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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도 가려느냐? (요 6:6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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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9월의 마지막 주일을 맞은 오천가족 여러분, 오늘도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는 중에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 전 장을 다 읽진 못했지만 - 6장은 그 위치가 특별한 장입니다. 우선 요한복음 6장은 매우 방대한 절수를 갖고 있는 장입니다. 신약성서에서는 보기 드물게 70절이 넘는 장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과 교훈들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더 또렷하게 드러나고, 그와 동시에 제자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서 대규모의 이탈이 생깁니다. 이에 따라서 예수님의 사역도 새로운 전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5장까지의 예수님의 사역 무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6장에서는 다시 갈릴리로 사역지가 바뀝니다. 때는 바야흐로 유월절이 가까워 오고 있었던 때, 즉 봄철입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 보면,
① 1~15 : 오천명을 먹이심
② 16~21 : 바다 위로 걸어 오심
③ 22~59 :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
④ 60~71 : 많은 제자들이 떠나감

중간에 바다 위를 걸으신 이야기가 섞여 있지만 요한복음 6장의 전체적인 내용은 <떡, 빵>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이 드러나게 되는 장(章)에 놓여진 주제, <떡>...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밥>의 문제!
굶주린 군중들을 먹인 기적의 사건과 38절이나 할애한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에 대한 긴 강화(講話), 그리고 제자들의 대규모 이탈...!!

이 모든 사건과 설교의 내용을 뚫고 지나가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가?”

■ 오천명을 먹이심

먼저 우리는 흔히 말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봐야 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자세하게 강해하기엔 오늘 시간이 좀 부족합니다. 우선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을 짚어 볼까요?
왜 장정만 5천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기적적으로 고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없는 양같이 불쌍히 보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날이 저물어가는 빈 들에서 예수님은 음식을 주기로 결심하셨고, 이 일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

(요 6:5b-6a) [5]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하고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6] 예수께서는 빌립을 시험해 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모든 군중을 먹이기엔 노동자의 8달치 품값도 부족하리라는 빌립의 계산은 아직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로 보여지지 못한 상태인 듯 합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가져온 보리빵 5개, 소금에 절인 물고기 2마리는 기적의 실마리가 되었지만 안드레가 던진 질문에서도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확신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요 6:9) 『"여기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 그러나 이 작은 것으로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은 모습을 보고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합니다.

(요 6:14)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표적을 보고 "이 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하고 말하였다.』

성급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군중들이 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는지는 여러분이 조금만 상상력을 동원하시면 충분히 아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더 설명 드리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이런 급변하는 태도에 황망히 그 자리를 접고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요 6: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하늘로부터 내려 온 생명의 떡, 예수님
.
성경은 잠시 제자들이 파도를 잠재우시고,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짤막하게 보여준 후 다시 군중들과 예수님이 만나는 장면으로 연결됩니다.

이미 기적의 빵을 먹는 체험을 했던 그들은 계속해서 집요하게 예수님을 쫓았고,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간 사실을 알게 되자 그곳으로 다시 몰려 들었고 거기서 예수님은 다시 군중들과 만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를 말입니다.

(요 6:26)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표적](sign/semeion)의 목적은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인격과 능력, 본질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그들을 향해 설교하셨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사람들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양식임을 말입니다.

(요 6:27)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 그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

■ 영생을 위한 길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 6:28)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 예수님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는 것 뿐이었습니다.

(요 6: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

이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 또 다른 표적과 또 다른 일을 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나에게 뭔가 계속 보여 주십시오. 내게 매일 기적이 일어나게 해 보시죠.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참 잘 믿을 수 있을텐데요... 라고 말입니다.

(요 6:30) 『그들은 다시 물었다. "우리에게 무슨 표적을 행하셔서 우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선생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군중들은 그 표적으로 광야에서 모세가 만나를 매일 내렸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그런 기적을 매일 일으켜야만 메시야로 인정하겠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우리에게 뭘 먹여 주시렵니까?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면서 진정으로 우리가 소유해야 할 본질이 무엇인가요?
광야의 만나를 먹는 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적이 될 수 있나요?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아주 지극히 작은 하나의 소품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군중들은 거대한 출애굽 역사의 파노라마 속에 작은 점과 같은 만나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요 6:33) 『하나님의 빵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빵> 개념과 군중들의 <빵>이 교차되지 못하고 비껴갑니다.
이 말을 들은 군중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에게 외칩니다.

(요 6:34)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그 빵을 늘 우리에게 주십시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같은 물 얘기를 하면서도 예수님이 말하시는 <물>과 사마리아 여인이 말하는 <물>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쓰여졌던 것처럼 지금 군중들이 말하는 빵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빵은 다른 의미로 각자가 사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혼동되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복(福)>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여덟가지의 복, 팔복과 여러분이 추구하는 복이 많이 일치하고 계십니까?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여, 평화를 이루며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그런 복,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듣는 복... 그런 복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까?

물질 세상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이겨 내셨던 세가지 유혹에 현혹되어 있다면 이는 가장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로 빵을 만들어 내고, 의미없는 기적을 바라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며, 천하 만국의 부귀와 영화를 주겠다는 사탄의 달콤한 제안에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 기독교의 모습이라면... 배부름의 기적을 주신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가버나움까지 찾아 온 군중들의 모습이 우리 모습이라면... 이를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비극적이고, 안타까우실까요?

“나는 생명의 빵이다!” (요 6:48)

이 선언은 요한복음 전체를, 아니 복음서와 신약성서, 모든 성경의 내용을 꿰뚫는 핵심 선언이자, 예수님 사역의 절정을 보여주는 선언입니다. 요한복음 그 이후의 내용은 이 선언의 의미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은 다시 한번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주의 상징에 담아 제자들에게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실은.... 이것입니다.

(요 6: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열광적으로 따라 다니지만 믿지 않습니다. 기적을 체험하고 그 현장에 있었으며, 그 기적의 떡을 함께 나눠 먹었지만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또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만 아직 슬프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기독교가, 성도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인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가 되었는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용서,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영생, 예수님의 평안, 예수님의 기쁨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빵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을 봐야 예수님을 믿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군중들은 열광적으로 굶주림을 해결해 줄 메시야의 왕국을 꿈꿨습니다. 그들의 기대대로만 예수님이 해준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도 세울 각오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도망치셔도 걸어서 가버나움까지 할 걸음에 달려 올 열정도 누구 못지 않게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슬프게도... 슬프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분 삶의 의미를 믿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눈이 아직 떠지지 않았습니다. 영의 이야기를 들어도 육적으로 해석하니 엉뚱한 오해와 갈등만 불거집니다.

(요 6:52)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서로 논란을 하며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하고 말하였다.』

결국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름 아닌 핵심적인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요 6:64a)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 떠나가는 제자들

요한은 결국 이 생명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사실을 가차없이 보여줍니다.
60절과 66절에....

(요 6:60)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하고 말하였다.』
(요 6: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

호젓한 시간... 예수님은 남겨진 12명의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요 6:67b)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저는 이 질문을 던지시는 예수님의 눈빛을 상상해 보면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집니다.
“너도 갈꺼니?”, “너도 그럴래?”...

이 질문은 ‘아닙니다.’라는 부정적인 대답을 간절하게 원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너도 한낱 빵의 문제로 날 떠날거니?
너도 그깟 명예 문제로 날 모른 체 할 거니?

인간의 빵 문제와 하나님의 해결책이 부딪히는 이 정점에서 요한복음은 그 생명의 떡을 믿지 않는 제자 중 하나가 마귀라고 잔인하게 선언해 버립니다.

(요 6:7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 하나는 악마다. "』

이 말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이 곧 마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 맺으며...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것’이야말로 온 인류의 숙원이었습니다. 떡 5덩이와 말린 생선 2마리로 5천명을 먹일 수 있는 분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심정...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런 군중들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이 달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관심이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들을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군중은 현실의 생존을 책임져 줄 능력의 종, 시급하게 매 끼마다 옭죄어 오는 ‘빵 문제’를 해결해 줄 지도자에 관심이 있습니다.

기적의 음식 만나일지라도 그 만나도 사람을 영원히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 만나조차도 ‘썩을 양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실 ‘하늘로부터 내려 온 생명의 떡’은 영생에 이르게 할 양식입니다.

예수님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빵의 문제’가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을 인간 영혼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아낌없이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고, 그의 피와 살을 마시고 먹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빵의 문제보다 더 먼저 구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물으시면서 촉구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며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립 할 것을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 우선순위를 <영생>에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영생, 생명에 대해 더욱 열중하시는 오천가족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정 연 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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