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찬] 예수님의 살과 피 (요 6:48-58)

  • 잡초 잡초
  • 591
  • 0

첨부 1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 사이엔 천지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만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비로소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그 말씀을 듣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매우 난감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여명에 이르는 군중을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의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를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오죠. 인민군 장교가 동막골의 나이 드신 리더에게 참 신기하다는 듯이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소리한번 안 지르고 사람들을 이렇게 잘 다스립네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어르신은 뭐라고 말합니까? '뭐, 마이 메겨야지!' 예나 지금이나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지도자를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그런 왕이 되어주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살이나 먹고 피나 마시라는 둥 영 끔직한 소리를 계속 합니다. 자기들보고 식인종이나 흡혈귀가 되라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다시는 예수님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의 의미를 아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 됨의 시금석입니다. 그 의미를 알 때 성만찬은 비로소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식탁이 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의미를 마음으로부터 깨달아서 뜻깊은 성만찬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35)은 바로 자신의 살이라고 밝히십니다(51). 이어서 자신의 살을 먹을 뿐 아니라 자신의 피를 마시라고 말씀합니다(54-56). 그러다 다시 피를 제외하고 자신을 빵으로만 묘사하면서 자신을 먹으라고 말씀합니다(57-58). 예수님은 여기서 살과 피를 구체적으로 구분해서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살과 피는 예수님 자신과 자신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께로 와서 그 분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29, 35-37, 40, 44-45, 47, 64-65). 그렇게 예수님을 진실로 믿을 때 생명을 얻고 영생을 누리며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우선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을 빵으로 준다는 의미부터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주신다는 뜻입니다. 빵은 자신을 전혀 주장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먹는 사람 마음입니다. 결국 빵은 없어지고 빵을 먹은 사람은 배부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살을 빵으로 남김없이 우리를 위해 드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 사라지는 대신 그를 받아들인 우리들로 배부르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살을 빵으로 주신 첫 행위는 육신 즉 살이 되신 사건입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육신'과 '살'은 같은 단어 sarx를 달리 번역한 것입니다. 육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면서도 참으로 불편한 일입니다. 한끼만 굶어도 힘이 듭니다. 쉽게 피곤해집니다. 육신은 갖가지 유혹에 열려있고 쉽게 무너집니다. 하지만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 예수님이 기꺼이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열심히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자녀들을 위로하고 감동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무거운 부담이 되고 상처가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그의 옷을 입고 그의 입장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심성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불편한 인간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그것도 말구유에 태어나심으로 가장 천한 옷을 입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12살 때 있었던 일 외에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30년 동안의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특기할 것 없는 평범한 삶을 살으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30년 동안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시면서 인간의 삶을 온 몸으로 체험하셨습니다. 공생애를 막 시작하시는 순간엔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고 빵,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 세상의 영광을 가득 안고 찾아 온 마귀와 정면으로 마주치십니다. 유혹의 힘을 온 몸으로 느끼시면서 이겨내십니다. 우리를 마귀의 달콤한 유혹으로부터 건져내시기 위함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살이 되심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빵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3년 내내 지근거리에서 따라다녔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간략하게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0: 38).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배신과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배신당해 죽을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십니다. 요한은 그 아름다웠던 순간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 예수님은 빵을 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선언하십니다. 비록 살이란 단어대신 몸(swma)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만 근본적인 뜻은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빵으로 주신다는 것이죠.

그 자리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께 충성경쟁을 벌렸습니다. 예수님이 기어이 고난의 길을 가신다면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들의 고백을 지켜낼 수 없는 것을 내다 보셨습니다. 극한적인 고독이 예수님께 사무쳐 왔습니다. 예수님은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시기 위하여 기도하러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동산에 다다르자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조금 더 나아가십니다. 베드로의 눈에는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이 들어 왔습니다. 이 모습을 후에 마가에게 전해주었겠죠. 마가는 그 순간을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는 매우 놀라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막 14:33). 그렇게 괴로웠던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십니다. '내 마음이 너무 슬퍼 죽을 지경이구나'.

예수님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기도로 하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막 14:35-36a). 분명 예수님은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막 14:36b). 기도를 통해 쏟아 놓았던 슬픔과 고통을 다시 거두어들여 삼키십니다. 고난의 잔을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하십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종교와 정치 당국자들은 그의 유죄를 입증하지 못했지만 채찍질을 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합니다. 로마 군병들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힙니다.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고 꿇어 절합니다. 십자가에 사정없이 못 박습니다. 무력하게 못 박힌 예수님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조롱합니다. 지나가던 행인,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심지어는 옆에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 마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막 15:31b-32a).

그들의 조롱 속에 역설적으로 사랑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남을 구원하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핵심입니다. 세상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사람에게 아낌없는 환호와 갈채를 보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꾸로 가장 낮고 무력한 자리까지 내려가십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죠. 마침내 예수님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절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막 15:34b) 하나님만 버리시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겪은 모든 고통은 감내할 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마저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아름다운 삶을 살으셨습니까? 예수님을 버릴 이유가 전혀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버리십니까? 우리를 버리실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려고 하나님은 대신 예수님을 버리십니다.

예수님은 절규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고통까지도 온 몸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 제야 비로소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요 19:30). 그리고 평안한 마음으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고 고백하십니다(눅 23:46).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통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깊은 성취감과 평안을 누리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우리를 위한 빵으로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살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먹지 못해 지금 말라 비틀어져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께 나아가 그 사랑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오늘 성만찬을 베풀어주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실패한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방황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바로 그 호숫가에서 떡과 생선을 숯불에 구워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 베드로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그대로 주님께 헤엄쳐 갑시다. 예수님이 주시는 빵을 받아먹으면서 주님의 사랑을 받아먹읍시다. 하여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를 다시 한번 회복하고 생명의 풍성함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살을 빵으로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전체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피를 참된 음료로 주신다는 것은 그 사랑의 내용을 좀더 세부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죠. 살이 채찍에 찢기고 못과 창에 찔리면서 피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왜 예수님이 꼭 피를 흘리셔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함입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듯 그냥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고 말씀으로 선언하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하나님은 꼭 피를 봐야만 하는 잔인한 분이신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심판해야 하는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죄에 대한 심판이 공의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그냥 인심 좋게 어느 날 '죄를 용서한다'고 인류를 향하여 선언할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짐승의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죄는 피흘림 즉 죽음을 요구할 만큼 심각한 것이며 하나님은 그렇게 공의로운 분이심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가 인간의 죄를 온전히 사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죽는 것은 짐승이었기 때문에 그 제사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을 뿐이요 장차 드리게 될 온전한 제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예수님을 참 인간으로 보내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온전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죄를 질 수도 있는 인간이셨기 때문에 죄인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시고 그들을 대신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으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위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는 심판이 아니었더라면 예수님은 여타 영웅처럼 좀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이순신의 죽음과 다른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도 다른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혹은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 것과도 다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무엇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림의 죽으심은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시고 하나님 앞에 홀로 나아가 그에게 버림받는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은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어 가시면서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그럼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선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우기는 한 예수님의 피는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교묘하게 죄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을 고안해냅니다. 성경엔 그런 인물들이 널려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자기가 요셉을 유혹해놓곤 오히려 요셉을 성폭행미수죄로 몰아 감옥에 처넣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곤 그 죄를 숨기려다 그의 남편이자 충성스러운 장군인 우리아를 전쟁터 최전방에 배치시켜 전사당하게 함으로 간접 살인합니다. 사울은 자기 죄를 숨기기 위해 유대교를 이용합니다. 율법의 내용과 목적을 왜곡시켜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 예수님과 교회를 핍박하여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현대에 이르면 이 점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은 프로이트일 것입니다. 그는 죄를 심리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해서 일종의 신경증세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인류의 공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규범을 제외하고 마음대로 살라고 권합니다. 오늘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죄로부터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죄는 삶의 처절한 현실이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와 끈질기게 괴롭힙니다. 가장 뚜렷한 증거는 본능대로 아무리 열정적으로 살아도 진정한 행복은 없다는 것입니다. 쾌락 후에 찾아드는 허무와 허탈 그리고 고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이 죄인의 목마름입니다.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근원적인 목마름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죄를 해결하여 그 타는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죄인 됨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피흘림의 용서를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고 그의 음성을 들어야 가능해집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를 강렬한 빛으로 둘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호소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는 찬란한 빛에 둘러 쌓여 주님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 비로소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깊이 경험합니다. 그것처럼 행복한 경험이 없습니다. 바울은 인생과 사역의 경륜이 깊어질수록 더 자신의 죄를 더 깊이 깨달았고 그만큼 죄사함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눈물로 고백하고 주님으로부터 '너의 죄를 내가 용서했다'는 음성을 듣는 것처럼 달콤한 행복이 없습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타 들어오던 목마름이 시원하게 해소됩니다. 오늘 주님은 그 시원함을 다시 경험할 수 있도록 잔을 베풀어주십니다. 이 잔은 물질적으론 한 모금의 포도 주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우리의 목마름을 호소하고 주님의 피흘림을 통한 죄사함의 은혜를 받아드리는 마음으로 이 잔을 마신다면 이 잔은 여러분에게 놀라운 축복을 선사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죄가 다시 한번 씻겨나가는 시원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주님의 잔을 마시면서 그 은혜를 새롭게 체험할 수 있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박 득훈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