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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냉정과 열정사이 (요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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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기던 사람이 어느 순간 냉정하게 돌아서 있는 모습을 볼 때, 어떤 감정을 느끼십니까? 한 때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기다가 냉정하게 식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는 어떤 심정이 되십니까? 어쩌면 우리의 신앙 실존이 냉정과 열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도 열정 속에 있을 때는 냉정한 사람들을 비판하다가, 냉정 속에 있을 때는 다시 한 번 뜨거워지기를 슬픈 마음으로 갈망하곤 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열정을 잃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 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9절부터 보겠습니다.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리고 있는 동안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왔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보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함이었습니다. 한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월절에 25만 6천 5백 마리의 양을 잡았다고 합니다. 한 가족 당 한 마리씩 제물로 드렸기 때문에 약 270만 이상 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비록 그 수치에는 오차가 있다 하더라도, 19절에서 ‘온 세상’이라고 표현할 만큼 엄청난 무리가 모였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이들 사이에 죽어서 냄새나는 자를 살리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불과 오리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예수님과 그 분이 행하신 놀라운 이적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대제사장들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말을 듣고 대대적으로 환영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여” ‘호산나’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승리와 번영을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한 구원자임을 확신하고 목소리 높여 찬송했습니다. 아마 종합운동장에 모여서 벌인 어떤 현대적 종교집회도 이만큼 뜨겁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들의 태도가 돌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얼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폭도로 변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실망하고 흩어지는 방관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한 순간 불같이 타올랐으나 너무나 쉽게 꺼져버렸습니다. 왜 그들은 열정적으로 타올랐다가 냉정하게 식어버리는 신앙인이 되었을까요?

오늘날에도 그 때 못지않게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끔 찬양 집회에 참석해보면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향한 뜨거움을 봅니다.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빠진 그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대형 스크린에 투사된 영상을 보면서, 수많은 무리들이 함께 찬양을 부르는 모습은, 대형 스피크들의 웅장한 떨림과 함께 가슴 벅찬 감동을 줍니다.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열망이 타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나고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금방 불신자와 다름없는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불같이 타올랐던 신앙의 열정이 너무나 쉽게 사그라지고 맙니다. 왜 그들은 열정적으로 타올랐다가 냉정하게 식어버리는 신앙인이 되었을까요?

열정과 냉정 사이를 오르내리는 신앙생활을 반복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환호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냉철하게 아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냉철하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열정은 잘못 되기 쉽고 또한 쉽게 냉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 곧, 정치적인 왕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환호했습니다.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자도 살리신 예수님께서 그 크신 권능으로 로마를 타도하고 민족 독립을 이루어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700년 이상 지속 된 강대국의 지긋지긋한 압박이 끝날 것을 기대하니 가슴이 벅찼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이 통치하시면, 배고프던 시절이 끝나고 미래가 무지갯빛으로 펼쳐질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기대가 무너지면서 동시에 그들의 신앙도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냉철하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생각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가 어떤 분인지 깊이 숙고하지 않았습니다. 시대풍조를 좇아 나름대로 예수님은 이런 분일 것이라며 헛된 기대를 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속았고 결국 예수님을 향한 열정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열정을 쏟아 붓다가 갑자기 냉정하게 돌아서버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나름대로의 기대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라’는 전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믿으면 잘 먹고 잘 사는 동양적 관점의 오복을 받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만사형통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나 사업에서 성공하고, 목표하는 일도 성취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삶에 있어서 고난과 고통은 모두 사라지고,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만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꿈꿀 수 없었던 생활의 풍요와 안정을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평안과 만족을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내가 원하는 소원들을 간구하기만 하면 모두 채워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대하는 동안에는 열정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그 헛된 기대들이 무너짐에 따라 열정적이던 신앙은 급속히 냉각됩니다. 기대의 무너짐이 반복되면서 냉각된 믿음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에 의심과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드러내어 하나님께 원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관자적인 자세로 신앙생활을 유지하다가 조용히 신앙을 등져버립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정치 경제적 메시아로 기대했던 유대인들이나, 예수님을 통해 삶의 여건 개선과 풍요를 기대하는 현대인들의 신앙은 동일합니다. 나름대로의 기대가 무너질 때 그들의 열정은 유지되기 힘듭니다.

어떤 분이 교회에서 드리는 새벽 기도의 내용을 녹음해 보니 불교 신자들이 불공드릴 때 비는 소원과 거의 내용이 비슷하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내용에 있어서도 구별되지 않고 있다는 슬픈 소식입니다. 신자들의 사고방식이 그러하다면 헌금도, 복 받기 위해 정성을 드리는 표현으로서 일종의 복채가 된 것이 아닐까하는 우려도 해봅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수많은 순교자들만 생각해봐도, 예수님을 믿을 때 오는 삶의 풍요나 마음의 안식이나 즐거움이라는 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복채를 받고 복을 내려주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열정과 정성에 감동하여 만사가 형통하도록 이끌어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에 사는 많은 성도들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메시아 예수님을 냉철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성경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나름대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기대합니다. 그래서 숫자는 많아도 교회는 점점 사회에 영향력이 없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4,15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예수님은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적인 메시야나 경제 대통령으로 오셨다면 방탄마차를 타고 무장 경호를 받으며 입성했을 것입니다. 멋있고 화려하게, 웅장하고 거창하게 입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발이 땅에 끌리는 나귀 새끼를 타고 초라하게 입성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경의 예언대로 구원을 베푸실 영적인 왕으로 오셨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는 예수님께서 어떤 왕이신지 예언되어 있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베풀기 위해 오신 구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은 생활환경 개선과 경제적인 안정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헤롯 궁으로 쳐들어가지 않으시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온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대속(代贖)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 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양심의 무거운 죄의식이 사라지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멸망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말하기보다 ‘예수 믿는 복 받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오해를 줄이고 보다 바르게 전도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사회적인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생기지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손해와 아픔과 모욕들이, 또한 우리 속에 기쁨과 평화를 깨뜨리며 역사하는 죄와의 지속적인 싸움이 우리가 하나님 자녀 되었음을 분명하게 보증해주는 복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현세적인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입성하셨고,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 때에야 내 마음의 소원과 기대가 무너질 지라도 주님께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16절을 보면 제자들도 당시에는 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구원의 왕으로 오신 의미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기대하고 있었을 때는 모두 배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년간의 열정이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부활이후 예수님이 구원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영접한 후에는 일생동안 열정적으로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생활의 궁핍과 환난과 모진 핍박 속에서 살았으며, 결국 순교를 당했습니다. 오늘날의 현세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복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속적으로 열정적인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시면서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위엄과 권위로 호령하면서 백마를 타고 오셨다면 아무도 감히 그 크신 권능을 가진 주님께 나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면서도 발이 끌리는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친근하게 주님을 모실 수 있고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돈 벌레같이 살던 세리 레위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축제의 마지막 날에 정욕을 즐기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주님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자도 주님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한 손 마른 자나 소경 거지도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온갖 병든 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고 주님을 찾았고, 은혜를 덧입을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은 어떤 더럽고 냄새나는 죄인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영접해 주셨습니다. 성육신에서부터 십자가의 수치까지 예수님을 일생 겸손하게 죄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반항적이던 우리도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나의 왕’으로 임하여 계십니다. 사람들은 권세를 가지면 권위적이 되어 군림하고 착취합니다. 약점과 허물을 보이면 용서하지 않고, 변명하거나 대적하면 응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늘 배반하고 대적하는 죄인들을 변함없는 겸손으로 섬겨주십니다. 죄에 빠져 헤매다가 냉정해져서 돌아와도 여전히 사랑으로 영접해 주시며, 죄책과 죄의식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겸손하신 구원의 왕을 변함없이 신뢰할 때 우리는 다시 열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나귀새끼를 타시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최 동 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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