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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요 1: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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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항해 끝에 작은 육지의 새들이 자기 배 돛대 줄에 와 앉던 순간, 아직 눈으로 확인 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곳에 육지가 있다는 확신을 가진 컬럼버스의 마음은 얼마나 떨렸을까? 떨어지는 사과를 무심코 그러나 “왜 떨어지는 걸까?” 하고 바라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순간 뉴톤의 마음은 떨렸고 기쁨이 차올랐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 말은 들은 세례요한의 두 제자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39절, 그들은 가서 예수님께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예수님과 함께 거하였습니다. 아주 짧은 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뒤에 안드레는 시몬(안드레의 형제)을 만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신앙생활 수십 년을 했는데도, 어디 가서 “나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도 못하는 우리에 비하면 너무 순간적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 짧은 순간 예수님에 대해 뭘 알았다고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그런 것을 보면, 그 당시 웬만한 유대인들이나, 성경을 좀 읽거나 공부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곧 오시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기다림 속에서 자기의 스승이 “바로 저 사람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다.”고 말씀하시니 즉시 그 하나님의 어린양을 향해 눈을 돌리게 된 것이고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리하지만 기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그날 자기에게 주어지는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오늘도 신나는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과 출근해 보아야 일도 별로고, 신나는 일도 없고, 만에 하나 회사라도 어려워 문 닫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으로 출근하는 사람은 그날 하루의 일이 다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아이고 지겨워. 또 지겨운 하루가 시작 되었구나” 그러면서 만나기 싫은 사람, 하기 싫은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일어나기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신나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 사람은 벌떡 일어나 휘파람을 부르면서 창문을 활짝 열어 제킬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이번에는 열심히 했으니 성적이 오를 거야.” 하는 기대를 하는 학생과
“애써 봐야 늘 그게 그런데 이번에도 여전할거야.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고”하는 생각을 가진 학생과는 그 결과가 다른 것입니다.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구원을 찾는다고 찾아지는 겁니까? 우리가 천국을 찾는다고 찾아지는 겁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다고 찾아지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신 것이니까요.
세상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내가 수고해서 찾는다고 찾아지고, 내가 수고해서 구한다고 구하고, 내가 수고해서 문을 두드린다고 열려지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구하라. 그리하면 구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리리라” 하셨을까?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고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냥 유대인 중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를 기다리던 세례요한은 그 예수님을 보자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던 세례요한은 그 예수님을 보자 “이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그 순간 세례요한은 마음은 감격과 기쁨으로 충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감격과 기쁨을 얻기 위해, 진리를 찾으라, 생명을 구하라, 구원의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1:9,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3절, “너희가 악할 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뭘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 그러면 그 앞에 무얼 구하고, 무얼 찾고, 무슨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럼요.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찾고, 성령의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리스도인들 무얼 구하고, 무얼 찾고, 무슨 문을 두드려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것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은 누가 구한다구요?
마태복음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이방인 곧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나 구하는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구하는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가 아니라 예수 밖에서 구하는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 구하고 찾는 사람들이 교회 나올 때 무슨 기대로 나올까? 그런 것은 모두 교회 밖에 있는데…….
교회 안에는 뭐가 있어요? 사랑해야 되지요. 희생해야 되지요. 봉사해야 되지요. 그런 것만 있어요. 그러니 교회가고 싶어요? 뭔가 생기는 게 있어야 하는데, 정작 원하는 거는 모두 교회 밖에 있고, 교회가면 내 것 꺼내 놓고 와야 하니, 그러니 교회 올 때 무슨 기대로 오겠어요? 교회 올 때 뭐가 신나겠어요? 그러니 예배하고 봉사하는데 무슨 기쁨이 있겠어요?

보세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빌립. 이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주신 말씀 속에서 메시야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한 예로, “메시야가 오신다. 그분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어린양으로 오시는 고난의 종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 되어진 메시아입니다. 그들은 그런 메시아를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 역시 같은 말씀으로 늘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메시야를 말입니다. 안드레와 요한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메시야였던 것입니다. 그런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스승이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예수를 가리키는 순간 “바로 저 분이구나”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가 예수님께 가보니 잠깐 동안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인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예수 만나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사람 찾으려면 사진이 있으면 쉽습니다. 하다못해 몽타주라도 있으면 찾기 쉽습니다. 집을 찾으려면 약도가 있으면 찾기 쉽습니다. 그것도 자세한 약도라면 더욱 찾기 쉽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에 대한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냥 우두커니, 아니면 딴 생각으로 앉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앞을 지나가신대도 그 분이 누군지도 모르고 앉아있습니다. 아무리 생명과 구원 되시는 예수님을 선포해도 그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도 감격도 없습니다.

우리 어린아이들 방에서 놀다가 예배 끝나면, “야! 다 끝났다.” 그리곤 나옵니다. 어른들도, 예배하는 어른들도 똑같습니다. 맨송맨송 앉았다가, 그냥 졸고 앉았다가 설교가 끝나면 “야! 이제 다 끝났구나.” “오늘 예배 다 끝났구나.” 이 “다 끝났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그때부터 눈이 반짝 빛납니다. 만에 하나, 이러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시몬을 찾아간 안드레의 말,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나다나엘을 찾아간 빌립의 말, “성경에 기록한 그 메시아를 우리가 만났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내가 죽을 사람인데 그리스도를 만났다. 내 생명의 구주를 만났다.”

유명한 연예인들. 때로 그들의 집 앞, 그들의 연습장 앞에는 밥을 새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팀은 며칠 전부터 공연하게 될 운동장 앞에서 잠자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에 주인공들이 나타나 보세요. 어떻게 되나? 어쩌다 멤버 중 하나 하고 눈만 마주쳐도 까무러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를 만난다고 하는데 그런 기대감이 있어요? 예수님의 눈만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안아 주셨는데 까무러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요?
더욱이, 이들은 노래합니다. 그것도 자기의 인기와 명예와 돈 때문에 노래합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그들을 환호합니다. 심지어 그들이 입는 옷, 신발, 머리 색깔까지 따라 합니다. 헌데, 날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신가요? 바로,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분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래서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얼마나 환호합니까? 그 예수님을 얼마나 따라 합니까?

전에, 딸아이 친구가 서울 가서 H. O. T 집인가 연습장에 가서, 그것도 그 집 앞에서 하루 밤 새우고 왔대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려고, 예수님을 만나려고 밤을 새운 적 있어요?
한류열풍. 일본 사람들이 최지우 보려고 비행기 타고 한국을 다녀갔습니다. 배용준 보러 다녀갔습니다. 우린 예수 만나려고 그렇게 할 수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어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으세요? 아직도 맨송맨송하세요?

금을 찾기 위해 굴을 파던 사람의 눈에 반짝 금가루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 그 마음이 얼마나 두근거리겠어요? 곡괭이로 힘차게 퍽 내리 찍으니까 누런 금 덩어리가 보였어요. 그 마음이 어떨 것 같아요? “노다지다. 노다지” 가슴이 쿵쿵 뛰지 않았겠어요?
산에 오른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 했어요. 그 마음이 어떨 것 같아요? “에이, 산삼이구먼.” 그렇게 마치 도라지 보듯 했겠어요? “심봤다!” 온 산이 떠나가라고 소리치지 않았겠어요?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이 마르고, 손에 땀이 나고, 그러면서도 감격과 기쁨으로 터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습니까?
안드레와 빌립.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 마음속에서 부글거리는 감격과 기쁨이 있었어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든지 이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감격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진단해 보세요.
“내가 정말 예수 믿는 건가?” “내가 정말 메시야를 만났나?” “내가 정말 예수를 영접했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가?”
확인 방법 간단합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주위 사람들에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있는가 없는가를 따져 보면 됩니다.
안드레와 빌립.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들은 메시야를 만난 감격과 기쁨으로 흥분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인도한 안드레. 성경이나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별로입니다. 그가 전도한 베드로는 굉장한데 안드레는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절반은 베드로 차지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사도행전 1:13에 이름만 한 번 등장합니다. 어쩌다 안드레 이름이 나오면,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레는 행복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만났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아 되시는 예수 곁에만 있다면…….”

사도바울. 그의 이름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자기를 들어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랑이 없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나의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긴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그는 오로지 예수 때문에 산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정신인 것입니다.
예수는 헤롯이나 가이사 같이 굉장한 분 아니었습니다. 그냥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안드레 또한 조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상관없었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만났으니까요.
베드로는 한 번 설교에 5천명이 회심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물론 베드로를 전도한 이후에도 전도 했겠지만, 성경은 한 사람 베드로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는 작은 일이 따로 없습니다.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일은 큰일인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요 6장). 빌립은 조금씩 준다하더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바로 이 작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5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 남긴 것입니다.
안드레는 작은 일이지만 주님을 위해 큰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기쁘게 일했던 사람입니다.
교회학교교사. 지금은 작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이들이 커서 말씀대로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게 되면 지금의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봉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안드레의 확신에 찬 말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이 말이 베드로를 예수님께 나아가게 했고, 이 베드로가 주님의 위대한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역시 안드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 했지만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은 바로 예수 때문입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베드로. 예수님은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42절, “요한의 아들 시몬 그 이름을 게바”라고 하셨습니다. “게바”(아람어)는 “바위 같이 튼튼한 자” 혹은 “바위” “반석”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이름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 보다, 그의 인격 그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인격과 본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나는 예수 십년 믿었어도 내 성격은 바꾸어지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소리입니다. 그동안 십년은 예수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 성격, 자기 기분대로 예수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신앙생활 해 온 10년을 돌아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때문에가 아니고, 자기 기분대로 예수를 믿어 왔던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바뀌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같은 사기꾼 거짓말쟁이를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다나엘 보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사기꾼, 거짓말쟁이 야곱을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서 성도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죄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로 본질이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심성, 인격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심성 인격이 바꾸어지길 축원합니다.

또 한 사람 빌립. 그는 그다지 적극적인 성격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안드레와 요한 같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 나선 것도 아니고, 그 당시의 어두움을 밝힐 등불이 어디 있나 하고 애타게 찾아 헤매던 의식 있는 젊은이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준비된 사람이었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좇으라.” 하시자 즉시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겁니다.
그 역시 예수님을 만나자 메시아를 찾았다는 감격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뜨거운 마음을 함께 나눌 사람을 생각하다가 가장 가까운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빌립의 전도. 45절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름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아마 빌립은 요즈음 말로 하면 성경 공부를 단단히 한 사람 같습니다. 그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래서 성경으로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성경지식에 대해선 한 수 위였습니다.

46절, 본래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다고 성경은 예언 하였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말이 맞습니다. “나사렛이 아니다. 베들레헴이다.” 그 나다나엘의 말을 들은 빌립은 예수님의 방법으로 “와 보라”고 합니다.
전도는 성경을 완벽하게 알아야만 하는 것 아닙니다. 빌립처럼 엉성하게 알아도 전도는 해야 합니다. 중매 잘하는 사람이 잘 써먹는 말, “만나보면 알 텐데 뭘 그거 따지느냐?” 일리 있습니다. 만나보면, 당사자끼리 눈이 맞으면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논리적 설명이 아닙니다. 상대를 이해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진주서부교회 전도사 시절. 촉석초등학교 앞 점포에 세든 조그마한 교회입니다. 경대 김흥길 교수. 시내 큰 장로교회 집사인 동료교수가 “김박, 그 조그마한 교회에 있지 말고, 우리 교회로 와” 그러면 김 교수는 “자네가 우리 교회로 와. 와서 우리 전도사님 설교 한 번 들어 봐” 그랬답니다.
믿음이란 사람들에게 “와 보라”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을 보여주는 곳이 아닙니다. 시설을 보여주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의 사랑이 경험되어야 합니다.
“와 보라! 우리 교회에 오면 예수 만나게 된다.”
“와 보라! 우리 교회에 오면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와 보라! 우리 교회에 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이것이 전도인 것이다.

놀라운 것은 나다나엘의 반응입니다. 그는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나사렛  사람이라고? 그가 무슨 메시야냐?” 그랬던 사람이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나다나엘이 빌립에게서 뭔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와 다른 흥분된 모습, 눈 빛, 그의 표정, 그의 진지한 말 속에서 “아니, 어제까지 보던 빌립이 아니구나. 분명히 다른 뭔가가 있어.” 그런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와 보라”고 말하는 빌립에게서 뭔가를 보게 된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나다나엘. 상대방의 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고집을 꺾을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찬성해도 자기가 아니면 아니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나하고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 수긍 할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만약,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느냐?”고, 자기만 옳다고 주장했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도할 때도 상대방의 생각이며 말을 묵살하고, 내 생각 내 말만 할 때도 역효과가 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빌립을 따라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 앞에서 나다나엘의 고백,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 나다나엘의 고백 역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방법으로 여러분이 이곳에 오게 되셨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온 세상의 임금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하는 확신에 찬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 메시야 만났다.” “나 구세주 만났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확신에 찬 신앙고백과 확신 있게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 영 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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