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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분지 일을 취하는 자와 녹(祿)을 받지 않는 자 (느 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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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인가 다니고 있을 무렵에 저의 급우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청소반장’이었습니다.
  방과 후에 분단별로 청소를 맡으면, 책상과 걸상들을 다 뒤로 밀어 모아놓고 바닥을 쓸고 닦은 후에 다시 그 책상걸상들을 이제는 앞쪽으로 모아놓고 나머지 반을 청소하고 그 후에 책상걸상을 제자리에 줄을 맞추어서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청소 차례가 돌아오면 대개는 다 귀찮아하기 마련인데 저는 꽤 열심히 청소를 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특별한 ‘책임의식’ 따위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제 어머니께로부터 물려받은 ‘결벽증’이라는 고칠 길이 없는 고질병(?) 증세가 아마 그때부터 발발된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그래서 청소시간만 되면 남들이 대충하고 넘어가려는 것들까지 혼자서 꼼꼼하게 하곤 하니까 결국 ‘청소반장’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모든 분단원들이 힘을 합쳐서 청소를 하려고 해도 혼자서 빈둥거리는 친구들이 반드시 한두 명쯤은 있기 마련입니다.
  다른 친구들은 얼른 청소를 끝내고 집에 가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자기는 무슨 ‘청소 열외’라도 된 듯이 그 곁에서 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청소하기 좋아하는 ‘청소반장’이라 해도 속으로는 약이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임명된 ‘청소반장’도 아니고 해서 뭐라고 한 마디 할 수도 없고, 또 뭐라고 말한다고 해서 들을 친구들도 아닌 까닭에, 그저 나머지 친구들과 부지런히 하다 보면 그날의 청소가 결국은 끝나게 되곤 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큰 과업을 수행하고 있을 때에도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꼭 같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아주 판이하게 다른 두 부류가 그 한 집단 안에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어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들을 수행해 나갈 때 같은 한 교회 안에서도 어떤 대조적인 두 종류의 교인들로 나누어지게 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 안에서 자신의 실리와 이욕만 채움으로써 남들을 실족시키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중에도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1절부터 5절의 말씀에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 / 혹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곡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 혹은 말하기를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전당 잡히고 이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얻자 하고 / 혹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어 세금을 바쳤도다 /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으나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니 속량할 힘이 없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발언권이라는 것은 거의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1절에서 “백성이 그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었다는 것은, 그 불만이 얼마나 심화되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 줍니다.
  2절 이하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그 불만의 시발점은 식량 부족 사태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모든 노동력이 성벽 공사에만 집중적으로 투입되고 있었으니 자연히 가장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일할 시간이 없어지게 되고 그 결과 각 가정마다 끼니가 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6장 15절에 보면 이 성벽 재건 공사는 총 52일이 소요되었다고 했는데, 오늘날의 경우라도 집안의 가장이 직장을 두어 달 쉬게 되면 그 가족의 생계에 지장이 있을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유다 백성들의 그런 식량 문제는 뒤이어서 3절과 4절에 나오는 대로 그들의 가계부 사정을 악화시켰습니다.
  그들은 식량을 사기 위해서, 또 세금을 바치기 위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재산들을 전당잡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세율은 매우 높았고 그로 인하여 제국 말기에는 물가가 50% 이상 폭등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유다 백성들의 가계는 날로 어려워져가서 종당에는 5절에 나타난 대로 모든 재산들을 다 잃고 더러는 몸까지 팔리게 되는 최악의 상황들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백성들의 분노의 초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빚을 내어주고 이자 놀이하는 사람들에게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저희 자녀와 같거늘”이라는 말이 바로 ‘빚 주는 사람이나 빚 못 갚고 몸 팔리는 사람이나 사실은 다 같은 동족이 아니냐?’라는 뜻에서 하는 분노의 표출인 것입니다.
  자기 동족들에게 이자 놀이하던 자들은 7절에 보면 “귀인과 민장”들 즉 유다 백성 중에서 상류계급이며 부유층에 속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나중에 11절 하반절에 보면 그 이자율은 “백분지 일” 즉 매월 1퍼센트, 연리 12퍼센트로서 당시 중근동 지방의 일반적인 연리 20퍼센트에 비하면 낮은 것이기는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힘겨운 것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생계의 위협까지 받으면서도 성벽 재건 공사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바로 그런 상황을 오히려 이자 놀이하기에 좋은 기회로 여기고서 빚 못 갚는 동족들이 논밭을 날리고 자녀들까지 종으로 팔리는 것을 보면서도 끝까지 자기 받을 돈만 챙기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그 채권자들이 다른 이방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와 형제된 동족들이며 또 이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에 동참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욱 분통터질 노릇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쪽에서는 교회 일 때문에 피땀 흘리면서 일하고 있는데도 다른 한쪽에서는 그저 자기 좋은 것들만 챙기는 교인들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한 교회 안에서 이자놀이하는 교인은 설마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들은 교회에서 이런 궂은 일, 저런 힘든 일들을 맡아서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데, 그저 그런 다른 사람들의 봉사를 편안히 즐기는 재미로만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근본적으로는 역시 ‘백분지 일’만 챙기려는 자들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이사를 가게 되어 교회를 옮길 때에도 그 교회가 어떤 신앙을 표방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어찌하든지 헌금할 일 없고 힘든 봉사하지 않아도 될 만한 교회들만 찾는 교인, 자신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 교역자도 간섭하지 아니하고 그저 주일 아침 잠시 정신 수양하는 식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교회를 찾는 교인, 이런 교인들이야말로 오직 자신의 실리와 이욕만을 따라서 교회생활하는 자들입니다.
  혹은 아예 더 노골적으로 “내가 저 교회에 가면 더 쉽게 장로가 될 수 있겠지.”라는 계산으로 일부러 작은 교회를 찾아가서 뭉칫돈 헌금 한번 보란 듯이 내어놓는 교인, 다른 사람들이 죽도록 고생해서 개척하여 세운 교회를 자기 명예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교인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좋은 것들만 혼자 즐기고 어려운 일에는 자기 혼자 빠지는 교인들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열심히 하는 교인들에게 엄청난 사기저하를 가져다주게 됩니다.
  같은 당회원이면서도 큰 헌금에 혼자 빠지는 장로, 같은 제직회원이고 사실 재산도 많으면서도 교회 일에는 인색한 집사는 자기만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열심히 충성하고 있는 일군들의 짐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그 힘을 다하여 섬기는 일에 더욱 맥 빠지게 만들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혜미야는 그런 사람들을 과연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이어지는 6절부터 13절까지에 기록하기를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속량하였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저희가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위가 좋지 못하도다 우리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 것이 아니냐 /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백성에게 취하여 주나니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 / 그런즉 너희는 오늘이라도 그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취한바 돈이나 곡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지 일을 돌려 보내라 하였더니 /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 보내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저희에게 그 말대로 행하리라는 맹세를 시키게 하고 / 내가 옷자락을 떨치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떨치실지니 저는 곧 이렇게 떨쳐져 빌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은 느혜미야는 “크게 노하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인하여 노하심으로”(막 3:5) 저희를 둘러보셨다는 말씀이 있듯이 교회의 지도자들은 마냥 웃는 얼굴만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때로는 의로운 분노를 가질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헤매아는 “귀인과 민장”들을 만나는 대로 ‘사적으로’ “꾸짖기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공적으로’ 경책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교인이 범죄했을 때 먼저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을 때에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치리하는 원리가 여기서도 다시 한 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책망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그 첫째는 “지금 너희들이 돈놀이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너희 형제들이 아니냐? 우리는 바벨론에 잡혀갔던 동족들을 힘을 다하여 해방시켜 왔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어렵게 속량시켰던 형제들을 도로 종으로 팔리게 하고 있으니 이 도대체 무슨 짓이냐?”라고 책망한 것이 8절의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9절에서는 “우리 믿는다고 하는 유다 백성들이 이런 부끄러운 일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을 욕을 생각해 보아라. 너희가 정말 하나님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책망했습니다.
  여기서 10절의 말씀은 느혜미야도 이식을 받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자기와 자기 부하들도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 주기는 했지만 이자는 받지 않았으니 “당신네들도 더 이상 이자 놀이는 하지 말아라.”는 말입니다.

  귀인과 민장들이 그 말에 따르기로 하자 느헤미야는 그 약속을 절대로 어기지 못하게 하려고 아예 “제사장들을 불러 맹세를 시키면서” 만약 그 맹세를 어기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며 그 재산들은 다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옷자락을 떨치면서” 경고했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회중은 느헤미야의 그런 처사에 감사하며 “여호와를 찬송”하게 되었고 그 맹세했던 채권자들도 “그 말한 대로 행함”으로써 약속을 지켰습니다.

  느헤미야의 그런 경책은 오늘 우리들 역시 각자가 스스로 자신에게 새겨보아야 할 말입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정말 은혜롭고 즐거운 신앙생활을 누리면서도 자신은 교회를 위하여 조금도 힘들여 충성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곁에서 땀 흘리고 있는 형제자매된 성도들에게 정말 미안하고 염치없는 행동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두려워하고 있는 신자라면 어떻게 그런 이기적인 교회생활, 그런 욕심쟁이 교인 노릇을 신앙생활한답시고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각자는 정말 이 질문을 자신의 양심을 열고 받아들이고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고생하는 쪽은 따로 있고 그 고생 덕분에 이득을 보는 쪽은 또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실로 불공정하며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곰과 주인인 사람 사이이니 어쩔 수 없이 유지되겠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그런 관계가 결코 지속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한쪽은 그저 교회일 충성하느라고 고생만 하고 다른 한쪽은 그 덕에 좋은 것만 즐기고 지낸다면 그 관계라는 것이 결코 정상적으로 유지될 리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자기만족을 찾으려고 교회에 왔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서 자신을 오히려 예수님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바쳐드리며, 지금까지는 그저 무사태평하게만 교회생활하던 교인이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서 ‘교회가 내 편리와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교회생활을 통하여 그저 자신의 실리와 이욕만을 채우다가 다른 교인들까지 실족하게 만드는 ‘얌체 교인’의 모습을 이 시간 모두 깨끗이 탈피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교회를 자신의 봉사와 희생으로 섬김으로써 남보다 더욱 특별한 은혜를 받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까 보았던 2절부터 5절의 말씀에서, 대다수의 유대 백성들이 극심한 물질적인 궁핍을 겪으면서도 성벽 재건 공사에 끝까지 참여하고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빚을 지면서까지 52일 동안을 오직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전적으로 희생하며 바쳤던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그들이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보고 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반드시 그리고 속히 완수해 내어야만 할 중차대한 과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우선으로 하고 한다면 현실적으로는 개인의 희생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개인의 생활에는 아무 부담이 안 가는 한도 내에서 교회생활하겠다.”라는 계산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유다 백성들은 성벽 재건 공사를 위해서 빚돈 쓰고 이자 내고 결국은 저당 잡혔던 논밭 날리기까지 했는데, 요금 교인들에게 그런 말하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아이구, 목사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빚을 내어서 헌금하다니요. 생활비 쓸 것 다 쓰고 남는 돈 있어도 헌금하기 아까운데 없는 돈을 어떻게 빌려서 헌금합니까?”라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왜 안 됩니까?
  집 사고 차 살 때에는 은행 대부를 내어서라도 일단 사 높고 보아야하고, 자식 대학교 보내기 위해서라면 학자금 융자를 받아서라도 일단 등록금은 마련해 두고 보지 않습니까?
  이처럼 내 먹고 살고 내 자식 교육시키는 것 위해서 돈 빌리는 것은 조금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예 자연스러운 생활의 수단처럼 되어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왜 빚을 내어서 헌금하는 것은 그다지도 비정상적인 일처럼만 생각하는 것입니까?
  교회당 건축할 때에나 교회 건물 구입할 때 대부분의 교회가 일부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은행에서 빌려서 씁니다.
  그처럼 교회 이름으로 돈 빌리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데, 그 교회의 회원인 교인 자신이 그 교회에 헌금하기 위하여 은행 돈 빌려 보겠다는 생각은 왜 그처럼 이상하게만 여기는 것입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섬긴다, 교회 충성한다 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의 희생으로써 하려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자기가 먼저 쓰고 남는 것’만 가지고서 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예수님보다는 내 자식 대학이 더 중요하고 아직까지는 교회보다는 내 집 마련과 내 차 굴리는 것이 훨씬 더 우선이 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 생활의 ‘여분의 것’들을 구걸하시는 분이십니까?
  교회가 교인들의 ‘쓰레기 물질’을 모아서 겨우 운영되는 곳입니까?
  이처럼 자기희생 없이 말로만 ‘교회중심’으로 산다고 하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는 몇 년 몇 십 년이 지나도 세계선교는커녕 자기 교회 성벽의 돌 하나도 제대로 쌓아올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교회를 위하여 희생적으로 봉사 충성하는 교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제 본문 14절부터 19절에 보면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부터 삼십 이년까지 십 이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 오십인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고 기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사람들에게만 호통을 치고 자기는 편안히 앉아 있던 사람이 결코 아니라, 정말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한 지도자였습니다.
  우선 그는 그 공사 기간뿐 아니라 유다 총독으로서의 그의 재임 기간 전체를 통하여 아무 봉급을 받지 않음으로써 이 예루살렘 재건이 결코 개인적 욕심으로 시작된 일이 아닌 것을 뚜렷이 보여 주었습니다.
  다른 총독들은 그들의 지위를 사유재산축적에 악용하느라고 다들 바빴었지만, 느헤미야는 그 공사 전후 기간 동안 아무 “땅을 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성벽 재건 공사가 끝나면 예루살렘 주변의 부동산 가치가 급등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오늘날의 부정한 공무원들이나 국회의원들 같으면 결코 놓칠 리가 없는 호기였지만 느헤미야는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7절 이하에 보면 느헤미야는 공사 기간 내내 매일 점심때마다 실로 대단한 분량의 식탁을 제공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대략 계산해 보면 한꺼번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나눌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는 공사 책임자들뿐 아니라 유다 백성들 중에서 특별히 가난한 자들과 또 멀리서 온 이방인 출신 자원봉사자들을 위하여 그 많은 양의 점심식사를 순전히 개인비용으로 부담했던 것입니다.
  물론 느헤미야는 바사 제국에 있을 때 ‘왕의 술관원’이라는 고위 관직에 있었으니 엄청난 부자였음에 틀림없지만, 아무리 재력이 크다 하더라도 순전히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그처럼 풍성하게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큰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15절에서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아까 9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던” 까닭에 희생은커녕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 했던 자들과 좋은 대조를 보여줍니다.

  실로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진짜로 늘 간직하고 있었던 까닭에 이처럼 하나님 사업을 위해 그처럼 희생적으로 크게 바치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것이며, 또한 자신의 이익은 조금도 따지지 아니하고 오직 “백성의 부역이 중함”을 먼저 이해해 주고 그들 앞에서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는 일에만 전심전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에게 하나님께서 그가 기도한 대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보다 더 잘 알고 남보다 교회생활의 경험이 더 많은 사람이 교회 일을 이끌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남보다 먼저 봉사하고 남보다 더 많이 희생하는 사람이 이끌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라는 사람이 개인 치부에만 급급하고, 장로라는 직분이 무슨 명예직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은 정말 현대교회의 비극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나는 목사이니 헌금할 돈이 어디 있나? 나는 그저 헌금하라고 설교만 부지런히 하고 헌금은 교인들만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크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헌금하라고 설교하는 목사 자신부터 헌금생활에서 희생적인 모범을 보여 주지 않으면 장로들이 누구를 본으로 삼고 헌금하겠으며, 교인들은 어떤 장로를 본으로 삼고 헌금하겠습니까?
  교인들만 열심히 전도해서 교인 수자 늘여 놓고 장로들만 죽도록 헌금해서 교회 건물 지어 놓은 후에, 이제 자기는 ‘큰 교회 목사’라는 듣기 좋은 이름 다닐 꿈만 꾸고 있는 목사라면 그야말로 주의 일 한답시고 사실상 자기 이욕만 채우려는 삯군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은혜라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서만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시작에 불과한 것이고, 더 큰 은혜는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남달리 더 희생하고 남보다 더 많이 충성봉사할 때 진짜 갑절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경향교회의 당회를 모일 때, 이 교회를 이만큼 세우기 위하여 평생을 다 바치고 최고의 것과 전부의 것들을 다 바치신 장로님들의 얼굴들만 보아도 절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매달 한 번씩 심방장 보고회가 열릴 때마다, 이 분들이 한 영혼을 더 건져내기 위하여 바쁜 시간, 피곤한 육신, 아파트 관리인들의 핍박, 사람들의 냉대를 무릅쓰면서, 매일 같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충성하는 모습의 단면들을 대할 때마다, 목사인 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게으른 교인이 볼 때에는 그처럼 희생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그저 힘들기만 하고 자기는 절대로 따라하지 못할 일로만 보이지만, 그 당사자들은 바로 그처럼 죽도록 충성봉사하는 가운데 그런 불충한 교인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 수 없는 놀랍고도 큰 은혜를 그야말로 ‘믿음의 신비’처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러주신 이 은혜로운 교회 안에서 맡겨주신 귀중한 사명들을 수행할 때, 오직 자신을 먼저 희생하는 자세로 섬기는 가운데 교회와 지회와 봉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되시고 오직 죽도록 충성하는 가운데 세상이 알지 못하는 더욱 깊고도 뜨거운 은혜들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신 말씀을 통하여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교회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서로 판이하게 다른 두 부류의 교인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지 정도와 수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이 지상교회 안에는 지금도 신앙생활을 ‘빙자하여’ 오직 자신의 이익과 만족만을 찾고 누리는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정말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 교회 안에도 아직도 ‘백분지 일을 취하는’ 재미로 나오는 사람도 남아 있을 것이고, 반면에 ‘녹을 받지 않으면서’ 오히려 곁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꺼이 큰 식탁을 베푸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한 교회 교인들이 그처럼 정반대로 다른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바로 그 교인에게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은 과연 어느 쪽이겠습니까?
  혹 하나님 이름으로 내 욕심만 채우면서 살고 있지 않는지,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내 마음의 수양이나 내 가족의 화평이나 내 자식의 교육을 위한 수단만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는지 한번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다면, 우리 각자는 백 마디의 찬양이나 기도보다도 먼저 한 가지의 희생적인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억해 주시는 한에는 결국 그것이 백배의 은혜와 천배의 축복으로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을 믿고 체험함으로써, 정말 신앙생활에 재미가 있고 교회생활에 보람이 넘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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