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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 (눅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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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할 때 마음이 움직입니다>
청춘남녀가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대개 남자가 여자를 따라다니며 결혼해줄 것을 호소합니다.
그래서 총각이 사랑하는 처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별의 별짓을 다합니다.
자기가 능력 있는 청년이라는 사실을 과시하기도 하고,
순정파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상대방의 심금에 호소하는 작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지가지 방법을 총동원해도
상대방 처녀가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작고한 시인 중에 김관식(金冠植, 1934-1970)이라는 기인(奇人)이 있습니다.
자신의 명함에다가 '대한민국 김관식'이라고 새기고 다닐 정도로 늘 화제를 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미당 서정주 선생의 처제와 결혼하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시인이 되기 위하여 미당 선생의 사랑방을 들락거리던 김관식은
어느 날 미당의 처제를 보고 첫 눈에 반했습니다.

김관식은 즉각 미당의 처제에게 청혼했지만 워낙 추남으로서
자유방임형으로 생긴 외모 탓에 퇴짜를 맞고 말았습니다.
별의 별 방법을 다 써도 상대방이 말을 듣지 않자 김관식은 마지막 수단을 썼습니다.
자신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죽겠다고 떼를 썼던 것입니다.
결국 미당의 처제 방옥례 여사는 음독자살 소동 끝에 병원에 실려 간
김관식의 비장함에 끌려 두 손을 든 채 결혼하고 말았습니다.

옛날 분들이 결혼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경우가 꽤 많은 편입니다.
우리 형수님도 처음에 우리 형님의 청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는데 형님이 밤마다
형수님의 집 담밖까지 찾아와 마당에 큰 바윗돌을 쿵쿵 내던져서 결혼했다고 합니다.

강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청혼을 들어주었다는 이야기는 꽤 많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혀 마음이 없었는데 강짜만 부린다고 해서
청혼에 응했다는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은근히 끌리는 마음이 있기는 있었는데 확고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상대방이 사생결단을 한 채 매달려서 결국 마음을 정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통로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한쪽에서 집요하게 강청(强請)을 할 경우 대개 흔들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떨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대화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의사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됩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계시지 않는가?
그런데다가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우리에게 다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 아닌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구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바라는 소원은 다 들어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도대체 기도는 왜 필요한 것일까?
우리의 기도 없이도 얼마든지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왜 굳이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기도는 하나의 불필요한 과잉이 아닐까요?
여러분, 기도는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부부가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관계가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서로가 진실로 사랑하는 부부사이라면 반드시 친밀한 대화가 오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친밀한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재확인하시고
우리는 거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힘없는 과부 對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그런데 이렇게 기도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참 중요한데 우리는 종종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한 데로 척척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오랫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왔는데 응답이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 생활을 아예 포기하고 기도 없이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흔히 본문 말씀을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필이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려고"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너무나 쉽게 낙심한다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조금 기도해보다가 응답이 없으면 기도를 아예 포기한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해 이 비유 말씀을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마을에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재판관의 제일 가는 사명은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길 때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주는 일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 재판관이 해야 할 최고의 임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재판관은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니, 아주, 아주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세요.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었습니다.

여기서의 재판관은 헤롯왕이나 로마 정부에 의해서 임명된 치안 판사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들은 굽은 판결을 내리기로 악명 높은 판사들이었습니다.
원고가 뇌물을 바치지 않고서 재판에 이기는 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고기 한 점에 정의를 팔아 넘기는 강도 재판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대개 이방인들이었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불의하고 무자비한 사람들이었기에 사람의 인권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정의를 구현하는 재판관치고는 최악의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자, 그런데 이 불의한 재판관에게 정의를 호소하는 고소인이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과부는 고아와 더불어 가장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히 가부장적인 사회속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산다는 것은 생계 유지에 곤란을
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유난히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이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직하고 의로운 재판관이라고 할지라도 힘든 판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에게 어떤 정의를 기대하는 일은 아예 불가능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한 가지 비장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끈질김(persistence), 바로  포기할 줄 모르는 집요함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이 과부는 자주 그 재판관에게 찾아가서 자기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재판관이 콧방귀도 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찾아가서
호소하고 또 호소했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자기에게 끼친 억울한 일을 바로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는 것이지요!
이 과부는 돈도 없지, 빽도 없지 오로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끈질기게 매달리는 여인에 대해서 재판관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4-5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도 자주 찾아와서 귀찮게 구니까 마침내 재판관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세상이 알아주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악명 높은 재판관이지만 이 여인을 이길 도리가 없구나, 내가 졌다!
이 과부를 도와주어야 하겠다."
마침내 이 여인의 끈질긴 호소에 항복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끄트머리에 보면 만일 내가 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는 말씀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 재판관이 이 여인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을 경우
결국 폭행을 당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염려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과부는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 때문에 마침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이 비유를 마치자마자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6-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을
하나님과 비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교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날카롭게 대조하시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불의한 재판관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비교가 아니라,
심지어 불의한 재판관도 힘없는 과부가 끈덕지게 부탁했을 때 소원을 들어주었는데
좋으신 하나님은 밤낮 울부짖는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하물며 불의한 재판관도 이럴진대 의롭고 좋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끈질기게 기도할 때 당연히 들어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을까?>
자, 그런데 정말 중요한 말씀은 8절 맨 끄트머리에 있는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인자가 온다는 말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장차 재림하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탄식이지요.

여기에서 주님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부정형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긍정형으로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의문형으로 말씀하십니다. 
모호하고 불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주님이 지금 이 세상에 계셔도 믿음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장차 재림하실 때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 있는 사람들을 찾기가 점점 어렵다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의 맨 끝에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믿음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조금 기도하다가 금방 응답이 없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쉽게 주저앉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끈덕지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재림하실 때 세상에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사람들의 믿음이 점점 떨어져
믿음 좋은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흐를수록 끈덕지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말 것입니다!

사실, 요즈음과 같은 세속화와 과학만능의 시대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좀 별종(別種) 취급을 받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기도하지 않고서도 모든 일이 척척 잘도 돌아가는데 기도해서 무슨 소용이 있나?"
세상 사람들은 기도하는 행위 자체가 우스운 일이라고 치부합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세상 풍조를 아셨기에 당신이 재림하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단(豫斷)하셨던 것이지요.

<성도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다 응답됩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아르트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는 심한 근시안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토스카니니는 좋은 눈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연주회에서 토스카니니는 첼로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지휘자가 몸이 아파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급한 나머지 단원 중에 한 사람이 지휘를 맡아야만 했는데 토스카니니가 뽑혔습니다.
지독한 근시안으로서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던 토스카니니는 언제나 악보 전체를 외우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날도 악보를 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임시 지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토스카니니는 심한 근시안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연히 세계적인 지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눈이 좋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오히려 눈이 나빠서 행운을 잡았던 것이지요!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기도한 대로 안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로 인도하신 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응답되지 않은 기도일지라도
결국 더 좋은 쪽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적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 낙심하지 마세요>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채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얼마간 기도했다가 응답이 없다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없는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덕지게 매달렸더니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하나님은 그와 같은 재판관과 비교가 안 되는 분이십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끈덕진 과부의 간청에 못 이겨 도와주고 말았는데
좋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끈질기게 기도하실 때 더더욱 들어주십니다!

여러분,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어리석어서 어떤 길이 좋은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40일 작정 새벽 기도회를 통하여 자녀들을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을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언젠가 기라성(綺羅星) 같은 인재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기도는 언젠가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김 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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