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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엡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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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4:1-16)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니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  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지난 주 에베소서 3장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계획은 교회를 가정공동체로 세워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정공동체는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내 뼈요, 살도 내 살이로다.”는 사랑의 고백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4장은 가정공동체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에 우리들은 세상적인 인습이나 관습과 풍습, 세상 유행에 따른 철학이나 사상, 남들이 좋다하거나 자기 마음에 드는 종교, 아니면 자기 경험이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었습니다. 이러한 삶을 두고 성경은 이렇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엡2:2)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다시 말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기 전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 즉 사탄의 뜻에 따라 살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구의 뜻에 따라 살고 있는지, 자신의 삶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하나님 자녀들로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신분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마귀의 조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어둠의 자식들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사는 빛과 생명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마귀에 속한 신분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속한 신분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그 시민권이 지옥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첫 번째 내용은 “겸손”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교만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겸손의 반대 교만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생활입니다. 마귀는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낮추어 이웃을 섬기며 살지 아니하고 남보다 더 높아지려하거나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자신은 죄인이며 부족하고 무가치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전혀 살 수 없다는 고백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사밧 왕은 아람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성전에 나가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대하20:12)...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바로 이같이 “나는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는 고백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겸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겸손한 가 교만한 가를 알아보려면, 기도하는 지 그 여부, 기도하면 어떻게 기도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사 왕은 처음에 모든 우상을 타파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재위 35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훗날 등 따뜻하고 배가 부르자 아사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에 심한 중병이 들었어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의사들만 쫓아다녔다고 했습니다.(대하16:12) 아사 왕은 처음에 겸손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었지만 나중에는 교만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교만한 자의 기도와 겸손한 자의 기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눅18:9-14)....(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교만한 자의 기도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자기 자랑만 늘어놓을 뿐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해 전혀 회개가 없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의 기도에는 가슴을 치는 회개기도가 있습니다. 겸손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 항상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는 생활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두 번째 내용은 “온유”입니다.

온유는 예수님처럼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불의와 불법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하지만, 자기 자신이 당하는 불편부당한 대우나 모욕에 대해서는 노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주석가 글래다너스는 “온유는 자기를 모함해도 복수하지 않는 미덕”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온유는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 의지가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작가 ‘마크 퇴니’는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본능의 감정대로 미워하고, 복수하고 싶을 때 우리는 짐승이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며 상처를 잊어버리고 살고자 할 때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까지 용서하고, 용납하고, 축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다.”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행7:60)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불의를 당하여 죽어가면서도 그들을 원망하거나 성내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스데반이 바로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진정한 기독교인입니다. 온유란 영어로 ‘미크니스’(meekness)인데, 본래 이 말은 ‘잘 길들여져 성품이 부드러워진 동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야생마를 잡아 재갈을 물리고 코뚜레를 뚫고 멍에를 씌워 경주마로 길들여졌을 때, “온유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영적으로 적용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시어 기도와 찬송, 예배와 말씀 등의 훈련을 통해 경건하게 잘 다듬어진 마음과 언행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됨을 뜻합니다. 참으로 온유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의 멍에 를 메고 온유를 배워야 마음에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어떤 집사님이 앵무새를 하나 샀습니다. 앵무새를 사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 잘하는 앵무새를 하나 샀습니다. 이 앵무새는 딱 한마디만 합니다. 처음에는 신기했는데 나중에는 황당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앵무새가 하는 한마디 말은 “키스해 주세요.” 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은 자기 앵무새에게 경건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자기 교회 목사님이 앵무새를 기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앵무새는 경건의 훈련이 잘 되어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 전화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앵무새가 너무 세속적인 말만 해서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데 좀 훈련시켜 주시겠습니까?” 그랬더니 문제없으니 보내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집사님의 앵무새를 받아서 자기 앵무새의 새장에 함께 넣었습니다. 목사님 앵무새가 주인입니다. 주인이 먼저 인사를 하겠지요. 목사님 앵무새도 사실 한마디 할줄 알았습니다. “다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니까 집사님 앵무새가 대답하기를 “키스해주세요.” 하더랍니다. 그런데 목사님 앵무새가 하지 않던 소리를 한마디 더 하더랍니다. “

오! 주께서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목사님 앵무새는 말만 배웠지 멍에를 메우는 훈련이 안된 것입니다. 예수 당시 농경 풍습에 흔히 두 마리 소에 같은 멍에를 메우고 쟁기를 끌게 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그 소들에게 멍에를 메우기 전에 먼저 두 소를 싸움 붙였습니다. 그래서 싸움에서 이긴 소를 인도자로 두고 진 소가 함께 보조를 맞추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인생의 참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할 때만 비로소 예수의 멍에를 멜 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의 인도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순복할 때만 우리가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지워주는 무거운 질고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방법은 예수께서 지워주시는 십자가 사랑의 멍에입니다. 이 사랑의 멍에를 메고 온유한 자가 되어 마음에 안식과 참 평안을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세 번째 내용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용납하는 것”입니다.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마을 뒷편 높은 산에는 많은 금이 묻혀 있는데 몇 사람이 채광하려고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커서 돈을 벌면 꼭 고향에 돌아와서, 그 광산을 다시 개발하여 일확천금을 한 후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자라고 꿈도 자랐습니다. 성인이 되어 어느 정도 돈을 모으자, 그는 그 버려진 산에 찾아와 광맥을 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오래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예전에 사용하던 갱도는 이미 다 무너져서 땅 속에 묻혔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파고 또 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아무 진전없이 시간만 흐르게 되었습니다. 동업하던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고, 금광 개발을 위하여 모았던 돈도 다 바닥나버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고 마지막까지 남은 광부 몇 사람과 함께 이제는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힘없이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신도 이제는 지쳐서 그 일을 포기하려고 마음먹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갑자기 굴속에서 커다란 고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기 무엇이 있다!”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 보았더니 곡괭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손잡이 자루는 거의 썩어 없어지고 쇳덩어리만 꽂혀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빼보려고 해도 도저히 빠지지가않아서 여러 사람이 매달려서 힘껏 뺏더니, 곡괭이 날 끝에 뭔가 노란 것이 묻어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이었는데 흔히 말하는 노다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금이 특수한 지층의 작용으로 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그 금광을 개발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이 땅을 계속 파다 지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내려찍었는데, 아무리 곡괭이를 빼려고 해도 빠지지 않으니까 그것을 땅에다 박아둔 채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끝까지 곡괭이질을 하지 않으므로 금맥을 놓치고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요13:1)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되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좋은 것만 아니라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들까지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용납이라는 단어는 그릇에 물건을 담을 때에 담기에 넉넉하다는 뜻인데, 그 그릇이 크면 많이 담을 수 있는 것 같이 우리 마음이 넓고 크면 어떤 형제의 허물과 실수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 대해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여 용서하고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며 배신하고 사명을 뒤로 한 채 갈릴리로 돌아간 베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신 것처럼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네 번째 내용은 “하나가 되라.” 것입니다.

크리스천 작가였던 ‘마크 퇴니’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와는 달리 잘 지내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다음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장로교인과 침례교인과 감리교인을 한 우리 안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이는 서로 하나 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풍자하는 글입니다. 교파는 달라도 예수 믿는 성도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느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이 교회 집사인 아내더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 믿어도 당신처럼 그렇게 울고 불면서 박수치며 요란하게 믿지 않을 거야.” ‘나는 믿어도 점잖케 이성적으로, 절제하면서 믿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도 있고 저런 신앙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입니다. 남자 신앙 따로 여자 신앙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많이 배운 신앙, 못 배운 사람 신앙 따로 있지 않습니다. 20대, 30대 신앙 따로 있고 노인 신앙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집사 신앙, 목사 신앙 따로 따로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하나 되어야 할 이유가 오늘 본문 4절 이하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주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성령도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 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한 소망과 한 믿음과 한 세례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성도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하는데 이는 “숨”(호흡)을 뜻합니다. 교회와 성도의 몸에 생명을 주는 숨은 바로 예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숨을 쉬지 않는 몸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숨과 같은 성령이 활동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교회란 사실상 성령이 떠난 것이어서 죽은 교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교회의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여러 직분들은 교회를 가정공동체로 세워 하나가 되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머리가 되려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직접 지목해 가며 경계한 인물이 있습니다.

요한3서 9절에 나오는 “디오드레베”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 요한은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인데도 자기가 “으뜸 되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어 경계하라고 일러두는 것입니다. 가정공동체로서 성도는 어떠한 직분과 은사를 받았다 해도 그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는 것과 그 자신은 지체에 불과함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성숙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지 못하고, 성도들인 각 뼈와 살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 여러분,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해 모든 겸손과 온유함,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가정공동체로서 우리 평강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동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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