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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 세계관 (창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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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세계관이라함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의미합니다. 여기 손전등이 있습니다. 이 소전등의 빛을 셀로판 종이를 통과시켜서 OHP막에 투사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 세계관이겠는지요. 바로 이 셀로판 종이가 세계관입니다. 이 세계는 이 손전등이라고 할 수 있고요. 우리 모두는 이 셀로판 종이 같은 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관 입니다. 이 셀로판 종이는 빨간색,파란색,녹색,노란색,투명색이 있습니다. 이 셀로판 종이를 통과한 빛은 그 모양 그대로 입니다. 그러나 색깔이 입혀 있죠. 어떤 세계관을 통과해도 이 세계는 그대로 투영됩니다. 모든 세계관에 비친 세계는 다 같은 모양과 색깔까지 갖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 있습니다. 근본 바탄색이 틀리죠. 그래서 빨간색을 내고자 할 때는 바탕색이 틀리기 떄문에 서로 다른 처방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세계를 살면서도 사람마다 다 대응방식이 다름 것입니다.

세계관의 종류

세계관은 크게 신론,무신론,불가지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론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이 있다는 것이고 무신론은 신이 없다는 세계관이며 불가지론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세계관입니다. 신론은 또 일신론과 다신론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일신론에는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이고 또 이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이슬람은 우리가 사용하는 구약성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신론이죠. 이슬람은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예수도 위대한 선지자인데 마호멧이 마지막 선지자로 제일 위대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실제로 일신론은 성경을 사용하는 종교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신론에는 대표적인 것이 불교가 있습니다. 불교는 석가만이 부처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모든 만물안에서 신성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범신론의 범주로 넣는데 다신론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죠. 무신론에는 낭만주의와 허무주의 그리고 자연주의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는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신은 없지만 인간이 더욱 발전할 수 있고 특히나 도덕적으로도 더 발전할 수 있어서 교육만 시키고 과학만 발전시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입니다. 그리고 허무주의는 인간의 삶을 보니 모두가 죽기에 그리고 평생을 투자하여 무엇을 이루어도 허무하게 끝나는 것을 보면서 삶을 허무로 귀결시키는 세계관입니다. 있는 삶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이러한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갑니다. 삶을 조금 더 진지하게 살고자 했던 많은 위대한 사상가와 문학가들이 이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수없이 자살은 계속 되고 있죠. 자연주의는 일부 몰지각한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자연주의는 진화론에 그 뿌리를 두고 발전한 것으로서 인간은 단지 물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단지 물질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영생한다는 것은 이름이 남는 것으로서 이 땅에 살 때 훌륭한 업적을 남겨서 이름이 남기도록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불가지론은 대표적인 것으로 실존주의와 유교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극복한 사상으로 인정을 받는데 이 땅에서 허무하게 살 것이 아니라 하여튼 우리가 살고 있기에 그 살고 있는 것에 의미를 두어서 열심히 살자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단지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유교는 본래 공자가 그 당시의 유행하던 미신들을 타파하고 학문을 강조하면서 시작된 것으로서 학문이 강조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효 사상과 그리고 선조들의 학문을 중시하면서 선조들을 중시하는 사람시 발전되게 되었고 이것이 조상신을 모시는 것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어서 오히려 공자가 반대하던 것을 지금 따라하는 꼴이 되버렸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처음에 사후의세계에 대해 질문을 받고 내가 죽지 않아봤는데 어찌 알겠느냐고 대답하면서 이 불가지론을 주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가적 세계관

실제로는 세계관이 아니면서 세계관 노릇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엉터리 세계관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첫째는 개똥철학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위에 기술한 세계관을 익힐 만큼 삶에 대해서 진지하지도 않고 또 지식 수준도 그에 못미치는 대중들은 자기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방식이요 삶을 보는 방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개똥철학입니다. 이 개똥철학은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술이 한 잔 거하게 들어가면 이 개똥철학을 늘어 놓습니다. 그리고 조금 성공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개똥철학을 진리처럼 생각하면서 "거봐 너도 빨리 집을 사 그러면 만사가 해결되". 또는 "무조건 땅을 사" 또는 "무조건 배우고 봐야돼" "돈이 최고아"라고 주장합니다.그러나 왜 개똥철학이라고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개똥이라함은 개똥만큼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한사람에게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개똥도 쓸데가 있으니)그것도 한시적이요 그 사람과 모든 사람을 망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성공한 사람도 일시적 성공이요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다가 끝납니다. 자기 자신 혼자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사는데 실제로 들여다 보면 모순투성이 입니다. 진짜 인생을 고귀하게 살지 못하고 일관성도 없고 합리성도 없이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수많은 모순을 안은채 살아갑니다.

또한 왔다갔다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 세계관은 일면 개똥철학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세계관은 더욱 주관도 없어서 사는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평생 남의 말에 왔다갔다하면서 삽니다. 도무지 주관이라는 것이 없죠. 그래서 결국은 한 평생을 살아도 누가 살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주위 사람의 말이 내 안에서 산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으나 우리는 최소한 이러한 삶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객관적 세계관

한 때 지식인들은 이 객관적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특히 과학자들이 그러했죠. 과학은 객관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객관적 세계관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습니다. 이것이 19세기 과학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과학철학은 바뀌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보니 과학이 객관의 학문이기 보다는 더욱 주관의 학문이 되버리는 현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거시세계를 다룰 때는 무엇인가 될 것 같았으나 미시세계로 들어갈 수록 과학이 과학소설화 되어 버린 것이죠. 그러면서 과학은 과학의 한계를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대부분 21세기에 살면서도 19세기 과학철학의 수준에서 알고 있는 놀라운 현상을 봅니다. 19세시 과학철학에서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비과학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 과학철학에서는 비과학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과학으로 볼 때 틀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과학으로 틀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까? 아닙니다. 과학으로는 절대 틀렸다고 실험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성령도 예수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실험을 하여 틀려야 비과학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21세기 과학철학에서는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이상 그것을 비과학적이다는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과학으로는 진의를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의 영역 밖의 것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 영역 밖의것을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실재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 모든  이 비과학적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인간도 우주의 질서도 비과학적입니까? 아직 우리는 태양계 밖을 본적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비과학적이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비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과학으로 믿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놓아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계관의 문제는 과학이 훈수를 둘 수는 있으나(과학은 그들이 따질 수 있는 객관의 문제로 최소한 어떤 종교와 세계관이 그 자체로 문제점을 가지고 있고 비논리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읍니다.예를 들어 사이비 종교들은 그 안에 모순들을 가지고 있죠) 최종 해결을 보지 못하고 결국 믿음의 문제인 것이죠.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을 가장 단순히 이야기 한다면 다음 영어 단어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FORM(창조) - DEFORM(타락) - REFORM(회복). 이 세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지? 나는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입니다. 아주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이 만물을 그리고 당신과 나를 분명한 아름다운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만드신 분과 이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존재하는 것이고 질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좋으신 하나님이 아름답게 만드셨다고 이야기 하는데 왜 우리는 이토록 고통이 많은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이 땅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FORM을 De(down)시킨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이 이글어진 것입니다. 우주 추한 모습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는 딴판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FORM을 Re(again)시켜야 하는 것이죠.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모습을 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꾸어 가야하고 이 세상을 또한 믿음으로 아름답게 바꾸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모습과 또한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곧 믿음)가 회복되면 그로인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기에 이 믿음을 가꾸어 가야 하는 것이죠.

세계관의 중요성

일례로 사람을 각 세계관이 어떻게 보는 지 살펴보죠. 불교에서는 사람이 소중합니다. 그 안에 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사람이 이 땅에서 죄를 계속 저지른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수 이습니다. 그래야 다시 태어나서 다시 기회를 갖죠. 그리고 허무주의에서는 사람은 별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낳습니다. 자연주의에서는 사람은 단지 물질에 불가하므로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사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로 소중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한 번 사는 것이기에 이 땅의 한 번의 기회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삶은 아주 중요한 것이죠. 이처럼 세계관은 이 땅에 모든 것에 대해 대답을 해주는 것입니다. 생각의 근거입니다. 이 근거를 제시해 줄 때 그 사람의 일생이 근거가 있고 합리적인 삶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똑같은 사람을 대하면서도 그 처방이 다 다른 것처럼 세계관은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관은 이 땅에 일반적인 가치에서 개인의 가치를 정하는 것입니다. 돼지 우리속에 보석이 있을 때 돼지들은 그 보석의 가치를 전혀 무가치하게 여길 것입니다. 헨드폰을 던져 줘 보십시요. 그래도 전혀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먹을 것을 좋아하죠. 그것도 싸구려로. 이 세상에는 가치있는 일과 가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세계관이 바른 사람만이 가치있는 일을 할 것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치 없는 일을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를 따지는 지짜 절대가치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만드신 그분의 가치가 절대가치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일을 하더라도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하여 할 때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가치가 있어지는 것이죠.

세상에는 진리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이 진리임을 압니다.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가 진리임을 처음에는 믿음으로 그리고 나가서는 삶 자체로 느낄수 있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관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 이 진리의 세계관을 가지고 바르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피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재적으로 우리의 모든 삶에서 이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환하고 가치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장석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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