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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지혜로운 처신 (잠 25: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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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16)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17)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18)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니라 (19) 환난 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 (20)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으니라 (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22)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 25:15-22)

  잠언 25장은 유다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솔로몬의 잠언으로 왕을 존경할 것과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할 것, 그리고 자기의 마음을 지혜롭게 제어하여 처신할 것 등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처신의 지혜로운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내와 부드러운 혀를 가집시다.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25:15)
여기서 "오래 참으면" 이라는 말은 인내의 지혜를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거짓과 허위와 이간, 중상과 모략을 거침없이 해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때 참지 못하고 다투어 극심한 갈등을 유발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성도들은 이런 때 침착하게 격동하거나 흥분하지 말고 초연한 자세를 취하라고 지혜자는 권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같은 처신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것이 지혜로운 성도들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관원"은 히브리어의 "카친"이라는 말로 중재자나 재판관을 의미합니다.
중재자나 재판관은 결국 침착하고 냉정하게 사리를 따지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신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어떤 일에 앞서서 먼저 변명부터 하려고 하거나 흥분하여 따지려고 하지말고 침착하게 인내하고 참으면서 냉철하게 사리를 따지라고 지혜자는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게 된다"(15)는 것이니 침착하게 인내하면서 냉철하게 사리를 따져 들어가는 부드러운 말 앞에서는 그 어떤 중상과 모략도, 거짓과 술수도 꺾이고 만다는 말입니다.
예화) 기드온의 부드러운 설득이 흥분해 있던 에브라임 사람들의 노를 쉬게 하였습니다.(삿 8:1-3)
예화) 아비가일의 조리 있고 진지했던 호소는 다윗의 살기 어린 흥분도 잠재울 수가 있었습니다. (삼상 25:23-31)
결국 인내와 부드러운 혀가 상대방의 뼈를 꺾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성도는 어떤 경우에든지 신중함과 부드러은 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음식을 과식하지 맙시다.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 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16)
특히 꿀은 과식해서는 안됩니다. 입에 달아서 과식하기 쉽지만 후에는 속이 메스껍고 불타서 토하게 됩니다.
과식은 무엇이나  바람직한 것이 못됩니다.
이 세상에는 못 먹어서 생긴 병보다는 너무 많이 먹어서 생긴 병이 더 많다고 합니다.
못 먹어서 생긴 병은 먹고 영양을 공급해 주면 쉽게 낫지만 많이 먹어서 생긴 병에는 약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자는 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꿀을 만나거든 족하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식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할까 염려해서입니다.
여기서 지혜자가 말하는 꿀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 기쁨, 쾌락으로 적당히 즐길 수는 있지만 그것에 빠져서 침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할 본분까지도 져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예화) 삼손이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죽은 사자의 몸 속에 있던 꿀은 먹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곧 나실인이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꿀을 찍어 먹는 사이에 삼손은 이미 죽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꿀을 과하게 먹지 말라는 말은 세속에 취하여 빠지지 말라는 지혜자의 애정 어린 충고요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배고픈 5,000명을 먹이신 후에 남은 것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굶주려 죽어 가는 북한 동포를 생각하며 음식을 낭비하지 맙시다.

셋째. 이웃 간에 예의를 갖춥시다.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러우니라" (17)
친구와 이웃은 가장 가까운 상대요 벗입니다. 그래서 허물없이 자주 왕래하고 이야기하고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가까울수록 예의가 무시되고 함부로 말을 하기 쉽고 결례를 하고 실수를 하게 되어 상대방이 싫증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말 지혜 없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무엇보다도 지혜 없는 행동은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입니다.
이간하는 말이나 흉을 보거나 약점들을 남에게 말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발생되고 있는 무서운 독소들입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말하기를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살"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의도적인 말이든, 실수에 의한 말이든 간에 이웃에게 있어서는 뾰족한 화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방망이'는 히브리어 "멤피츠" 즉 곤봉이나 절구대를 말합니다.
즉 이웃에 대한 이간하는 말을 하는 것은 이웃을 절구에 넣고 찧어대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찔러 대는 칼이고 살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있는 "살"이라는 말은 한자의 "煞"로서
1) 무교에서 말하는 저주의 살이고,    2) 고기를 잡는 작살을 말하고,    3) 전쟁에서나 사용되는 화살을 말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상처를 낼 것인가 그래서 옛날부터 중상 모략은 세 사람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1) 자신과  2) 상대방과  3)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모두에게 부덕을 끼칩니다.
그래서 잠언은 필요 이상으로 쓸데없이 이웃집에 자주 드나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처신과 행동에 신중하라는 말이요. 가까울수록 예의를 갖추라는 말씀입니다.

넷째. 믿음직한 이웃이 됩시다.
"환란 날에 진실치 못한 자를 의뢰하는 의뢰는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19)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았던 환난이 찾아올 수 있는데 그 날에 가장 요긴하게 도움이 되고 의지할 곳은 역시 이웃과 친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귀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위급한 때에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환란 때에 의지할 만한 이웃이 없거나, 있더라도 신실치 못하다면 그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과 같다는 것입니다.
부러진 이는 정작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할 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위골된 발은 급하게 뛰어야 할 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아픔을 주듯이 환란 날에 진실치 못한 이웃을 의지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통만 더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외경 집회서 37장에 보면 몇 가지 지혜로운 권고를 해주고 있습니다.
1) 언제나 경건한 사람과 가까이 하라  2) 10계명을 가장 잘 지킨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사귀라  3) 네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과 가까이 하라  4) 네가 실패했을 때 네 고통을 함께 나눌 만한 사람을 사귀라
즉 1) 너는 진실한 사람이 되고,  2) 믿음직한 이웃이 되어 주고, 3) 진실한 사람과 사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완전한 이웃이나 친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위급한 환란의 때에 이웃과 친구만을 의지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말씀은 환란 날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진실치 못한 인생을 의지하지 말고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혜를 소유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섯째. 합당한 처신을 합시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를 부음 같도다"(20)
합당한 처신이라는 말은 적절한 때, 적절한 행동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모든 일에는 적합한 때가 있으므로 어떤 일을 할 때에는 경우에 맞게, 적합한 때에 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해도 마음이 상한 사람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적합하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울어 주어야 할 집에 가서 웃는 것은 마치 쏘다 위에 식초를 붓는 격이고 겨울에 옷을 벗기는 경우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과는 함께 울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롬 12:15)
그러나 잠언이 너무나 당연한 기초적인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처신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웃는 사람과 함께 웃고 기뻐해 주는 일에 너무나 인색합니다. 오히려 질투심과 시기심이 유발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축하하는 마음이 울어 나오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는 자로 하여금 함께 울어 주는 일도 역시 쉽지 않습니다.
오늘이 무관심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아파하고 울어 주기에는 모두 아량들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웃을 모르고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본문에서 합당한 처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분별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라는 교훈이면서 동시에 성도들은 함께 기뻐해 주고 함께 울어 주는 아량과 용기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참 성도들은 선하고 합당한 일에 동참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 참된 승리자가 됩시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21-22)
이 말씀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정신입니다.
쉽게 말하면 적극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욕하지 말고, 그 원수가 배고파 할 때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할 때는 물을 마시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주문이 아닙니다.
보통의 인간으로서 이 같은 마음과 아량이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다툼이 있고 미움과 갈등과 증오가 있는 것은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혜자는 무리한 말씀 같지만 이 같은 용기 있는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원수에게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랑이 그 원수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참회와 회개로 이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용기있는 행동은 참회와 회개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나가서는 "핀 숯으로 원수의 머리에 놓는 격"이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상까지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 팔레스틴에서는 화로에 불을 담아 간단한 음식을 조리하거나 난방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불은 그 집안이 소중하게 여기는 불씨였고 또 여러 용도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이 불을 꺼트리게 되면 화로를 가지고 옆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 와야 하는데 이웃 사람의 마음이 너그러울 경우 화로에 숯불을 가득 채워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씨를 얻은 사람은 그 화로를 머리 높이 까지 쳐들고 온다고 합니다.
그것은 지극한 관대와 친절에 대한 감사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평소 원수와 같이 지내던 이웃이 불씨를 얻으러 왔을 때 관대하게 불씨를 화로에 충분하게 채워 주면 그것이 곧 원수의 머리 위에 핀 숯불의 화로를 놓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이 용기 있고 너그러운 행동에는 하나님께서도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가난한 이웃이 있습니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비록 평소에 불편한 관계이거나 원수간일 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북한은 바로 우리가 먹이고 마시우게 해야 할 이웃입니다. (박광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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