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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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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 전교인 수련회 때 마지막 저녁에 세족식을 거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목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제 집사람은 여자목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그 목자들이 목원들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물론 상징적인 의식이었지만 그 작은 행동을 실천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조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작은 시간을 통해서 목회란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목회란 발을 씻어주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발은 우리 몸에서 발은 가장 냄새나는 곳이요 더러운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냄새와 더러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교회당을 새로짓는다면 교회당 입구에 꼭 한가지 만들어높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입니다. 이왕이면 황동으로 만들어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면서 그 주님의 모습을 본받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은 3년여 공생애 사역을 마치신 우리 주님의 목회의 마지막 자리인 발을 씻기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원수들에게 잡히시던 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 막 만찬을 잡수시고 그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사건은 주 님의 사랑과 정신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신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읍 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처음에는 무엇이든지 잘 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잘 하는 경우가 힘듭니다. 오히려 믿음의 사람들은 끝에 더욱 잘해야 합니다.저는 우리 교회가 처음에도 잘하지만 끝까지 잘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연초에는 열심히 하던 분들이 한해의 끝에 와보면 흐지부지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인관계를 하는데도 처음에는 잘하다가 중간에 틀어지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 훈련을 받다가도 중간에 변심을 하고 끝까지 마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끝이 아름다운 사람 끝이 더욱 빛나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마지막까지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발을 씻기시는 그때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1절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때가 이른즐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랑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고 합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끝까지”잘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처음에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금 봉사하다가 포기합니다. 조금 훈련하다가 낙오하기도 합니다. 조금 사랑하다가 포기합니다. 많은 경우에 끝이 좋지 않은 사람들 끝이 좋지 않은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는 삶이엇고 신앙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질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적인 사랑의 특징입니다.

사랑장으로 유명한 고전13:8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방언도 그치고,지식도 폐하리라."
진정한 사랑의 아름다운 특성중의 하나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떨어진다는 말의 원어는“시들어서 떨어진다',혹은 '무대에서 배우가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죽고,인간사는 변하고 환경은 소용돌이 치지만,주님의 사랑은 변치않고 영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모든 것은 시들어 버릴때가 오지만!)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님의 사랑을 붙잡고 이 사랑을 믿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세상에서 이 주님의 사랑을 본받고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은 내일이면,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입니다.죽음앞에 직면해 있는 예수님! 그는 마지막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에 제자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점검하시면서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깊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에게는 지금 제자들을 사랑할 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습니다.오히려 이 때에는 제자들이 주님을 위로하고 사랑으로 도움을 주어야할 입장입니다.
또한 제자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볼 때는 도저히 사랑할만 하지 못합니다.
특히 사랑하여 회계의 직분까지 맡긴 가롯유다는 이미 예수를 팔 작정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습니다.참으로 예수님이 죽는 순간까지 사랑받기에는 너무나 한심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사랑해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1.예수님은 끝까지 종이 되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4,5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수건을 가져다고 허리에 두르시고,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이스라엘은 사막지대인데,샌들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조금만 걷다보면 발이 먼지투성이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 집이든지 들어가기 전에는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은 마지막 만찬을 벌였지만 서로 발을 씻지 않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먹는 중에서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의 역할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스스로 종이 되어서 제자들의 가장 낮은 발을 씻으면서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몸으로 낮아지는 종이 되어서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종이 되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높아지는 자리에 오르기를 좋아합니다. 남에게 높임을 받고 섬김을 받고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자원하여 종이 되어 제자들을 발을 씻기면서 섬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자유하셨습니다.그런데 그 자유를 스스로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사랑의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종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servant입니다.
이 말의 동사형은 serve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섬기다‘입니다. 성경에서 이 말이 약 300회 나옵니다. 믿음이란 종이 되어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종이 되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섬기는 자유의 종이 되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간관계가 왜 망가집니까? 왜 사랑이 깨어집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왕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종노릇하지 않고 주인노릇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서로 왕대접받으려고 하면 가정이 깨어집니다. 교회에서 서로 왕대접받으려고 하면 교회가 깨어집니다.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우리이 인간관계가 사는 법은 오직 사랑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종이 되어서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성령의 사람만이 할 수 잇습니다. 우리의 육신으로는 우리의 욕심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까야. 나는 스스로 왕이되어서 대접받으면서 믿고 대접받으면서 사는 것이지 왜 그렇게 사는가? 그러시면 그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일이요 우리 주님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먼저 주님의 종으로서 ‘내가 주님처럼 이제 종으로 살겟습니다“ 라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그 선언과 고백을 받으시면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것처럼 우리 주님의 사람들도 행할 수 잇는 힘과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꾸 우리가 연습하고 훈련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왕의 근성인 뻣뻣하고 완고한 우리의 목을 꺽고 먼저 숙이십시오 먼저 낮아지십시오 먼저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낮아짐으로 섬기는 훈련을 자꾸 하셔야 합니다. 내가 섬기는 그곳에 생명이 회복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섬기는 그 곳에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 음식점에 가면 식사도우미들이 있습니다.
한정식같은 집에 가면 그 식사도우미들이 손님들을 맞이하여 섬깁니다. 그때 도우미들이 종처럼 잘 섬기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좀 불친절하고 딱딱한 분들을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손님으로서 친절하고 겸손하게 잘 섬기는 그 서비스를 받으면서 그 도우미되시는 분들을 무시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들을 고마워하게 되며 때로 팁까지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특히 외국을 여행하면서 정말 우리 나라가 경쟁력있는 한가지가 있는데 바로 비행기 스튜디어스분야입니다. 우리나라 비행기의 스튜디어스는 어떻습니까? 얼마나 겸손하고 친절하고 서비스가 좋은지 모릅니다. 값은 조금 비싸지만 질좋은 서비스를 받으니까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용하지 않습니까?그러니까 경쟁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경쟁력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종 서비스맨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여러번 먼저 믿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의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먼저 낮아지셔서 새가족들의 발을 씻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비젼있는 교회입니까?
사랑의 질적 가치가 높은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의 한결같은 모습은 사랑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끝까지 종으로 사랑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모든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것으로 보아서 가롯유다의 발도 주님이 씻기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아예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가롯유다의 발을 씻겼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면,가롯유다의 발을 먼저 씻겨 버리면 다른 제자들의 발은 더욱 쉽게 씻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자세로 사랑을 베풀면 모두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예수님은 마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주님께서 “원수까지 핍박하는 자까지 사랑하라”고 하셨고 직접 이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배신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다가 상처를 많이 받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서로 사랑하던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렇게 사랑을 주었는데 저 사람은 나의 기대만큼 사랑을 주지 않고 오히려 나를 배신할 때 그 상처가 굉장히 큽니다. 특히 가족중에서 받은 상처가 참 큽니다.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에게서 받은 상처가 큽니다.“거부당한 것”에 대한 상처는 너무도 우리의 마음에 쓴뿌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벽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시작되려면 “미움”가 없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유다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파는 제자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남편을 미워하지 않고,같은 구역원을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롯유다의 마음에 “사탄”이 역사하엿습니다.
2절 “마귀가 벌서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합니다. 마귀가 가롯유다를 이용한 것입니다.가롯유다도 마귀의 희생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기본자세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입니다.어떤 사람들은 가롯유다만 없어지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저 사람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가롯유다를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것처럼 인간이 사는 세계에 10분의 1보다 더 많은 확률로 어디에나 가롯유다가 있습니다.제일의 가롯유다가 없어지면 제2의 가롯유다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고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노력해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극복하게 되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롯유다가 여전히 자신의 사랑를 보여줌을 보고도 배반하고 등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알고도 속는 것입니다. 알고도 손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분별은 해야 합니다. 그러나 미워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또한 사랑한다고 맹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객관적으로 알아야 할것을 알고,잘 대처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던, 무섭고 끔찍한 초대교회의 상황 속에서 한 성도가 순교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욱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때리십시오.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나에게 아픔과 상처를 준 미움의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내 눈에 흙들어가기 전에는 그 인간 만큼은 용서할 수 없어“라고 하기도합니다. 먼저 우리가 이런 저주의 선언이나 고백을 함부로 결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 용서를 못할까요?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용서합니다. 내가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내가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용서받은 자들입니다. 이 경험이 분명히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1-35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에수님께서 형제를 몇 번 용서해야 하느냐 묻습니다.
이때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그러면서 어떤 빚진 자의 비유를 하십니다.

무려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사람이 있엇습니다.우리 돈으로 하면 한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이니까 수백억의 돈입니다. 그는 빚을 갚을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이 불상해서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일만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에게 100데나리온 우리 돈으로 하면 한 400만원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빚을 진 친구가 갚지 않자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자신은 수십억원의 돈을 탕감받고도 수백만원 빚진자를 옥에 가두어 버리는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도 화가 나지 않습니까? 일만달란트 빚을 탕감받고도 100데나리온의 친구를 용서하지 못한 이사람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오늘 여기 일만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수백억원의 돈을 주고도 사지 못하고 이런 돈보다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갚아야 할 모든 죄의 값을 갚아주고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배신자 가로유다뿐만 아니라 배신자인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받은 자라면 오늘 우리가 이제 그 사랑의 증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가 우리가 사랑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특히 마귀가 가장 많이 쓰는 방식이 바로 돈입니다. 얼마나 돈이 우리의 인간관계를 망가뜨리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부부도 돈 때문에 헤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관계가 돈 때문에 망가집니다. 사랑하는 주님과의 관계가 돈 때문에 망가집니다.

여러분 사탄은 돈에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을 이용합니다. 공격하여 사람보다도 돈을 앞에 세우고 결국 돈을 위해서 주님도 사람도 버리게 합니다.
요즘 우리 중에도 남의 빚보증 서주었다고 어려움을 당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미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억울하게 남의 빚을 내가 갚아주면서 그 억울함이란 정말 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갚아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을 심고 용서를 심고 사랑을 심은 곳에 우리 주님이 30배 60배 100배 이상으로 갚아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주님은 끝까지 인내가 있는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6절에 보시면,베드로가 질문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절에,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주님은 이 베드로에게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것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베드로는 왜 주님이 발을 씻어주시는지 몰랐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인내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실망시키는 베드로에게 비난하지 않았습니다.베드로에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누면서 우리자신들의 기대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우리는 비난하기 쉽습니다. 화를 내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조종”합니다. 그렇게 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비난하고 짜증을 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가?
미래에는 다 알게 될 것이라는 넓은 마음과 믿음의 마음과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진정 믿지 못하는 마음, 인내와 희망이 없는 마음으로는 사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로 시작됩니다.
지금 비록 불완전하고 허물과 문제가 있어도 인내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다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조급함”을 갖고 있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교회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해갈때에도 조급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 빨리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천천히 갖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오래 갈 수 있습니다. 요즘은 보면 느낌의 시대인지라 마음이 통한다고 필이 오면 너무 속도가 빨라서 속도를 내다가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때가 있습니다. 너무 우리가 조급하고 성급하면 쉽게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좀더 인내하면서 우리가 관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부부간에 사랑해서 결혼합니다. 그러나 서로 인내해야 합니다.
여러분 교인 서로간에도 그렇습니다.
서로 너무 다릅니다. 그러므로 즉각적으로 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내가 한 일을 즉석에서 상대가 이해하기를 원하고, 즉석에서 응답해주기를 원한다면,사랑을 베풀기가 어럽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이요,소망과 인내가 있는 것입니다.
비롯 실망이 있고 아직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더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풀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종종 교회에서 사랑을 실천하다가 낙심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선을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다가 맥이 빠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장에서 특히 목자들이 목원들이 섬기며 사랑하는데 너무 몰라주는 것같고 주면 줄수록 더 달라고 하는 것같은 태도를 보면서 낙심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소망을 갖고 변함없이 해야 합니다.
베드로를 주님을 기다려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이후에 주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기다려주었습니다.
“쿠오바디스”라는 영화에 보면 결국 베드로는 십자가에서 거꾸로 달려서 죽습니다.
마침내 이 사랑이 베드로에게 알려지고 체험되었기에 그는 거꾸로 십자가라고 지도 죽게 된 것입니다.
조급한 사랑은 병든 것입니다. 오늘 결실을 얻겠다고 덤비는 사랑도 변질된 사랑입니다.
믿음이 결여된 사랑은 타락한 것입니다. 주님은 묵묵히 이 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죽고,부활하며,성령이 강림하시게 될 때,베드로가 모든 것을 알것을 생각했습니다.

나가는말 )))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막연한 낭만적인 감정의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종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람에 대해서 인내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같이 끝까지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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