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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7) “변화와 만남과 얼굴 봄” (고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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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로 오늘 아침 일곱번째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저에게 베푸실 궁극적인 은혜는 저를 아버지 집으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일일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쓴 성경 다섯 책 중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어거스틴은 그의 영혼의 자서전인 「참회록」의 마지막 13권 마지막 부분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습니다. “오 주 하나님! 당신의 평화를 주시옵소서. 평온의 평화를, 안식의 평화를, 저녁이 없는 평화를 주시옵소서.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없고 석양이 없습니다. 당신이 창조의 사역 후에 일곱째 날 안식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영생의 안식의 때에 당신 안에 쉬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또한 인류 역사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신국론」의 마지막 22권 마지막 부분을 역시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복 주심과 거룩하게 하심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쉬고 보며, 보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도성 곧 끝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어거스틴에게, 저에게 그리고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앞으로 베푸실 궁극적인 은혜는 저와 여러분들을 아버지 집으로, 천국의 축복으로 데려가시는 일입니다. 그 천국의 축복은 주님이 재림하시므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저에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말하면 “내게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너무 확실한 때에는 미래형 대신에 과거형을 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앞으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실 은혜가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미래형 대신에 과거형을 그대로 사용하겠습니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변화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가장 큰 문제와 가장 큰 고민은 나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기질입니다. 이기적인 기질과 정욕적인 기질과 위선적인 기질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문제와 가장 큰 고민입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하신 기도의 사람이셨지만 자기는 늘 화를 잘 내는 나쁜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었지만 자기 속에 죄의 기질이 항상 자리잡고 있다고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노라 이 사망의 법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화도 잘 내고, 거짓말도 잘 하고, 미워도 잘 하고, 싸우기도 잘 하고, 때로는 도둑질도 잘 하고, 때로는 사기도 잘 치고, 때로는 간음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탄식하면서 살아갑니다. 나의 못된 기질 때문에, 가족의 잘못된 기질 때문에, 때로는 신자들의 잘못된 기질 때문에, 우리는 항상 탄식하고 고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들에게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씀했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오면서 잘못 만들어진 나의 못된 기질이 변화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나 자신의 잘못된 삶으로 잘못 만들어진 나의 못된 기질이 변화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죄의 기질과 죽음의 기질이 변화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기적인 기질이 사라지고 대신 이타적인 기질이 생기고, 정욕적인 기질이 사라지고 대신 무 정욕적인 기질이 생기고, 위선적인 기질이 사라지고 대신 진솔하고 투명한 기질이 생긴다는 일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게도 닮기를 원하던 주님의 성품을 닮게 된다고도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우리들이 주님과 같아진다고 까지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요일3:2). 우리의 못된 기질에 변화가 일어날 뿐 아니라 우리의 못된 기질과 존재가 주님과 같아진다는 말씀은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저는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이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멍하니 이 말씀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혼자서 중얼거렸습니다. 어떻게 우리 못된 피조물인 인간들이 주님과 같아질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신성 모독 같은 말씀같이 느껴져서 그저 멍하니 그 말씀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 만남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사람의 가장 큰 슬픔과 아픔은 죽음을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입니다. 아니, 죽음 이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만 하는 일이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가 11살 때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들과 헤어진 일은 저에게 있어서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던 아들 철원이와 죽음을 통해서 헤어진 일도 저에게 있어서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헤어지는 일은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사랑하던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 마지막 이별을 고하면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고 했습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전송하니라”(행20:37,38).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뿐 아니라 빌립보교회 성도들과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을 보고 싶어했고 그들과 헤어질 때에는 마음에 슬픔을 느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을 보고 싶어했고 그들은 사도 바울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보고 싶지도 않고 헤어져도 슬프지도 않은 사람은 정상적인 성도들은 아닙니다. 

  헤어짐의 슬픔을 지니고 사는 성도들에게 만남의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주께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그리하여 우리가.” 여기 ‘우리’는 죽은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 모두를 가리키고 주 안에 살아남은 자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들이 모두 함께 만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저는 제가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와 제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철원이를 반갑고 기쁘게 만날 것입니다. 저에게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시고 순교의 피를 흘리신 저의 아버지도 반갑고 기쁘게 만날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길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도 모두모두 반갑고 기쁘게 만나서 무릎을 꿇고 감사와 기쁨을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최근에 별세하신 이중표 목사님도 반갑고 기쁘게 만나서 손을 붙잡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과 항상 함께 있을 것이고, 사랑하던 사람들과 항상 함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큰 기쁨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남북 이산가족의 만남처럼 너무 기뻐서 얼싸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만남이 주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얼굴 봄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는 낙원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중세교회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visio Dei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 보기를 갈망했고, 사도 바울도 주님의 얼굴을 보기를 갈망했고, 사도 요한도 주님의 얼굴 보기를 갈망했습니다.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13:12). “우리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 “그의 종들이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계22”4).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아버지 집으로,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222장). 이것이 우리들이 누릴 궁극적인 은혜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책 마지막 장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합니다. 아마 그래서 어거스틴도 그의 「참회록」과「신국론」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는지 모릅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22장을 천국을 묘사하므로 마무리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 천국에는 생명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천국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죽음이나 죄나 저주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에는 또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다고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임재와 통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에는 또한 그의 종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과 어린양을 섬긴다고 묘사했습니다. 더 이상 세상이나 돈에 무릎을 꿇거나 섬기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어린양만을 섬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얼굴을 가까이서 직접 보면서 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황송한 일이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은혜와 기쁨입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일보다 더 즐겁고 더 기쁘고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들을 대신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신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살게 되고, 우리 대신 죽으신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을 보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그리고 온 우주에 비취시는 빛이 되신다고 묘사했습니다. 다시는 어두운 밤이 없고 등불과 햇빛이 필요 없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빛은 행복이고 기쁨이고 사랑이고 영광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아버지의 빛 가운데서, 행복과 기쁨과 사랑과 영광을 누리면서 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영원토록 행복과 기쁨과 사랑과 영광 가운데서 살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은혜가 주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저와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의 잘못된 기질과 존재가 변화되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사는 기쁨의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에 베푸실 최고의 은혜입니다.

  이와 같은 천국의 은혜를 바라보고 믿으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근심이나 걱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원망이나 불평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이나 좌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이나 돈에 대한 애착도 염려도 있을 수 없습니다. 천국의 은혜를 바라보고 믿으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오직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제물 되는 삶이 있을 뿐입니다. 오직 천국을 준비하는 수고와 헌신의 삶이 있을 분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영원한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여러분들은 제발 세상에 붙어서 불행하게 살지 말고 천국을 바라보고 누리면서 멋지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4:7,8). 딤후4:7,8).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천국의 축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영원히 영광에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 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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