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소망을 주는 교회 (행 2:42-47)

  • 잡초 잡초
  • 435
  • 0

첨부 1


□ 소망을 주는 교회  행 2:42-47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장 42절-47절)     

10월호 <월간목회>에 어느 목사님이 쓴 글에서 이런 것을 읽었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간 어떤 장로님이 이민생활 22년 동안에 교회를 무려 108번이나 옮겼다고 합니다.
22년 동안 108번을 옮겼다면 1년에 평균 5 교회를 옮겼다는 결론이고, 결국 두 달 만에 한번 꼴로 다른 교회로 옮겼다는 통계가 나옵니다.
그 분이 왜 이렇게 교회를 옮겼을까?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어디에 있을까 하여 이렇게 자주 옮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옮기는 날부터 그 교회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눈에 드러나는 것이 그 교회 목사의 허물입니다.
맨 먼저 그 교회 목사의 허물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합니다.
다음에는 교회에 대한 모든 것, 심지어 주보나, 찬양대나, 주방이나, 제직들에 대하여 하  나 같이 단점만 지적하고 찾아냅니다.

그러니, 한 교회에서 두 달 정도 있으면 그 교회의 단점이 다 드러나곤 해서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옮겼습니다.
이렇게 하던 그 분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도 장례식을 주관해 줄 교회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끝까지 섬긴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108번째 교회의 목사님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장례식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도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이교회, 저교회를 찾는 분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적인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상적인 교회는 이 땅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교회의 구성원을 보면 모두 허물 많은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다른 성격, 빈부, 신분의 차이들이 함께 모인 곳 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갈등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런 갈등에 머무르지 않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따라 힘써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도록 힘쓰며 성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 교회는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함을 향해 부단히 몸부림치며 애쓰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격려하며, 마음을 함께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에 이르도록 힘쓰는 교회이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I. 그러므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세상을 향하여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가리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발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고 하였습니다.
등경 위에 두어야 온 방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어둠을 밝히는 일입니다.
세상의 구석진 어두움을 찾아 그 속에 빛을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봉사 생활일 것입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늘지고 컴컴한 사회의 구석구석을 교회는 빛이 되어 그들 앞에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향해 소망을 주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보는 시각에서 보면 너무나 많은 지적 사항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 지적한 장로님도 이런 시각에서 이상적 교회를 찾아 헤매다가 108번씩 교회를 옮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의 잘못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교회라는 개념 이해가 잘못 되었습니다.
교회는 자기를 포함한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마치 조직체로만 보았습니다.
교회를 조직, 단체, 모임, 기구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소금들입니다.
소금 덩어리들입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이웃에게 소망을 주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어둠을 밝히는 빛인 동시에, 맛을 내는 소금이요, 부패를 방지하는 존재들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된 우리들은 맛없는 세상에서 조미료가 되어야 합니다.
부패를 막아야 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맛없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인간미 없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사귈 수 없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교회의 존재 이유를 무엇으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맛을 내는, 소망을 주는 교회이어야 하겠습니다.

II. 그러면 소망을 주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어야 하겠습니까?
1) <말씀>이 중심이 되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를 교회의 모델로 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말씀 중심을 이룬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42절을 다 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절)고 하였습니다.
여기‘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는 말은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이란 주님의 분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말씀>이 교회의 모든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말씀>에서 이탈되면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말씀>이 심령에 있는 사람과 <말씀>이 없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직분을 감당하면서도 <말씀>이 그 중심을 이룬 사람과, 세상 상식과 교양이 중심을 이룬 사람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살아 있으면 그 말씀이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됩니다.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는 주님이 함께 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2)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42절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었다’고 했습니다.
떡을 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았다는 말입니다.
한 식탁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한 가족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다양한 신분, 지위, 빈부가 함께 떡을 떼는 모습은 그것이 바로 천국의 모형입니다.
세상에서 어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어디 상류층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서 먹을 수 있습니까?
다른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지만, 교회에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삭막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를 질투하면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피를 나눈 형제들도 서로 다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명절 때도 잘 만나지 못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렇게 보면 주님의 피로 거듭난 신앙의 형제자매가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서로 상대방을 이용하지 말고 서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결국 사회봉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물질과 시간과 재능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교제로 세상의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기도>에 힘쓰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42절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떡을 떼며 어떻게 하였습니까?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하였습니다.
떡을 떼는 목적이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배고픔을 메우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다가 싸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시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려면 기도하지 않고는 힘듭니다.

기도는 영적 에너지를 축적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만사형통의 길입니다.
교회는 기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 삼일기도, 금요기도회를 모이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충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뿐입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와 제자들이 사귀 들린 어린이를 고치지 못했다가 주님이 고치는 것을 보 고서는‘왜 우리는 고치지 못했습니까?’했을 때, 주님의 대답은‘이런 유는 기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영적 능력을 받는 길입니다.
영력은 교회의 힘이요 생명입니다.
교회가 영력이 사라지면 인간의 집단으로 전락됩니다.
그런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일주일동안 주일 예배만 참석하고 밥 먹을 때나 기도한다면, 사탄들도 웃을 것입니다.
싸울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세상의 유혹에 다 넘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예 건드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길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잔꾀로만 살게 내 버려 둡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제직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 영광이 바로 세상에 소망을 주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소망을 주는 상도교회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김 이봉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