있었으므로 양치기조차도 이 가짜한테 속고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양의 울타리가 닫혀지자, 늑대도 양과 함께 갇혀서, 문짝은 꼭 잠기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는 저녁 식사에 뭔가 먹고 싶어져서, 양을 한 마리 끄집어내려고 안에 들어와, 늑대를 양으로 잘못 알고 그 자리에서 당장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옷을 대신해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히시는 분입니다. 창세기 3장에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을 가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가죽옷을 친히 지어 입히셨습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흰 세마포로 지은 새 옷으로 갈아입히실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한 첫 개혁은 나뭇잎을 가죽옷으로 갈아입은 것입니다. 가죽옷은 동물을 잡아 희생으로 드려진 옷입니다. 희생의 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옷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줍니다. 예수님의 가죽옷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가려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온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되고 그래서 죄인이 의인이 되었기에 이것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지내면 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믿는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게 되면 그가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혹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주인이거나 종이거나 간에 객관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존재 그리스도로 옷 입은 존재가 되었기에 이제 그들은 세계 어디를 가도 하나이며 한 하나님 한 아버지를 섬기는 자들일 뿐 아니라 국적 인종 신분 여하를 떠나 형제요 자매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몽학 선생인 율법아래 있지 아니 하고 믿음으로 살게 되며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강 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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