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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약속의 전수 (창 12:1~9, 갈 3:13~14, 요 8:5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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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말씀: 창세기 12:1 ~ 9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님께 바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아멘.

서신서의 말씀: 갈라디아서 3:13 ~ 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는 모두 저주를 받은 자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멘.

복음서의 말씀: 요한복음서 8:53~ 59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이오? 또 예언자들도 다 죽었소. 당신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를 영광되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헛된 것이다. 나를 영광되게 하시는 분은 나의 아버지시다.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분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며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서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몸을 피해서 성전 바깥으로 나가셨다. 아멘.

언제나 명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물결입니다.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갑니다. 이는 다르게 생각하면, 참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이들 고향을 떠나 오셨지요. 전국 각지에서 태어나셨다가 그 곳을 떠나서 여기에 오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또 여기 계시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전 세계로 떠나신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서 삽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신앙의 역사도 고향을 떠난 것과 함께 시작이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고향 땅 갈대아 우르, 그리고 다시 하란을 떠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라는 지방은 현재 이라크의 남쪽입니다. 그리고 하란이라는 곳은 이라크의 북쪽입니다. 예전에는 남쪽의 갈대아 우르와 북쪽의 하란을 포함한 이라크의 전 지역을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떠나서 오늘의 이스라엘, 당시의 가나안이라고 부르는 땅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출생한 곳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새롭게 지정해주는 땅에 가면 너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브라함을 축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이 약속을 믿고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와 하란 지방을 떠납니다.

이 떠남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설교를 드렸듯이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욕망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날리자. 우리의 문명을 과시하자. 무언가 인간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서 우리의 꿈과 욕망을 실현해보자. 그것이 바벨탑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욕망만을 내세우는 것을 보시고 그 탑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이렇게 바벨탑을 무너뜨림으로 인해서 인간의 욕망을 좌절시킨 후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새로운 축복과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결단하신 후에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간을 선택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위대한 축복을 주마.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거라.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서 고향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브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75세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후에 가나안에 정착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25년이 지난 99세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개인이었고 자연인이었으며, 한 가정의 조상이자 가문의 어른이었다. 이제 그 아브람을 택해서 오늘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으므로 이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이름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이는 만방의 아버지요, 모든 족속의 아버지이고 세계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 시야와 폭이 전 세계로 넓어지면서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조건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역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대들의 후손들은 이제 그 표시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 전 세계의 아버지라 하는 축복의 전제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물론 그 전에 아브라함은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 이름하는 서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마엘은 아랍 세계의 조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삭만을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으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모신 유대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족보를 최고의 족보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 백성뿐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민족주의의 계보가 아니라 세계주의의 계보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자꾸 유대주의, 즉 민족주의로 묶어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보시기에 정말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다른 유대주의적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도 지난 세월동안 씨족주의를 고집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박씨인데, 어렸을 적에 박씨는 ‘밀양’ 박씨와 ‘반남’ 박씨로 본관이 두 개뿐이라고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 때만 해도 동성동본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관이 두 개밖에 없는 줄로만 알고, 우선 이성을 만날 때에 박씨는 모두 제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박씨 종손에서 보내준 책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박씨에는 43개나 되는 본관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바도 부족했지만, 이것은 실상은 씨족주의의 한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동성동본이 얼마나 가깝다고 금지했었습니까.

또 우리에게는 지역주의, 학연주의 등 너무나 많은 주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씨, 지연, 학연 등을 떠나서 이제 새로운 땅을 개척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왜 그런데 매여야합니까. 그것이 우리가 그런 조건에 속했던 곳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일 뿐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세계로 나아가라는 부름을 받고 나왔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세계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신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유대백성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지, 아브람의 자손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2부 성가대와 함께 오스트리아 찰즈부르크에 가서 모차르트의 생가를 보았습니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태생이고, 찰즈부르크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왜 지금 저희가 사랑하고 좋아합니까.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찰즈부르크에 매여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세계화된 사람입니다. 또한 비행기를 탔을 때 기내음식으로 김치를 받으면, 김치는 한국 땅의 것이지만 이미 고향을 떠난 음식입니다. 세계를 향해서 움직이는 음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만들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이미 고향을 떠났습니다. 세계의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제품이 한국에서 어떤 수준을 가졌다고 인정을 받게 되면 KS마크를 획득하게 됩니다. Korean Standard지요. 그런데 지금은 KS마크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세계를 무대로 한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즉 Global Standard, GS 마크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는 GS가 되어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과 저는 한 가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비록 이 곳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서울 시민이자 대한민국 국민만이 아니고, 세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그런 역할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적인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유대교로 가두어버리고 유대 민족주의에 한정시켜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유대민족에 갇혀 버린 아브라함을 풀어 헤치기 위해서 다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아브라함을 속박시킨 유대인들의 삶은 Jewish standard, 이는 제가 붙인 명칭입니다, JS였습니다. Jewish standard 가지고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온 세계를 향한 것이므로 Global Standard, GS로 바뀌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 GS는 하나님의 standard, 즉 Godly Standard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축복의 역사가 멍드는 것을 보고, 율법에 매이는 것을 보고, 사람이 만든 모든 이념과 체제 속에 발목 잡히는 것을 보고, 아들을 부르셨습니다. 다시 풀어헤쳐서 우주적이며 넓고 깊은 축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아들에게 부탁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고향을 떠나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역사를 뛰어넘도록 영생을 주겠다. 이렇게 약속을 하시면서 예수님을 고향에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향을 떠나오게 된 곳이 바로 베들레헴 마굿간이었습니다. 이 날을 우리는 성탄절이라 이름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고향을 떠나 새롭게 이동하는 역사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던 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던 하늘나라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탁을 받고 그 분의 고향, 하늘나라를 떠나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눈으로 보았을 때 예수의 십자가는 종착역이 아닙니다. 중간 지점입니다. 예수의 인생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을 통해서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듯이 신앙인에게 있어서 인간의 죽음은 종착역이 아닙니다. 적어도 예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한, 죽음은 종착역이 아니고 중간역입니다.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 가운데 감동을 전해주었던 많은 분들의 인생은 길지만은 않았습니다. 영웅들 중의 많은 사람이 짧은 생을 살았습니다. 삶의 의미는 오랜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의 높이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의 폭에 있습니다. 얼마나 멀리 고향을 떠나서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지에 있습니다. 또한 삶의 의미는 후손들에게 얼마나 깊은 감동을 주는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깊은 축복과 진한 감동을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주십시다. 길게는 못할지라도 멀리 전파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살아갑시다. 신앙의 깊이가 있으며 신앙의 폭이 큰 아브라함처럼 살아갑시다.

추석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금까지의 축복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또한 내일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여러분의 바로 지금이, 내일을 다짐하는 시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역사가 시작될 순간입니다. 내일을 심어서 기르는 오늘이 보람된 날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오늘을 보내십시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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