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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흔 아홉과 하나 (눅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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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대상은 항상 두 그룹으로 나누어 집니다. 하나는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온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들어보자고 마음에 거부감을 가지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전자는 주로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시비거리를 찾으려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듣느냐에 따라서 그 말씀은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겠다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나를 살리는 말씀이 되고 내게 위로가 됩니다. 말씀이 자신의 문제에 해답이 되고 용기와 힘을 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내물을 찾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 그 말씀은 바로 내게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거부감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면 말씀을 들으면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원망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씨뿌리는 비유도 그렇습니다. 씨는 동일하지마는 밭에 따라서 그 열매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말씀은 동일하지마는 말씀 받는 마음에 따라 열매가 다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도 이런 구조로 이해하면 이해하기 매우 쉽습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은 바로 죄인과 세리를 의미하고 있고 아흔 아홉 마리 양은 이스라엘의 교권자 그룹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교권자 그룹은 항상 잃어버린 한 마리에 대해서 항상 냉소적이었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처럼 중요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아흔 아홉으로 이해되는 교권자 그룹은 한 마리가 그들에게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한 마리만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리는 그들에게 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 그룹을 멀리했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까이 할 때에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도 한 마리 그룹을 정죄하고 멀리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 한 마리 그룹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 한 마리 그룹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를 찾으신 것도, 여리고 세리장 삭게오를 찾으신 것도 다 그와 같은 마음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때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원망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들에 버려 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한 마리의 양 입장에서는 참 목자이지만 아흔 아홉 양에게는 형편없는 목자일 수 있습니다. 한 마리가 없어졌다고 아흔 아홉을 버려 둔다면 아흔 아홉의 입장에서 보면 무책임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와 아흔 아홉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잃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회개하는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께 잃어버림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잃었다는 표현에 대한 해답은 회개를 의미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 양은 목자가 떠난 후에도 잃은 양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목자가 들에 버려 두고 갔기 때문에 잃어버린 양이지만 아흔 아홉은 집단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목자를 보고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양들끼리 처다 보면서 위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양들은 아흔 아홉 마리가 있다고 해도 목자가 없으면 동일하게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집단에 속해 있으면 잃어버려졌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차짖하면 이런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공동체에 익숙해지면서 자기 개인이 예수님과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조직 속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태도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사람이 많아도 주님은 우리 하나 하나와 관계를 가지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교회에 찾아오실 때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찾아오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생은 누구나 세상에 올 때 혼자 태어납니다. 그리고 죽을 때 혼자 죽습니다. 그 누구도 한 인생의 태어남과 죽음에 동행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 볼 뿐이지 아무도 그 인생에 동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혼자 살다가 혼자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은 바로 그 하나에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직화하고 집단 속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조직화되고 집단화되면 개인의 가치보다는 조직의 가치에 매인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가치보다 조직의 가치를 항상 요구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흔 아홉은 바로 조직 속에 있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조직이 개인을 대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리나 죄인은 그들 조직에서 퇴출당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조직에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 하나의 존엄성은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을 찾아가신 것은 주님은 하나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말씀에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입니다.

회개란 조직 속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조직 속에 있는 동안은 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조직이 자신을 대신하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개인이 되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 개인을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주님 앞에 내가 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찾으신 사실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의 자리에 서지 않은 한 주님의 찾음이 될 수 없습니다. 내 모습을 그대로 주님께 보일 수 있어야 주님의 찾음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바로 하나의 가치를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즉 자신의 가치를 찾는 운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회개란 바로 그 자신 하나가 하나님 앞에 서는 모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조직 때문에 자신의 실체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일터라는 조직 때문에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주님 앞에 내 모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흔 아홉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흔 아홉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로써 자신을 볼 수 있어야 진정으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로써 자신, 어머니로써 자신, 직장에서의 자신, 교회에서의 자신이 아니라 자기 홀로 하나님 앞에선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시간이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는 시간이요 잃어버린 나를 찾는 시간인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의 집에서 나왔을 때 얍복강 앞에서 모든 관계 속에 있는 자신을 내려 놓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을 때 바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난 시간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은 구원하실 때에 한 사람씩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가정이라도, 한 교회라도 결국 하나씩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새 식구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하나씩 부르셨습니다. 함께 등록을 하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씩 찾아 오신 분이십니다. (조 병 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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