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함께 요단을 건너갑시다.(수 3:14-17)

  • 잡초 잡초
  • 512
  • 0

첨부 1


무슨 일을 하든 새로운 일에는 기대감도 있지만, 두려움과 떨림이 있기 마련입니다. 새 학기가 되어 새 학년이 되는 초등학교1학년 어린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이나, 새 직장에 취직하는 신입사원, 새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나 모두에겐 기대감과 함께 두려움이 있을 겁니다.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질 것입니다.

1945년 4월 12일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무렵 미국인들은 믿기 어려운 뉴스를 듣고 심한 충격에 바지고 말았습니다.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뒤를 이어 33대 대통령으로 취임해야 했던 부통령 해리 트루먼이었습니다. 미주리주 시골 출신의 트루먼은 하루아침에 자신이 거인 루스벨트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된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에서 거의 신화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미 역사상 처음으로 12년간 3회 연속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그의 존재는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가히 절대적이었습니다.

여기 그런 고민을 하던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입니다. 수1:1을 보면, ‘모세가 죽은 후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억압 속에서 노예 생활하고 있던 200여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지팡이하나 들고 탈출시킨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기도할 때 엄청난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고, 땅이 갈라지고, 손을 들어 기도할 때 적군과 싸워 백전백승하는 존재로, 승리만 얻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사이에선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가히 하나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40년간의 방황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약속으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바로직전, 전설적인 지도자인 모세가 죽은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2인자였습니다. 위대한 존재 모세의 뒤를 이어, 그에게는 (수1:9)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두려움과 놀라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사역을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생각이 있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눈치 빠른 분은 제가 무슨 내용을 이야기 하는지 아실 겁니다. 담임목사님이 안식년으로 1년을 약속하고 가셨지만, 사실, 몇 개월 후에 귀국하실지 아니면, 1년을 다 채우시고 오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족한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겐 여호수아와 같은 두렵고 떨림이 있습니다. 단독목회를 한번도 사역한 적도 없고, 목회경험도 짧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어립니다. 게다가 키도 아담사이즈로 작습니다. 그렇지만, 체격은 좋습니다.(믿든지 아니 믿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 하셨습니다. 분명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한사역을 위해 이루기 위하심이라 믿습니다. 저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뿐 더러,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협력해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어떻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200만명이 함께 협력하여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입성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리더자의 모범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요단강 도하가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2백만 백성의 역사적인 대이동이자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를 따라 요단강을 건너는 때는 본문 15절을 보니까, ‘모맥 거두는 시기’ 라고 나왔습니다. 즉, 우리 달력으로3,4월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계절로 치면 겨울인데, 이 때는 비가 제일 많이 쏟아지는 우기였습니다.  게다가 요단강의 원천이 되는 헬몬산의 만년설이 한참 녹아내리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의 상수원이라 할 수 있는 갈릴리 호수가 가장 많이 불어나는 때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평소 폭이 30m도 안 되는 요단강이 이 시기에는 무려 1.6km이상의 급류가 되어 흐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급한 요단급류에 가장 먼저 들어가야 할 사람은,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예전에 홍해를 건너본 경험과는 좀 달랐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어 홍해바다를 가른 후에 바다를 건넜지만, 지금은 15절을 보니까.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 흐르던 물이 그쳐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들어서니까,, 물이 서서히 멈춰서기 시작했습니다.
만약에 잘 못되어 힘찬 강류에 휘말려 죽더라도 제사장들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15절을 다시보면, “항상 언덕에 넘쳤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언덕은 퇴적작용으로 생긴 강의 양쪽의 자연 제방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흘러 넘쳤습니다. 제사장들이 들어간 곳은 서서히 깊어지는 바닷가의 해변 같은 곳이 아닙니다. 들어감과 동시에 바로 빠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들이 무거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으로 들어가면, 죽음을 각오한 행위였다고 하겠습니다. 리더자들의 모범이 있었기 때문에 요단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물론 믿음을 수반한 행동이었지만, 상당한 결심이 아니었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무슨 모임이든 리더자의 모범이 없이 추종자들을 이끈다는 것은 폭력입니다. 기독교는 쥐어짜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순종하며 자원하는 종교, 흘러넘치는 종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리더자의 모범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후에 정작, 자신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면, 더 이상 복음의 역사는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한, 리더자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제일 먼저 강으로 들어가자 강물이 가라졌습니다. 그 길로 모든 백성이 강을 건널 때 까지 제사장들은 강 한가운데 서 있어야 했습니다. 강을 건너는 백성들은 놀라움과 기쁨으로 강을 건너며,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하나님의 기적과 감동 속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정작 리더였던 제사장들은 수고와 고통이 따라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200 만명이 넘는 사람들과 수많은 가축들이 짐차를 끌고 오면서 요단강을 건너는 데는 반나절 이상 긴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입니다.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묵묵히 서서 버텨 주어야 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언약궤를 메고 요단을 건널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이 가나안의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기쁨과 소망의 땅으로 건너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장로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믿습니다.
언제든지, 저를 불러 주시면, 가겠습니다. 아퍼하는 곳이 있다면, 아픈곳의 상처를 싸매주려 합니다. 물론,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어야 합니다. 가장 낮아져야 할 사람은 목회자 입니다. 언제든 부르면, 낮은 자리에서 여러분을 섬기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한 몸이라는 지체 의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명령에 그의 참모였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병사들, 백성들이 요단강으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만약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중심에 서서 있으니 안심하고 요단을 건너라는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더 이상 요단강은 기적의 장소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나는 배를 타고 건널 겁니다. 그게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인데 왜 이런 무모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 무슨 미친 짓입니까?”라고 반문했다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한 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명령에 여호수가 순종했고, 모든 백성이 따라 주었기에 요단강은 하나님의 기적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이러저런 제시를 해도 여러분이 같이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기적의 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신뢰감을 주어야 하고, 성도는 목회자에 대한 신뢰감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호수아가 200만명의 백성과 가축을 끌고 요단강이 아닌 갈릴리바다 쪽으로 가서 모세가 했던 것처럼 “바다야 갈라져라!!” 수도 없이 외쳐대다가 안되니까,,, ‘방법이 바뀌었나?’ 싶어서 이번엔 지팡이를 높이 들어 흔들면서, “바다야 갈라져라!!”라고 외쳤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서, “여기가 아닌가벼?” 하면서, 다시 수많은 백성들과 가축을 이끌고 요단강에 와서 “제가 착각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시길, 요단강을 건너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요단강을 건너려고 했다면, 백성은 목숨을 걸면서 건너고 싶은 맘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목회자라고 해서 실수 없이 완벽하게만 가는 리더는 아닙니다. 목회에도 끊임없는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신뢰감을 주어야 하고, 성도는 어떤 일이 있어도 따르겠다는 지체의식이 필요합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겠다는 지체의식이 필요합니다. 모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권찰님, 성도님들, 모두는 한 몸입니다. 한 지체입니다.
“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예화: 한심한 병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적의 상황을 보고 받은 지휘관이 전 병사를집합시키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군들! 제군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믿는다! 지금 보고에 의하면 아군 인원이 모두 1,000명,적군이 1,000명이다. 즉! 각자 한 명씩만 처치하면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다! 알겠나!"
그러자 한 패기만만한 병사가 소리쳤다.
"장군님! 걱정 마십시오. 전 두 명을 해치우겠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병사도 소리쳤다.
"장군님! 그럼 전 집에 가도 되죠?"

한 몸은 자신만 쏙 빠지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이끄심이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리더자가 모범을 보이고, 희생이 있었고, 모두가 하나의 지체라는 지체의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끌어 주심이 없었다면, 위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을 겁니다. 언약궤가 가장 먼저 요단강을 건너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기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레위사람 제사장들에게 언약궤을 메고 앞서 가게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 2천규빗 정도 앞서 간 제사장들의 언약궤를 보고 좇아가게 하였습니다. 여기 2천규빗은 약 800미터 거리를 두고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왜 언약궤와 사람들 거리를 떼어놓고 좇아가라는 겁니까? 여기 언약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입니다. 언약궤가 앞장서서 갈 때 하나님께서 앞서 가는 것입니다. 성소 안에서 지성소 안에 있던 언약궤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왜 그렇게 거리를 두었습니까? 그래야 잘 보입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200백만 이상되는 사람들입니다. 상거가 멀어야 누구든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명하게 언약궤를 초점을 맞출 수 가 있습니다.
왜 모든 사람들이 언약궤를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인도함을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남녀노소가 시선을 다른데 두지 말고 하나님의 궤를 좇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져야 합니다. 우리를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불변의 언약궤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