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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차 갈라서니 (행 15:3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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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조선일보, 동아일보 두 신문 일간지에 한국교회의 대표급 원로 목사님들이 모여서 참회의 기도회를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글로 발표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 제일 앞자리에 세 분이 나란히 얼굴 표정을 심각하게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강원영 목사님, 조용기 목사님, 김창인 목사님 이렇게 제일 앞자리에 나란히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기도를 하고 계셨고 그들의 기도 내용이 신문에 발표가 되어 온 세상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 신문을 보신 분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 많이 보셨잖아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국 교회의 대표급 목회자들로서 지나온 과거에 무엇을 잘못했는가? 제일 첫째가 피차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자기 교파의 신앙만을 주장해 상대방을 저주한 것에 대한 회개를 중점적으로 발표했습니다. 잘한 기도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 어느 나라교회보다도 싸움을 많이 해서 수없이 갈라졌습니다. 거기에 나오신 목회자들이 서로의 교단을 마귀라고 했습니다. 우리만 의인이라고 그렇게 말한 것을 회개한 것입니다. 늦었지만 원로들이 되셔서 그런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할례 문제가 신학적인 문제가 되어 최초의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는데 그 결과는 아름답게 결정이 났습니다. 오늘 말씀 30~35절에 회의를 하고 돌아온 안디옥 교회 대표자들의 기쁨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할 것은 예루살렘 교회 이후 지금까지 모든 지상의 교회는 이런 신학적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새로운 문제가 닥쳤을 때 이것이 신앙적으로 옳은가 아니면 그릇된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해야 되는 괴로움을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끊임없이 와서 교리적인 혹은 신학적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이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런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장례식을 치른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교황 재임시 공로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중에 옛날 카톨릭 교회가 잘못한 부당성을 회개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교회도 얼마든지 잘못 행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 분열은 거의가 다 교리적 차이, 성서 해석의 차이에서 빚어진 불행입니다. 지나고 보면 유치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게 심각했습니다. 우리 한국 장로교회가 이렇게 많이 갈라지지 않았습니까? 처음에 모세5경의 저자에 대한 문제 때문에 분열이 시작됐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모세5경 아닙니까? "모세가 기록했다!" "그렇지 않다. 신학에는 문서설이라는게 있는데 그 많은 문서설이 집대성된 것이다." 그래가지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갈라지기 시작한 겁니다. 모세5경을 모세가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을 마귀라고 해서 갈라졌는데, 모세5경을 모세가 썼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지금 모세가 썼다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죄를 지었잖아요? 이런 교회의 잘못을 솔직히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연구도 더 많이 하고 기도도 더 많이 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합니다.

최초의 예루살렘 회의는 그 당시에는 생명과 같았던 할례의 문제를 회의를 통해서 해결했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점입니다. 간혹 신자들이 신학 토론을 하는 일이 있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본래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변론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건설적 합의를 이루어내야 되는데 제 목회 경험으로 보면 끝까지 안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할례의 문제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에 속하는데, 만약에 "아니다. 예수를 믿어도 할례를 끝까지 받아야 구원의 완성이다."라고 유대교가 주장하는 것을 고집했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음의 진리는 율법주의의 한 신념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형태의 유대교 하나가 생겼을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진리는 동쪽으로는 요단강을 넘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단강 넘어가면 이방인이 살고 있고, 서쪽으로는 지중해가 끝입니다. 북쪽으로는 헐몬산이 경계입니다. 남쪽으로는 시내산 그 이상을 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지중해 연안 4분의 1 정도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유대교의 한 분파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을 겁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할례 받지 않아도 된다."라는 결정을 할례 받은 사람이 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유대교의 틀을 벗어나서 온 세계로 확산되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36절부터는 그러한 기쁨을 가지고 "2차 전도 여행을 떠나자!"라고 했고, 1차 전도 여행 때도 할례 안 주었지만 예수님을 다 믿게 했지 않았습니까? 결국 예루살렘 총회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회의를 하게 되었고 "할례 안 받아도 괜찮다."라고 결정이 났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6절에서 18장 38절까지 제2차 선교여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1차 전도 여행을 떠날 때는 동기가  38절에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을 그냥 두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다시 한번 찾아가서 격려하고 믿음을 굳게 해주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대로 신앙은 한번 생겼다고 계속 되지는 않습니다.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없이 많은 시험의 과정을 이겨야 하고 계속적으로 노력을 해야 신앙 유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부흥회를 다닙니다. 어젯밤 12시 넘어서야 돌아 왔습니다. 부흥회 목적이 무엇입니까? 처음 신앙의 회복입니다. 처음 신앙의 회복을 위한 영적 운동입니다. 초대교회 신앙 회복 운동이 부흥회라고 하는 이름으로 행하여져서 이렇게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의 모범이었던 바울 선생의 고백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을 그때까지 지키기 위해서 나는 마치 선한 싸움, 전쟁을 하듯 이 믿음을 지켜왔다."라고 말입니다. 믿음 지키는 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신앙은 생활이 필요합니다. 노력을 해서 내 신앙이 훌륭하게 유지되도록 해야만 신앙의 색깔이 변하지 아니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일년만 교회를 나오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고 기도도 않는다면 내가 언제 예수 믿었던 사람인가 새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는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사실 영적 전쟁은 우리의 힘으로는 승리가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돕고 계시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하면서 가는 영적 싸움입니다.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에서 얻은 이 믿음의 형제들은 할례는 받지 않아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교리를 가지고 우리가 예루살렘 최초의 종교 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했다. 그러니 할례 안 받아도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얼마든지 구원의 달성이 된다."라고 다시 한번 확신시켜주고 믿음에 도움을 주려고 2차 전도여행을 출발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여행을 여러 번 다녀왔는데, 근래에 와서는 다니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습니다. 우선 선교지 가운데 위험이나 어려움의 요소가 옛날보다 많이 줄어서 여행을 수월하게 다닐 수가 있습니다. 선교 여행 다니는데 몇 가지 위험이 이렇습니다. 하나는 기후가 큰 어려움을 줍니다. 제가 지금 가끔 이렇게 설교를 하다가 기침이 나오는 것도 인도네시아를 가서 기관지를 다친 것이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안 없어집니다. 의사가 별 치료를 다하고 엑스레이도 수십 번 찍어봤는데 잘 안 났습니다. 그때 선교 여행을 갔다 와서 열병 들은 것 때문에 기관지 어딘가 고장이 나있기 때문에 조금만 기후가 이상해도 기침이 납니다. 거기 처음 가서 열병이 났을 때는 어떻게 뜨거운지 100미터를 못 걸어갔습니다. 나무 그늘에 위통을 다 벗고 가만히 앉아있어야지 조금만 움직여도 몸이 이상해집니다. 이런 기후가 다른 나라를 찾아가는 선교사들의 큰 장애물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질병! 모기 한방 잘못 물렸다가는 죽는 수가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저와 함께 일하던 한숭인 선교사는 거기에서 모기 한방을 물리고 잤는데 병원에 한달을 입원했습니다. 살아남은 게 다행입니다. 그렇게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기가 어디를 가나 다 있어 아직도 기후와 질병이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음식 문제가 있는데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먹어야 되는 고통도 또한 선교지에서 큰 장애물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핍박입니다. 가차 없이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슨 변호사를 써서 법적 투쟁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못합니다. 살려줄 때까지 그냥 있는 겁니다. 지금도 북한에 잡혀있는 목사님들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에 가끔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테러가 있습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나쁜 사람들은 선교사들 가방에 틀림없이 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느닷없이 와서 두드려 패고 뺏어 가는 테러가 아직도 심각합니다. 이런 어려움들이 있는데 지금은 한국 사람들이 세계 어느 곳에나 살기 때문에 대도시만 찾아가면 한 가지는 해결됩니다. 바로 음식 문제입니다. 어디 가서나 한국 기업이 많이 나가있기 때문에 한국 음식점이 생겨 대도시만 찾아가면 음식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아주 큰 혜택입니다. 지금은 오지 선교 여행이 아니면 문화시설이 아주 편리해져서 20년 전 보다는 훨씬 더 좋은 혜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과 바나바의 조건은 지금 말한 이 다섯 가지의 모든 악조건이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려고 계획하고 용기 있게 나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한번 갔다 오고 난 후에 다시는 안 간다고 마음먹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 너무 큰 위험을 느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또 떠나자며 그 어려웠던 길을 다시 떠나려고 하는데 오늘 말씀에는 문제가 하나 등장합니다. 마귀도 가만히 있지 않고 최대한 역사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전도 여행을 다니는데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있었습니다. 왜? 마가 때문입니다. 마가와 바나바는 같은 집안입니다. 삼촌인 바나바는 마가를 어떻게 해서든지 훌륭한 선교사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 마가가 자꾸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가로 인한 충격이 있습니다. 밤빌리아에서 선교여행을 같이 떠나서 고난스럽게 다니는데 피차 도와주어도 어려운 판에 마가가 "나 못하겠습니다. 당신들이나 가세요."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바울이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는 나이도 젊고 에너지도 많고 청년이고 돌아가면 너희 집이 그래도 괜찮은 2층 다락방을 가지고 있는 부잣집인데 이거 한번 돌아오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움이 많다고 우리 같은 사람도 지금 하고 있는데 그만둔다고 하느냐?" "못하겠습니다." 그랬을 때 바울이 마가를 나쁘게 생각하고 충격을 받아서 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번에 또 마가를 데리고 가자."라고 했고, 바울은 "큰일 난다. 지금 가면 또 그만두고 올 것이다."라고 해서 차이가 생겼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바나바라는 사람은 훌륭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결함이나 약점이 있는 사람이지라도 될 수 있는 대로 잘 인도해서 쓰려는 마음 밭을 가지고 있는 게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데, 바울도 그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바울 선생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생각하면 아주 소름이 끼칩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제일 날뛰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군졸들을 거느리고 유대 영토 밖으로 도망간 사람까지 다 잡아서 잔멸하기 위해 길을 떠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섭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변화되어서 자기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갑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사울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길리기아 다소에 숨어있는 그의 고향집에 찾아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 그동안 일어났던 모든 변화를 사도들에게 잘 설명함으로 "이제는 그 열심을 가지고 우리의 동역자가 되었다. 우리 함께 예수의 복음을 전하자."라고 적극적으로 변호해줌으로 이 사울이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나바의 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인 마가가 조금 실수를 했더라도 나이가 어려서 경험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집에 돌아가면 좋은 게 많으니 이 젊은 청년은 어머니 밑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데 바울과 바나바의 전도 여행을 따라다니다 보니까 너무 고생스럽고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첫 번 경험에서 실수를 했을지라도 이번 2차 전도여행에서 또 데리고 나가면 잘 훈련이 되어 훌륭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가 될 것이다. 데리고 떠나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선교에 있어 바나바는 관용주의를 택하고 있고, 바울은 정경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순교자적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해야지 모두 어려움을 겪고 서로 도와주어야 될 그 판국에 저렇게 마가같이 너희들은 죽든지 말든지 나는 도로 돌아가겠다 하는 사람은 우리까지 선교를 못하게 한다." 바로 정경주의 선교의 신학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바나바는 관용주의로 "그랬을 지라도 지금의 마음이 또 따라나서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에는 다시 도망을 오는 한이 있어도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은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로 오늘 말씀에 두 사람은 심한 다투고 언쟁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결국에는 좋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피차고 갈라서는 비극을 겪게 되었습니다. "좋다. 그러면 나는 마가를 데리고 떠나겠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떠났고, 바울은 같이 갈 사람이 필요하게 되어 실라를 새로 선택해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각각 나누어서 떠나게 되는 행복인지 불행인지 모르는 그런 일이 지금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교훈이 있습니다. 사실 바나바와 바울은 지금까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견의 차이가 슬프게 헤어지는 역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도 우리가 인정을 해야 합니다. 초대 기독교의 최고의 지도자도 이런 모습이 보여졌습니다. 그러면 이런 일은 우리 교회 역사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을 해야 우리의 갈 길이 보이지 그렇지 아니하면 갈 길이 막힙니다. 하나님의 사역에서 서로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함께 있으면서 평화와 공존이 어려울 때는 분리하여 평화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논리입니다. 어떡합니까? 끝까지 싸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약 셋이서 또 떠났다고 합시다. 바나바는 자꾸 칭찬해주고 바울은 "너 언제 갈 거야? 또 갈 거지?"하면 선교가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슬프게 헤어졌습니다. 분열의 이유를 보면 하나님의 교회를 어렵게 한다든지 하나님의 일을 망가뜨린다든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피차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해보려는 동기가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문제는 인간관계 때문에 이런 어려운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을 보면 편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에나 다 나타납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열두 제자 가운데 세 사람을 제일 좋아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좋아하던 사람이 요한입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서는 어느 사람이나 다 지니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여러분이 낳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더 가는 자녀가 있습니다. 자기가 둘 다 낳아놓고도 그렀습니다. 어떤 때는 데려온 자녀인 것처럼 대할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아내한테 말은 안 하지만 아들, 딸 둘을 낳아놓고 아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아들을 더 좋아하는 게 나한테 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도 편견이 있음을 좀 인정을 해야 되는데 마가를 놓고 바울과 바나바의 편견이 이런 어려움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지혜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나바의 사역은 15장 39절에서 끝이 나고 더 이상은 나오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보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인간관계를 인위적으로 너무 친밀하게 가질 때 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저 시카고의 한 교회는 교인들이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시카고에는 한인 의사들이 많이 이민을 갔기 때문에 한쪽 편에는 병원 의사 그룹이 분명하게 어떤 보이지 않는 형성을 이루고 있었고, 또 한편에는 국제 결혼하신 분들도 많이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는 이런 게 모두 없어져야 되는데 의사 그룹의 교인들이 한쪽을 조금 인격 대우를 하지 않는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이 국제 결혼하신 여자 분들이 똘똘 뭉쳐서 반대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군인들과 국제 결혼하신 한국 여자들이 많이 이민을 오게 되는데 그분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아예 90퍼센트 이상이 그런 분들만 계신 교회들이 미국에 많습니다. 저도 그런 교회에 여러 번 부흥회를 갔었는데 그런 곳에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이 "이분들은 인간적으로 얼마나 끈끈한 정을 가지고 똘똘 뭉쳐있는지 그것이 목회에 어려움을 줄 때가 있고 도움을 줄 때가 있다."라고 말하는데 "왜 그러느냐? 아니, 여자 교인만 이렇게 많이 있으면 행복하잖나?"라고 물어봤더니 그분들의 마음만 움직이면 안되는 게 없고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하지만 마음이 틀려버리면 교인이 하나도 안 온다는 겁니다. 반드시 그분들의 세계에는 반드시 약간의 조직 같은 그룹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큰언니라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목사가 잘못 건드렸다가는 토요일에 전화를 다 돌려서 "너희들 내일 교회 나가지 마!" 그러면 실제로 한 명도 안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님! 나는 큰언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결력이 좋은 겁니다. 의사 그룹하고 큰언니 그룹하고 모였는데 같이는 안 됩니다. 갈라서야만 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갈라지는데 담임 목사님이 큰일 났잖아요? 의사 그룹의 대표자들이 목사님한테 와서 "목사님, 우리들하고 목회를 하셔야지 저 사람들하고 하실 겁니까? 장래가 있습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저 쪽에서 "목사님! 저 사람들하고 해봤자 속만 썩어요. 우리 그룹하고 해요."라고 둘이 갈라진 겁니다. 목사가 아예 둘을 다 버리고 가든가 아니면 한쪽을 선택해야 될 그런 입장에 섰을 때에 목사님은 이렇게 결정을 했습니다. "나는 약자를 선택하겠습니다. 문제를 당신들이 일으켰어요. 왜 당신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이렇게 편파를 만들어서 교회 분위기를 흐려놓으신 겁니까? 그리고 우리하고 목회하자고 하고 서로 저들을 버리라고 당신들이 먼저 말했어요. 당신들이 틀렸어요. 나는 언니가 좋아서 언니들과 하겠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 안에서 동창생, 고향사람 이런 거 뭉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사 그룹이 뭉치는 바람에 그 교회가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인격 대우를 안 한 겁니다. 예수 안에서는 모두 하나라는 신앙적 개념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열은 있으나 하나님의 역사는 쉬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마가와 바나바가 떨어져나갔지만 같이 가야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실라를 선택해서 바울 선교에 성공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실라가 로마 시민입니다. 그래서 실라를 앞장세워서 로마의 관할권을 다닐 때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실라가 다 해결해서 바울 선교에 실라의 선택은 정책적으로 아주 잘된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큰 도움을 주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빌립보 감옥에서도 바울과 실라가 찬송 부르는 게 나오는데 실라는 정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바울의 동역자로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에는 어떤 사람이 없을 때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얼마든지 더 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 어떤 특정인에게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제가 20여 년 동안 목회하던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할 때 "이필재 목사가 이 교회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어떤 누가 와도 나보다 훨씬 더 잘할 테니까 그런 줄 아십시오. 나는 마음이 변해서 다른 데로 가니까 변심한 사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이 없으면 안 되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예비해 놓은 사람이 있어 이 때는 이런 사람을 쓰시고 저 때는 저런 사람을 쓰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그때마다 그런 중요한 사람이 죽으면 기독교가 없어졌느냐? 더 잘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누가 없어지면 큰일 난다, 어느 목사님이 은퇴하시면 큰일 난다. 이렇게는 우리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쉬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다소 불행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지지 말아야 될 그런 입장에 있는데도 사소한 일에 마음이 갈라져서 헤어졌지만 그 헤어짐이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나의 일을 충실하게 해나갈 때 구원 역사는 계획대로 우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이루어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마가는 도중에 실패했으나 마가복음의 기자가 되고 나중에는 바울 선생이 말년에는 마가를 자기 곁에 데리고 와 달라고 했습니다. 잠시 실수한 자도 다시 썼고,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졌으나 헤어짐이 오히려 기독교 역사에 크게 성취된 것을 생각하면서 올바른 신앙과 신학의 방향을 가지고 우리들이 서있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주신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이 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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