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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에봇을 입고 (삼상 1:18-26, 딤후 1:3-5, 눅 2:5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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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3가지 요소를 말할 때 "의(衣), 식(食), 주(住)"를 듭니다. 그런데 순서로 봐서 왜 의(衣) 즉 옷이 맨 앞에 나오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급하기로 말하면 옷보다 먹는 것일 텐데, 그래도 옷이 맨 앞에 나온 것을 보면 여기에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동물 가운데 옷을 입고 사는 것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먹는 것이나 집은 다른 동물들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옷을 만들어 입고 사는 것은 인간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태어나서 맨 처음에 옷을 입게 된 것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난 후였습니다. 그들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나무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수치를 알고 가리기 원했다는 여기에 인간 됨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성인도 "수오지심은 의지단(羞惡之心 義之端)"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옷을 입는 이유중의 하나가 자기를 위장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 "허장성세(虛張聲勢)"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실이 없는 사람일수록 겉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력서를 써도 미주알 고주알 써는데 동기회 회장도 아니고 말도 안 되는 반창회 회장 한 것까지 다 기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무화과 잎으로 만든 옷이 감추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만들어 입히신 가죽옷은 없애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즉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양의 피를 흘리고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그 옷을 "의의 세마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의롭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서야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 말씀을 보면 18절에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또 19절에는 그 어머니가 해마다 "작은 옷을 지어 그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 사무엘에게 새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즉 그가 입게된 옷이 그의 신분이 달라진 것을 말해줍니다. 아직 어리지만 지금 사무엘은 제사장으로 견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 입는 옷이 그가 어떤 사람인가 즉 그의 정체성을 증거해 줍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설 때 특별한 옷 즉 예복을 입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목사들은 예배 때나 이렇게 가운을 입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평상복을 입고 생활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승려들이나 카톨릭의 신부나 수녀들은 항상 성직자 복장을 하고 생활합니다. 어쨌거나 이 특별한 복장이 그 신분이나 역할이 독특한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말에서 "예배"라고 할 때 "예도 예(禮)"자를 보면 "옷의(衣)"자와 "풍성할 풍(豊)"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글자대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려고 하면 우선 옷을 넉넉하게 입어야 한다, 옷을 바르게 입어야 한다, 그런 뜻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성직자들이 그 독특한 성직자 옷을 입고 직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여기에는 정말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롬13:14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하는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갈3:2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로 옷 입었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할 수 있게 된 것도 순전히 우리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입니다. 한문에 "예(禮)"자가 "옷 의(衣)"자와 "풍성할 풍(豊)"자로 구성된 성경적인 의의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정말 제대로 옷을 입고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에봇을 입고서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한 것은 오늘 모든 성도들도 이 에봇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2.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아주 밝은 면과 아주 어두운 면, 두 가지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하여 얻은 한나의 아들 사무엘과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아들들의 모습입니다.

사무엘의 성장 과정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 몇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1) 18절에 "에봇을 입고서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미 그 어머니의 기도로 얻은 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요람에서부터 아들을 안고 기도하였고 또 품안에서부터 하나님 중심의 신앙교육을 시켰습니다. 마치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처럼 어릴 적부터 사랑하는 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여기 사무엘이 "에봇을 입었다"고 할 때 어리지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불편함도 감수한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에봇이라는 예복이 입고 마구 뛰어 놀거나 행동할 수 있는 옷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훈련을 말합니다.
재작년엔가 서울에 있는 손녀에게 아가페에서 나온 쉬운 성경을 선물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일단 학교에서 돌아오면 30분 동안 성경 읽는 일부터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신구약 성경을 7번이나 통독했다고 합니다. 부모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는 일을 과외나 다른 교육에 쏟는 것 이상의 노력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2) 또 여기 중요한 말은 "여호와 앞에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단지 형식이 아니라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서 유혹했을 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요"라고 했습니다. 그가 유혹도, 고난도 다 이기고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 백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십니까? 여러분의 인간 관계가, 여러분의 직업 생활이, 여러분이 교회에서 하는 모든 언행심사와 섬김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하십니까?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본 훼퍼가 소위 세속화 신학을 주창한 사람인데 그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라고 한 것은 형식적인 신앙을 탈피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 섬겨야 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 세속사회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이것이 여러분의 산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3) 26절에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했습니다. 눅2:52에 우리 주님께서 자란 모습과 너무나도 방불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어른들이야 더 이상 키가 자랄 일이야 없겠지만 우리 신앙 연륜은 세월이 흐르는 것만큼 자랍니다. 10년을 믿었으면 10년만큼 자랐습니다. 20년을 믿었으면 20년만큼 자랐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러분은 몇 년짜리 신앙인 인가 한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단지 그 연수만 계산할 것이 아닙니다. 나의 키가 자란 것만큼 내 신앙도 자랐느냐 하는 것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우리 신앙은 우리 연륜만큼 자라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의 지진아(遲進兒)입니다. 영적인 기형아들이 되어 있습니다. 베델 성서 교재를 만드신 분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교재를 개발하여 성인신앙교육을 시작했습니다. 대체로 어른들의 신앙이 교회학교 아동부 졸업과 함께 성장이 정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신앙도 점점 자라야 합니다.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도록 키와 함께 지혜도 자라야 합니다. 여기 지혜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사람들이 보기에도 여러분의 키만큼 여러분의 신앙도 자랐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의 진보된 모습을 보여 주라"고 했습니다. 말씀생활에, 기도생활에, 봉사생활에, 전도생활에 점점 자라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이런 사무엘과 대조적으로 엘리의 아들들은 어떠했습니까?

(1) 12절에 보면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안다"고 하는 단어는 단지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어 함께 생활할 때 "안다"고 합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을 하고, 그녀를 아내로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다"고 할 때 원어로는 이것을 "알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습니다"고 한 것은 그들이 도무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사장의 아들로, 성전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면서도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다" 이래서 하나님은 이런 불신앙적인 제사장 가정에 대하여 심판을 계획하셨습니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이런 그들이 행실이 나빴는데, 먼저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하는 제물을 이 아들들이 먼저 빼앗다시피 가로챘습니다. 성물을 착취했습니다. 우리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 먼저"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아들들은 "자기 먼저"였습니다. 이들 안중에는 하나님도 없었고 다른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습니다. 신앙이나 교회, 또는 하나님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요새말로 하면 종교 부로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얼마나 어렵게 하는지 모릅니다. 자기 이권을 위해서는 교회야 어떻게 되든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못된 아들들을 "죽이기로 뜻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3) 22절에 와서 그 아들들의 타락은 극에 달합니다. "회막 문에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다"고 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음란이 판을 치게 됩니다. 당시 이방 종교가 그랬습니다. 오늘 이 땅의 사이비 이단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오염의 물결이 교회가 타락할 때 교회의 담을 넘어 들어오게 됩니다. 특히 오늘같이 온 사회가 음란의 홍수 속에서 허덕이는 현실에서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야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이성교제나 교인들의 결혼과 성생활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고도의 윤리성을 유지해야합니다. 우리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4) 이런 자녀들에 대하여 아버지 엘리의 대응은 너무 미미했습니다. 비록 책망하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막지 않았습니다. 타락을 방관했습니다. 여러분 그 결과를 보십시오. 온 가족이 하루에 다 망했습니다. 그들이 끝내 돌이키지 않았으므로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십시오. 비록 세상이 어두워가고 종교가 타락하여 앞이 캄캄해 가는 때에도 하나님은 사무엘과 같은 새 사람을
키우고 계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새 시대를 위하여 새 사람을 여호와의 성전에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들어 쓰실 사람은 주의 백성들이요 그 교회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여러분 각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되시고, 우리 교회가 주님께 쓰임 받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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